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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참여하시게 된 동기는?
답. 1972년도에 정부에서 새마을운동, 잘살기운동을 펼쳤는데 저는 그때 결혼을 해서 둘째 아이가 첫돌이 안 된 새색시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부에서 시멘트를 지원받아서 새마을사업을 할 줄 알았던 우리 마을이 빠졌다고 했습니다. 이장님에게 왜냐고 물었더니 우리 동네 숙원사업은 냇가에 큰 다리 놓는 일인데 자부담이 너무 많아서 숙원사업을 못 하겠다고 해서 우리 마을은 빠졌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마을 자체적으로 부녀회 20명이 매월 음력 보름에 모이는데, 그때 그 얘기를 했더니 남자들이 하는 게 맞지 우리가 나서면 되느냐면서 제가 더 강조를 하면 이분들이 말이 안 통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을 하니 이웃마을은 시멘트를 받아서 부엌도 고치고 지붕개량도 하고 아우성인데라는 생각에 잠이 안 오는 것입니다. 부녀회를 다시 모아 ‘우리가 평소 논밭에 일하러 가면서 아이들을 밭고랑에, 소나무 밑에 재우고 얼마나 힘들었냐 만약 회관이 있으면 탁아소를 만들 수 있다. 기금이 없으니 구판장도 하나 만들자’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때는 전부 사람 손으로 모내기를 했는데 농사가 주업이다보니 75호 되는 농가에 밥을 해야 하는 사람 한명이 빠지니까 일손이 모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가마솥에 동네 밥을 한꺼번에 해서 점심시간이나 새참시간에 가지러만 오면 밥하는 인력이 전부 일손이 될 수 있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회관을 짓자고 하니 이제는 돈이 문제였습니다. 부녀회에서 1년 동안 모아놓은 돈이 10만 원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돈이 되는 만큼 시멘트를 사고 모자라면 외상으로도 사서 나중에 구판장사업을 해서 갚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남자들은 반대 할 것 같아서 우선은 각자 자기 남편만이라도 설득을 시켜 보자고 한 후 3일 후에 다시 모이자고 했습니다. 3일후에 모여서 얘기를 들어보니 2/3 남자들이 반대를 했고, 시어머니들도 젊은 것들이 모여서 돈을 모으고 물건을 사서 가르고 정신없이 만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남편들을 제쳐놓고 일단 시어머니들부터 우리 편으로 만들자는 생각에 당시 어른들이 가고 싶어 했던 진주 남공댐공사에 모시고 가기로 했습니다. 집집이 쌀을 거두어서 밥을 하고 떡을 해서 65세 이상 되는 시어머니 27명과 부녀회원 20명이 처음으로 나들이를 했습니다. 기차를 처음 타본 할머니들도 많았고, 남강댐공사장에 가서 보니 큰 강을 막아서 옥토를 만든다는 설명에 ‘사람의 힘이 이렇게 크냐, 그래도 탈이 나지 않느냐’하면서 죽기 전에 합천 해인사도 구경 한번 하는 게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합천 해인사에도 모시고 갈 테니 대신 어머니회를 하나 조직하자고 했고, 그 자리에서 할머니 회장을 뽑아 부녀회는 보름에, 어머니회는 초여흘에 모이기로 해서 동네 제일 어른 집에 모였습니다. 어머니회부터 튼튼하게 하려고 어머니회라고 불러드렸더니 예상외로 협조를 잘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재수 없게 식구들 밥먹기 전에 쌀을 떠낸다고 반대하셨는데 합천 해인사에 가기로 약속을 했더니 며느리가 떠놓은 쌀에 시어머니가 한 숟가락 더 쌀을 떠놓았습니다. 어머니를 설득하고 나니 남편을 설득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어머니 27명, 며느리20명, 47명의 여성회원이 모이게 되었고, 여기저기서 우리 며느리, 우리 질부도 넣자고 하셔서 회원이 5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남편들에게 우리가 회관을 짓겠다고 했더니 시멘트도 안주는데 어떻게 할 것이냐 했습니다. 회관을 지으려고 생각하니 제 무식한 생각에도 설계도가 있어야 되겠고 동네 공동으로 쓰는 마을 땅을 사용하려면 바깥어른들의 명을 받아야 했습니다. 막걸리와 담배를 준비해 놓고 바깥어른들에게 며느리 회원들에게 좋은 말씀 좀 해 주시면 좋겠다고 하였더니 처음에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하더니 할머니들까지 나서니까 동네가 시끄럽다고 얘기하시면서도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기분 좋게 막걸리도 마시고 흥이 났을 때 할머니 회장이 처음에는 여자들이 동네 팔아먹는다고 생각했는데 남강댐공사장에 가보니 우리가 눈을 떠야 되겠더라고 얘기했고, 또 어떤 할머니는 친정에 가 보니 우리 동네처럼 따뜻한 사랑방에 앉아서 막걸리 마시고 화투 치고 그래서는 안 된다. 젊은이들이 하는 일에 우리가 동참하기로 했다. 그런데 탁아소도 하고 물건도 같이 떼어다 파는 구판장도 하고 농사철에 공동취사장도 만들려면 동네 땅에 회관을 지어야 한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바깥어른들께서는 아무데나 동네 집을 짓는 것이 아니다 가만히 있어도 내년에 정부에서 시멘트 주고 할건 데 왜 나서서 야단이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인품을 갖추신 어른이 중재를 하면서 자금은 어떻게 조달할 것이며 몇 평 정도로 할 것이냐 물었고, 저는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젊은 며느리들이 앞장섰으니 암탉이 운다 하지 말고 되도록 일을 해 보자며 회관을 지을 장소를 정해 주셨습니다. 자금은 얼마 없어서 절미저축 한 것에 농협에 빚을 내고 다시 절미저축해서 갚을 것이며, 농협에는 저희 집 논을 저당잡히면 된다고 했더니 잘 사는 할아버지 한 분이 제가 열성적으로 나오니까 희사를 하겠다며 시멘트를 희사했습니다. 25평정도의 땅을 허락받고 새마을과에서 알려준 설계사무실에 가서 설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을 어르신들이 여자가 지으니까 부녀회관으로하라는 말을 했을 때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설계대로 회관을 지어달라고 하면 돈이 많이 나올 것 같아서 토근업자들에게 사정을 해서 거푸집을 빌리고 철근이 얼마가 필요한지, 공사할 업자 3명을 우리 마을분과 연결되는 사람으로 선정을 했는데 최하 50만 원은 들겠다고 했습니다. 1년 내내 절미저축해서 모은 돈이 10만 원이었는데 50만 원은 정말 큰 돈이었습니다. 자갈도 돈으로 사는데 돈이 없었기 때문에 가까운 냇가에 가서 자갈을 주어왔고 땅을 높여야 되기 때문에 밤에는 땅을 다졌는데 밤에 땅을 다지니까 동네 어른들이 시끄럽다고 해 말 한마디 못하고 땅을 다졌습니다. 또 브로꾸를 사려고 하니 브로꾸는 비싸고 브로꾸 찍는 기계를 빌리니까 값이 얼마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브로꾸 만드는 비율을 알아오고 브로꾸 틀을 4개를 빌려와서 목장갑을 끼고 찍어냈습니다. 업자들이 인건비만 받고 공사를 해 주었는데 당시 돈이 모자라서 제 논을 저당 잡히려고 했지만 시아버지에게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친정아버지에게 말씀을 드려서 논을 저당 잡히고 돈을 빌리자고 말하고 농협조합장에게 갔는데, 조합장님이 친정 논은 안 된다며 신용보증으로 돈을 빌려주셨습니다. 마을어른들, 친정아버지, 시아버지가 보증을 섰고 결국 공사비를 충당을 해서 회관을 지어냈습니다. 그렇게 많은 분들의 협조와 도움을 얻어서 6개월 만에 단층 슬라브 25평 답촌부녀회관을 짓게 되었는데, 당시 중앙지기자 지방지기자 등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정말 정부 보조 한 푼 없이 했느냐, 뒤에서 누가 시켜 줬느냐며 의아해 했습니다. 양옥집을 짓는 것을 마을 어른들도 처음 봤고, 저도 처음 봤는데 브로꾸가 한단 한단 올라갈 때 마다 동네사람들이 이렇게 집을 짓는 것은 처음 봤다면서 이 안에 들어가서 회의하다가 천장이 내려앉아서 압사당하면 어떻게 하냐는 얘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회관을 지으면서 여러 가지 애로사항이 많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몰랐겠지만 저는 울기도 많이 울었고 부처님, 천지신명님에게 도와달라며 사람들 마음이 모아지게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사실 동네 남자분 말대로 조금 기다리면 내년에 정부에서 지어준다는데 그때 제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시작을 했는지 생각을 해 보니까 한 해가 처지면 우리는 10년이 처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회관 가운데는 회의실, 옆에는 구판장, 한쪽에는 온 동네 밥을 지을 수 있도록 가마솥을 걸고 취사장을 겸한 다목적 회관을 만들었더니 동네어른들이 장하다면서 저에게 공을 돌렸고, 어른들의 격려와 독려, 채찍질로 된 것이니 이제는 나무 밑에서 놀지 마시고 회관을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1972년도 정부여성새마을사업을 처음 시작하던 해에 여성부녀회 자력으로 해서 완공을 했는데 결국에는 20만 원의 빚이 그대로 남았습니다. 그런데 군에서 그것을 알고 면장님의 안내로 군수님이 저희 집에 와서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느냐며 회의록을 보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성의가 놀랍고 자진해서 부녀자들이 이렇게 나선 것은 전국에서 처음이라면서 20만 원을 군에서 지원하겠다고 했습니다. 정말로 저희들의 꿈인 회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한 가지 사업이 제대로 되고 나니까 그 뒤부터는 그야말로 진행이 잘 되었습니다. 하면 된다는 말을 실제로 저희가 느꼈고, 또 마을어른들께서 그 공로를 여자들에게 치하했는데 어른들이 끌어주셨기 때문에 된 것입니다. 73년에 저희들도 기초마을로 인정되었고, 저는 부녀지도자로, 또 남자지도자분과 함께 동네추진위원회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시작한 일이 마을길을 넓히는 것이었습니다. 마을길을 넓히려면 길가의 집을 안으로 넣어야 리어카 두 대가 비켜도 될 정도의 길이 만들어지는데 마을 어른들이 회관을 짓고 난후에는 정부에서 시멘트도 지원하고 공무원들이 와서 지도를 하니까 마을 길 넓히는 것은 걱정하지 말라며 우리가 집을 줄이겠다면서 큰 골목부터 작은 골목에 있는 집까지도 전부 땅을 희사했습니다. 요즘은 헌혈로 좋은 일을 하듯이 마을 길 넓히는데 나도 한 몫 해야 되겠다 해서 새마을가꾸기 사업으로 마을길을 넓히는데 온 동민들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초가집이 상당히 귀해 보이고 좋아 보이는데 초가집은 1년에 한 번씩 이엉으로 이어야 됩니다. 그래서 지붕을 다시 덮어야 되는데 그 속에는 벌레도 많아 비위생적이고 경사도 가팔라 거기서 떨어지면 큰일입니다. 그 일을 해마다 해야 되는 어려움이 있는데 정부에서 지붕개량부터 먼저 시작한 것입니다. 지붕개량을 하려고 하니까 정부지원도 물론 있었지만 자비부담도 많았습니다. 객지에 나간 자녀들이 그것을 알고 지붕개량을 하는데 보태겠다해서 100% 지붕개랑을 했습니다. 사람 욕심이 말 사면 경마잡히고 싶다고 슬레이트를 올려놓고 나니 지붕에 칠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도색까지 하니 동네가 확 달라졌습니다. 환경이 바뀌니 사람들 마음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가난을 숙명으로 알고 타고 날 때부터 팔자가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게 살고 부자로 복을 타고 난 사람은 부자로 산다는 사람들의 마음이 바뀌는 것 같습니다. 일이 잘 안 되고 누가 병이 나면 굿을 하고 무당을 데려다가 산소에 가서 푸닥거리를 했는데 그런 일도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전 부엌은 흙과 돌로 만들어 가지고 동선거리도 물론 길지만 허리를 구부려서 그릇을 씻고 행주를 가지고 부뚜막을 훔치면 흙물이 그대로 듭니다. 그만큼 비위생적으로 살았는데 시멘트로 골목길만 넓힐 것이 아니고 부엌도 지금의 싱크대 높이로 시멘트만 발라줘도 좋겠다는 제 욕심에 지붕개량이 더 급하니 부엌에는 사과궤짝을 갖다놓고 그릇을 씻으라는 남자들에게 사정사정해서 부엌개량도 같이 했습니다. 부엌개량을 하고 나니 요즘 멋지게 지은 아파트 부럽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는 새마을운동에 우리도 모르게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저 같은 경우 부녀지도자로 위촉되고 나서 당시 수원의 새마을지도자연수원에서 일주일동안 교육을 받았습니다. 사례발표를 하는데 앞서 회의했던 지도자들 이야기도 듣고 정부에서 나온 분들의 이야기도 듣고 또 분임토의를 하면서 공부를 열심히 했더니 그동안 바닥났던 저의 지도력이 충전되어서 얼마든지 더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불 붙었습니다. 그렇게 하다보니 저희 마을이 저희 군에서 새마을가꾸기사업 일등마을이 되었습니다. 요즘의 지도자 초정간담회처럼 10리, 20리 떨어진 이웃마을에 마을 어른들과 부녀자들이 있는 곳에 가서 사례발표를 해 주면 메모를 하는 사람, 혀를 차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시멘트를 준다고 해도 안 받으려고 하는 동네가 있었는데 제가 사례발표를 갔다 온 마을들은 전부 신청을 해서 제가 마치 새마을전도사처럼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당시는 차가 없어서 돌아올 때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보람도 있었습니다. 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시고 그분들이 저희 마을 이상으로 잘 가꾸시는 것을 보면 아무것도 아닌 내가 이 분들에게 오히려 감사를 드려야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꾸기 사업 40년 전으로 올라가보면 지금은 저희가 바꾸고 고치고 했지만 그야말로 우리는 초가집속에서 기어들고 기어나듯이 살았고 사람은 그렇게 사는 줄만 알았습니다. 정말 감사한 것은 새마을운동을 주창하신 박정희 대통령께서 당신이 그런 집에서, 그런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셨기 때문에 이것을 해야 된다 했고, 소득증대사업이라 해서 또 열심히 했습니다. 새마을공장을 세우는데는 저희 남자지도자가 앞장을 섰습니다. 우리 마을에서 부지를 희사할 테니까 새마을공장까지 오는 전기를 끌어오라고 했습니다. 새마을공장이 저희 마을에서 전주 5개 설 거리밖에 안 되기 때문에 저희가 밭을 줘도 전기를 끌어 오는 것보다 훨씬 작은 돈이었습니다. 새마을공장은 합성수지공장이라해서 요즘 보면 못자리할 때도 쓰고 농사에도 사용하는 비닐을 만들어 내는 공장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농한기에 유휴노동력으로 있던 사람들이 그 공장에 가서 월급을 받고 열심히 일도 했습니다.

문. 소득증대사업으로 하셨던 일은?
답. 소득증대사업으로 남자들은 수확량은 많지만 밥맛이 없다고 해서 꺼렸던 통일벼 재배를 했는데 당장 배고픈 것보다는 찹쌀을 좀 섞으면 된다 해서 통일벼 재배에 심혈을 기울였고 여자들은 돼지새끼를 길러서 다시 새끼를 낳으면 장에 내다파는 일을 했습니다. 돈콜레라가 걸려서 돼지를 몰살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다시 일어나 돼지도 키우고 밤나무단지도 만들고 또 남자들은 한우를 살 찌워서 파는 한우비육사업 등의 소득사업을 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보람있었던 일은?
답. 몇 번을 생각해도 이 일은 제 자신과 가정을 위해서 한 일이 아니고 우리 마을 모두를 위해서 한 일이었습니다.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고 혼자서는 하기 힘든 일인데 치하를 못할망정 저를 몰아세워서 그만두려는 마음을 몇 번이나 먹었지만 지금까지 고생한 것이 너무 아깝고 할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참고하자는 생각으로 지금 까지 지도자생활을 했는데 웃었던 순간보다 남모르게 울었던 순간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지붕개량, 마을안길 넓히기, 부엌개량, 회관완공을 해 놓고 나니 딸아이가 첫돌을 맞았습니다. 제가 밖으로 돌아다녀서 딸아이가 젖배가 곯았다고 하며 생일선물로 조그마한 한 돈짜리 금반지와 동네어른들이 붓으로 표창장을 써서 동네어른들이 지장을 찍어서 주셨는데 그 일이 보람을 느끼고 더 잘해야 되겠다는 사명감도 느낀 일이었습니다.

문. 새마을부녀지도자로서 자부심이 있다면?
답. 지도자라는 말조차도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일이 한 가지 한 가지 이루어져 나가는 과정에서 또 새마을연수원교육을 받으면서 정말 내가 지도자로서의 자질도 있고 능력도 있음을 느꼈고 스스로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난 지도자 중에서도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역량이 있나보다 라고 저를 믿게 되었으며 마음 속 깊숙이 보람을 느꼈습니다.

문. 새마을부녀지도자로서 애로사항이 있었다면?
답. 주위 어른들이나 남자분들, 또 일부 회원들이 왜 자꾸 당신이 하자는 대로 해야 되느냐 한 가지 일을 하고 나면 면서기들과 의논해서 시멘트 얻어 와서 또 하자고 하는데 그만해도 되지 않겠냐 할 때는 참 난감했습니다. 그럴 때는 해결방안으로 우리보다 앞선 마을에 도시락을 싸가지고 갔다 왔습니다. 사람들 마음이 산만해지고 흐트러질 때 규합하는 방법으로는 견문을 넓히는 것 밖에 없습니다. 반대를 하시던 분들이 오히려 저보다 더 다른 것을 보고 느끼고 저보다 앞장서는 것을 보고 이것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 참 잘 생각했다 하면서 자화자찬을 했습니다.

문. 당시 정부나 공무원들의 지원은 어떠했나요?
답. 새마을운동 아이디어를 내신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정말 대단한 분이십니다. 대한민국이 운이 있어서 그런 분이 이 땅에 태어났다 싶을 정도로 저희 눈높이에 딱 맞는 사업을 강요도 아니고 스스로 하게끔 했습니다. 마을마다 시멘트를 주면 될 텐데 스스로 비교평가를 해 봐라 해서 원하는 마을만 준 것입니다. 정부지원 또한 국책사업이다 할 정도로 최우선 사업이 새마을사업이었습니다. 저희 마을 같은 경우에는 공무원들이 밤에 저희 마을에 와서 주민회의를 할 때 상주를 하다시피 했습니다. 될성부른 마을은 공무원들이 민폐를 안 끼친다고 도시락을 싸와서 오히려 동네어른들에게 맛있는 반찬을 나누어 주며 헌신적으로 봉사했습니다. 그리고 출퇴근 시간이 따로 없었습니다. 심지어 미끄러운 구두를 신고 초가지붕에 올라가서 떨어져서 다리를 다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공무원들은 아주 헌신적이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 전과 후에 바뀐 점이 있다면?
답. 마을이 변한 모습은 눈으로 보면 보일만큼 가시적으로 다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것은 사람들의 마음의 변화입니다. 첫째, 하면 된다는 생각에 해 보고 느끼고 하면서 자신감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무기력하고 복을 타고 나야 잘산다는 생각이 없어졌습니다. 탈이 나면 무당한테 가는 것도 아니고 태극기만 갖다 꼽으면 탈도 안 난다는 심경에 변화가 생겼고 미신을 타파하게 되었습니다. 또 새마을이전보다도 이후에 생활을 고치고 나니까 이렇게 좋아지는구나, 국가지도자가 이렇게 끌어주면 나도 내 가정을 이렇게 끌고 가야 되겠다는 국민정신개조운동을 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문. 후배들이나 국민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은?
답. 어디까지나 제 소견이고 제 경험입니다. 나 한사람이 좀 힘들고 또 폄하하는 이야기라든지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속상하다고 결심을 집어던지지 말고 꾹 참고 자기를 극복해서 나를 위해서라기보다 남을 위해서 어떤 일이나 또 어떤 정신으로 자기들 주변이나 자기들의 무리 속에서 그야말로 밀알 한 알이 썩어야 수많은 밀알이 나오듯이 그런 마음으로 남을 위해서 사는 정신, 이것을 가지면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내가 보는 남도 나에게 그렇게 다가선다는 진리를 저는 알았습니다. 저만 지도자가 된 것이 아니고 새마을운동을 하고 보니까 당시에는 모두가 지도자 정신이 배어 있었습니다. 어떤 어려운 경우라도 포기하지 말고 좋은 점은 상대에게 돌리고, 나쁜 것은 내 탓이라 여기고 세상에 마음이 맞으면 안 되는 일은 없으며 내가 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나를 극복하고 나면 남을 극복시키는 것은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중요합니다. 봉사정신 희생을 입으로만이 아니고 내가 직접 실천하는 것을 보여주면 그 사람들 마음이 움직이니 그것을 보여주자는 것입니다. 저 같이 어리석은 사람은 멋 모르고 쫓아갔지만 지나고 보니까 그 나이로 돌아가서 지도자를 하라고 하면 참 잘할 것 같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영리하고 머리도 잘 돌아가기 때문에 기대를 많이 합니다. 나를 버리고 남을 위해서 살아야 그게 정말로 잘사는 것입니다. 외람된 말이지만 대한민국 국민들은 내 주장만 해 가지고는 화합이 안 됩니다. 화합된 바탕위에는 어떠한 일도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상대방이 되어 보는 것입니다. 제가 꼭 후배들이나 다음 세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상대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지금 새마을운동과 새마을지도자를 하면 잘할 것 같습니다. 지금도 할 일이 많습니다. 지금 시대에는 정신적인 새마을운동을 많이 해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