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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그 새마을운동이 여성 지위향상이나 여성의 역할을 바꾸는데 어떠한 역할을 했나요.
답. 우리가 아주 지대한 기여를 했다. 그러한 생각을 하는데 그 당시 여성운동하면 김활란 여사 누구누구 이름 있는 몇몇 여성들 깨어있는 선각자들만의 전유물이었어요. 고 몇몇 분들만 서울에서 새마을운동이 생기고 나서 새마을교육이란 게 있었거든요. 이 교육이 수원에 농협연수원에서 김준원장님부터 사작되가지고, 새마을교육을 부녀회장님들이 다 돌아가면서 교육을 받았어요. 그걸 통해서 아 우리가 문 닫고 내 집만 우리 마을만 그게 아니고 사회운동으로 일해야 한다는 자각을 생기게 됐어요. 그래가지고 상위계층의 전유물이던 여성운동이 서민여성에게도 내려가게 됐죠. 그분들이 전업주부 위치에서 마을을 이끄는 지도자로 일어서다보니까. 자기 역할을 자각하게 되고 그래서 서민들의 여성들의 문을 두드린게 새마을운동이죠. 전 기회있을 때마다 대한민국 여성 운동사에 큰 획을 긋게 됐다. 새마을운동이 요즘도 만나는 지도층여성들이 거의 80%가 새마을출신입니다. 그 사람들이 지도력이 키워져가지고 그냥 단순 여자의 삶에서 인간의 삶으로 바뀌어져 갔고.
문. 그 이면에는 교육이라는 부분이.
답. 교육. 네, 새마을 교육이었죠. 그 교육이 연수원도 있고 우리 또 성남 연수원도 있고 계속해서 자꾸 교육기회를 많이 가졌거든요. 분임토의를 한다든지 해서 우리가 지금 당면한 일들를 뭐를 해야한다. 토론을 통해서 그냥 몇몇 사람들이 동창회다, 계모임이다, 의견계진을 거의할 기회가 없었쟈나요. 여자들이 누구 집 엄마, 무슨 빼기 그래가지고만 살아오다가 자기 이름이 불리우고 부녀회장이라는 직함이 있음으로서, 딸이 여성이 인간으로써 거듭나게 된거죠. 그러면서 주체적인 의식이 있는 여성으로 탈바꿈이 되는거죠. 그분들이 새마을지도자를 해본 사람들은 정신이 달라요. 교육도 교육이지만 리더로서 마을부녀를 이끌면서 스스로 성장하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여성 운동사에 큰 획을 긋게 되었다. 굉장히 자부를 합니다.
문. 그전엔 토론이라는 게 없었죠?
답. 민주주의 기초의 장을 닦는 그 훈련을 시킨거죠. 부녀회장들 회의를 한다든지 사업을 할 때도, 금모으기 운동도, 금모으기 운동, 위에서부터 ‘하시오 하시오’ 하는게 아니고 그걸 사업으로 채택하도록 유도를 하는 거죠. 그럼 올해의 사업은 무엇이 해서토론을 해서 결정을 하거든요. 어떤 땐 치열하게 토론을 합니다. 그런 것도 현장 체험이 새마을운동이었죠. 그러다보니까, 여성지도자를 엄청나게 길러냈어요.
문. 생각나는 혹시 여성지도자?
답. 여성지도자 많죠. 초기에 새마을운동을 일으킬 때 박정희 대통령께서 물론 시작은 했지마는 지도자들을 불을 붙여야 되니까. 그러기 위해서 성공사례발표를 하게 됐요. 교육을 하는데 자기사례를 발표하거든요. 우수사례자들을 전국으로 돌면서 사례도 많이 했는데 지금 제일 기억나는 사람이 전라북도 정문자씨, 또 대구에 누가 있었는데 기억이 잘 안납니다. 대단한 분들입니다.
문. 그땐 순회공연을 다 다니셨나요?
답. 네, 순회교육을 하면서 새마을 교육장에 그런 사람들 초빙해다가, 자기 사례를 발표함으로써 아, 우리 마을도 저렇게 되야 되겠다. 모범이 되는거죠. 그분이 아마 우리나라 사례 첫 호일 겁니다.
문. 마지막으로 우리 새마을운동을 평가를 해주신다면 어떤?
답. 지금 새마을운동이 재조명 돼야 한다고 봅니다. 재조명돼서 이때까지 흘러온 새마을 역사를 우리 스스로 돌아보고 지금은 옛날의 방식이나 전략이나 기법 가지곤 통하지 않을 거 아닙니까. 이 시대에 맞는, 이렇게 정보가 홍수처럼 그리고 완전 글로벌 시대에 새마을이 종주국으로서 부끄럽거든요. 이렇게 침체 되가지고는 종주국 위상이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외국에서 우리한테 배우러 오는데 종주국이 보여줄 것이 없어요. 저도 참 안타깝고 부끄럽게 생각하는 게, 만약에 누군가 와서 중앙회장 출신이 저기에 있다. 경남에 있으면 부녀운동을 했던 산실을 보자고 하면 보여줄게 없어요. 다 없어져 버렸어. 물론 그게 사회발전 과정일 수도 있고 그래서 우리가 전임자가 됐든, 현직이 됐든. 우리 위상을 스스로 구축해 가면서 모델화해야하는데, 그걸 우리가 못해버렸어.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거라고 생각합니다. 시대에 맞는 새마을운동 모델 시민운동단체에서 우리를 평가 절하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폄하를 하는데, 시민운동만이 올바른 운동이고 그때그때 뭐 있었는데, 뭐라고 하죠? 정부에서 만든 조직을 모라고 하는고? 우리가 굉장히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던 말이 있었는데 그게 관변단체라는 용어지요.
관변단체이기 때문에 힘도 없고 키울 필요도 없다. 그런 식으로 아예 싹수를 자를려고 하는데, 세계 개발 도상국가의 모델이 새마을운동이거든요. 그건 그대로 키워나가야 됩니다. 그런데 새마을중앙회 계신 분들이나 조직의 사무국에 계신 분들이 그런 것에 대해 움츠려들기만 하지. 아니다 역발상으로, 도전정신으로, 그분들의 이론에 맞서서, 아니다. 우리는 이런 것이다. 세우질 못했어요. 제가 끝날 때쯤에 제가 참 제 스스로 임기를 못 채우고 나왔기 때문에 제가 그런 것 까지 못했는데 만약 내가 임기를 다 채우고 나왔다면 저는 그런 역할을 좀 하고 나오고 싶었어요.
문. 다 아쉬워 하시더라구요. 바뀌어서 앞으로의 더 맞게 가야 한다는 말들을 많이 하더라구요.
답. 제가 아까 PD님 보고 기대했던 부분이 그건데요. 그 동안에 잘못된 거, 다 있는 데로 다 밝혀서 잘못된 것은 잘못된 데로 다시 평가하고, 다시 재조명해서 새롭게 지금에 맞는 걸로 바뀌어야 하죠, 구미에 가면 제일처음 발상지부터 쭉 해가지고 그런 모델들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거든요. 거기에 가서 아마 새로운 아이디어를 많이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인제 그쪽에 가서 한번 보고 해야 되는 데 제가 그걸 못했습니다. 부녀회 운동은 공장 새마을, 직장 새마을운동 이런 거 와 달리 부녀가 가장 활발했고 또 똑같은 일을 해도 여성이 각광을 받는 거였거든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죠. 그 여성운동을 좀 더 잘될 수 있도록 격려하고 북돋고 이래야 하는데, 자꾸 ‘같이 가자 같이 가자’ 하다보니까 하향 평준화가 되어버렸어요. 조직이 잘못 흘러가고 있다. 지회단위로 하다보니까, 부녀회장들이 내가 창의적으로 일하고 자율적으로 일한 만큼 보람을 얻어야 하는데, 이젠 지회의 단위에 하수인 노릇 밖에 못하다 보니까 자긍심이 많이 떨어졌죠. 활력이 많이 없어졌습니다. 근데 그것을 일으켜 세워야죠.
문. 바람이시구요?
답. 전부다 밑으로 밑으로 전국적으로 커졌죠. 전원이다 참석했죠. 새마을회원뿐 아니라 가족까지. 요즘에 제가 친구들 만나면 농담을 많이 하는데, 지금 금 값이 많이 비싸지 않습니까. 10만원 훨씬 넘죠. 지금 자기 집에는 금 한개도 찾을 수가 없데요. 그때 몽따 다 내놓아서.
문. 구심점이란 게 중요하죠?
답. 그때 제가 중앙회 마치고 나서 지역을 많이 순회했습니다. 하고 있는데 중앙회장 여기 와달라, 저기 와달라, 가보면 농협 앞에 정말 줄을 장사진을 치고 있습니다. 금들고 있는분들이 꼬부랑 할머니부터 코 흘리게 아이들까지 줄줄이 서있는데, 정말 눈물이 없어요. 각 지방마다 면단위까지 단위 농협에도 그랬어요. 그런 거 보고 불씨라는 거 있죠. 불씨 작은 것이 안 꺼지고 살아 있으면 그게 언젠간 바람을 타고 큰 일을 이룰 수 있듯이. 시작은 참 작았지만 많은 분들의 호응을 얻어. 이렇게 크게도 할 수 있구나. 참 정말 생에 가장 큰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문. 새마을운동이 국난을 극복할 수 있는 시발점이 되었다.
답. 근데 일부의 잘 모르신 분들은 새마을조직이 박정희 대통령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의용 단체를 만들었다. 또는 정부의 앞잡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분들이 많이 있는데, 우리는 정부 정부라기보다 사회, 사회가 그때그때마다 필요로 하는 이슈가 있고 일들 있어요. 그 일들을 여기 사는 일반 국민들하고 우리는 다리역할을 한다. 늘 그렇게 생각해왔거든요. 또 실제로 그리 해왔고 뭐 갑자기 폭우가 생겨서 크게 수해를 입었다. 경기도 북부 쪽에 그런 일 자주 있지 않습니까. 그럼 뉴스 보면 그 다음날 아침에 그 자리에 가면 새마을 부녀회들이 딱 나와 있어요. 냄비 들고 막 해가지고 거기서 봉사자들 막 해주소. 자기자신들이 봉사하고 그런 일들을 보면 이 사람들이 물론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내가하는 일이 지역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좋은 일이다. 그 자부심 때문에 굉장히 열열하게 나와서 일을 할 수 있었어요. 그게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었죠. 근데 이제 비난하는 분들은 잘 몰라서 그런게 아닌가.
문. 지금 새마을운동이 한국에 기여했다. 평가다.
답. 이제 전문가들이, 경제학자들이 우리나라 경제를 일으킨 제일 중요한 버팀목은 새마을운동이다. 그런 연구 결과를 많이 내놓았거든요. 그때 우리사회가 IMF 직전에 과소비가 굉장했습니다. 그럴 때 과소비 추방운동, 호화혼수 하지말기 운동, 또 알뜰마당, 그런 아껴쓰고 나눠쓰고 다시 쓰고 바꿔쓰는 운동, 이런 일들을 하면서 이게 곧 너무 작은 것 같지마는 이것이 나라를, 사회를 바르게 하고 건강하게 하는 운동이다.
문. 앞으로의 필요성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 지금 우리사회가 사회의 제일 밑바닥은 가정이거든요. 가정이 건전하게 지금 잘 안 되는 경향이 많이 있거든요. 옛날과 같이 모범가정 그냥 일반 가정하면 부부, 아이, 할머니, 삼 세대 이젠 한 지붕 아래 살아도 가족 같지 않은 가족이 너무 많아요. 우리사회 기초단위 가정이 제대로 설수 있는 운동이 새마을이라는 이름으로하든 일반 다른 사회운동이든 그런 게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가족이 아니고 핵가족하고 지금 해체위기에 있는 가정하곤 전혀 다른 의미죠. 핵가족은 아이들이 자녀가 커서 분가하는 거고 지금 한 지붕 속에 살면서 부부 따로 부인 따로 아이는 아이대로 따로 물론 가족구성원들의 욕구가 너무 많고 다양하고 다 다르기 때문에 그러기도 하지만 옛날에는 단순했죠. 가족의 가족구성원의 욕구가 지금은 너무 다르기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이 참 많죠. 인제 이렇게 가족의 해체위기에 직면해 있는 그런 우리사회가 참 위태로워 보이죠.
문. 이게 새마을이 역할 을 할 수 있나요?
답. 새마을이 역할을 해야 합니다. 새마을이 할 수 있는 일들이라는 게 새마을이라는 게, 그냥 중앙에만 있는 게 아니고 작은 마을 단위에도 다 있거든요. 그럼 그 마을에 가면 그 집에 식구가 몇이고 숟가락이 몇 개고 다 아는 사람들이 새마을조직이거든요. 그 사람들이 한사람 한사람 가정에 가서 독거노인, 혼자 외로운 사람들에게 가서 위로할 수 있도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은 새마을밖에 없어요. 또 지금 그런 쪽으로 많이 하고 있습니다.
문. 어떻게 새마을과 인연을 맺게 됐습니까?
답. 제가 대학을 농과 대학을 나왔어요. 제가 대학 다닐 때 59년도 60년 초인데 그땐 지역 사회 개발운동이 큰 사회운동으로 사회학자들이 많이 조명시키던 그런 운동이었는데, 그걸 보면서 농과대학을 가니까, 자연 4H연구회라든지 또는 농촌 봉사활동 또 그 당시엔 어릴 때니까 문학작품을 통해서 상록수를 통해서 농촌에서 가서 사는 것이 아주 이상적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제가 농촌으로 시집을 갔어요. 제가 제일 처음 가서 한 일이 야간학교 개설했거든요. 우리 집 양반하고 둘이서 저는 국어, 영어 뭐 저 양반은 사회 이런 거 하면서 둘이서 야간학교를 운영을 했어요. 그러다보니까 농촌개발 지역사회 개발 야학학교하고 이게 닿거든요. 평생을 그리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다 얼마 안돼서 새마을운동이 70년대 초에 시작됐거든요. 아 이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자연스럽게 옮겨가게 됐죠. 제가 면단위에 살았는데 면단위 주변에 대학출신 며느리가 거의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저 집의 며느리가 부녀회장을 해야 된다. 그리된 거 아닙니까. 마을부녀회장을 맡았죠. 마을부녀회장이 군단위에 가면 군에서 다 오니까 그다음 군 단위 회장을 하게 되고 80년대에 가선 도 단위 회장을 하게 됐어요. 그러다가 88년에 도회장들이 모여서 중앙회장을 뽑는데 그 당시에 전경환 회장 사건이 터졌어요. 새마을에 대해서 전부 사람들이 배지달기를 부끄러워할 정도로 그런 분위기가 됐어요. 그때 제가 중앙부녀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가 중앙회장으로 선출되었는데 이후 99년 7월말까지 재임을 하면서 나름대로 의미있는 일들을 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