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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참여하시게 된 동기는?
답. 저는 농촌에서 태어났고 자라면서 우리나라 농민들의 배고픔과 못사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같이 생활을 했기 때문에 공부해서 도시로 나가 직장 다닐 것이 아니라 기왕에 공부하는 것 시골에서 우리나라 농촌을 보다 더 잘살 수 있는 마을로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을 진학할 때 농대를 간다고 하니까 부모님이 반대를 하셨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어렵게 농사지어 곡식 팔아 저를 대학 보내고 나중에 직장생활 하라고 공부시켰는데, 제가 농대에 간다고 하니 농사꾼은 부모로 족하다며 반대를 하셨습니다. 그래도 저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릎 쓰고 농과대학에 진학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농학을 했다는 사명감과 흙에서 뭔가 삶의 보람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제가 엉뚱한 면이 있었는데, 대학교 다니면서 제일 궁금했던 것 중에 하나가 미8군부대가 우리나라에서 근무를 하는데 그 사람들이 먹는 음식정도는 우리나라 것을 먹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알아보니까 주식은 미국에서 거의 가져오고 부식종류인 채소 같은 것은 일본 북해도에서 많이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이건 안 되겠다 싶어서 일본 북해도와 같은 기후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지역을 살펴봤더니 대관령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학 2년 선배인 목창균 선배와 같이 대관령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양배추와 고랭지채소를 시작한 사람이 목창균 선배였습니다. 저는 농사를 하면서 늘 생각했던 것이 ‘나’보다는 ‘우리들’이 중요하고 ‘나’보다는 ‘농촌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제가 농대를 나와서 1등 농사꾼이 되는 것 보다는 2등 농사꾼이라도 많이 길러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경기도 이천에 협온농장을 시작하면서 2년제 중학교 과정 농민학원을 시작했습니다. 농민학원을 시작을 해 졸업생도 2회 졸업이나 냈고, 기반을 닦아놓았는데, 아버님이 아프시다면 서 도곡리에 와서 농사를 지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동안 아버님은 늑막염이 걸렸는데도 자식들 공부가르치려고 아프다는 소리도 안하고 치료도 받지 않으셔서 폐결핵까지 걸리셨습니다. 나중에 아버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제 나는 더 이상 살 수가 없다. 내가 바라는 것은 네가 도시에 가서 직장생활을 하면 내가 계란이나 쌀을 가져다주는 것이 제일 소원이었는데, 이제는 직장생활 하기는 틀렸고, 너도 기왕에 농사를 지으니 와서 내가 하던 농사를 계속해라’해서 1969년 가을에 청풍면 도곡리로 들어와서 농사짓는 준비를 했습니다. 그때도 저는 제 농사도 중요하지만 동네사람 농사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동네사회부락도 조직하고 농촌지도소(지금의 농촌기술센터)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1971년 12월에 독농가연수원이 처음 생겼는데 군에서 저한테 독농가연수원에 가서 교육을 받고 오라고 해서 독농가연수 1기로 수료를 하고 왔습니다. 당시 독농가 1기가 새마을중앙연수원 통산 1기로 치는데, 사실 그때는 새마을 얘기는 안 나왔고, 독농가연수원이 농협부설로 되어 있어서 농촌지도자 계통으로 교육을 했습니다. 그 교육을 수료하고 온 후에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었고, 새마을운동이 바로 우리가 앞으로 해야 될 일이고 우리가 배고픔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새마을지도자를 하게 되었습니다. 1983년도에 광주에서 새마을지도자 제1회 대회가 있었는데, 제천군(현 제천시)에는 9개의 읍면이 있습니다. 한 개 읍면에 새마을지도자대표 1명씩 9명과 독농가자격으로 농촌지도자군연합회장인 저를 포함해 모두 10명이 참석을 했습니다. 당시 지도자대회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여러 가지 말씀을 해 주셨는데, 지금도 기억에 남는 말이 ‘먼 훗날 여러분들의 자손이 너희 조상이 누구냐고 물을 때 우리조상은 70년대 새마을을 했던 바로 그분이 조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데 가슴이 벅차고 눈물이 나와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도자대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9명의 지도자가 100만 원씩 상 사업비를 받았습니다. 10명 중에 저 혼자만 100만 원을 못 받고 온 것입니다. 당시 100만 원이면 오늘날 몇 천만 원은 될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로서는 얼마나 아까운지 돌아와서 우리부락민들을 모아놓고 제천군에서 10명이 갔는데 9명은 100만 원을 타왔는데 나만 못타왔다, 그것은 내가 똑똑하지 못해서 못타온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을이 새마을운동을 안했기 때문에 못타온 것이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동네사람들이 그럼 우리도 한번 해 보자고해서 그 자리에서 새마을운동을 잘해 보자는 확답고 얻었고, 제가 새마을지도자를 하겠다고 자원을 해서 새마을지도자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은?
답.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시골에 들어가니까 우리 아버님이나 주위 사람들이 ‘중학교만 나와도 좀 똑똑한 사람은 면장이라도 하는데 저 놈은 대학을 나왔는데 얼마나 공부를 못했으면 취직도 못하고 가서 농사를 짓느냐, 평생 농사를 지어도 이 모양 이 꼴인데 왜 농사를 지으려고 하냐, 그러니까 저 놈은 공부도 하나도 안하고 만날 놀았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마을에서 농사를 이렇게 이렇게 하자고 이야기를 해도 듣는 사람이 없고 전부 비웃기만 했습니다. 저는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고 사람들을 붙들고 얘기를 하면 젊은 사람이나 어른들이나 전부 저를 피했습니다. 그래도 제가 우리나라 대학 중에 농대를 나와서 농사를 짓는데 왜 사람들이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지 점점 약이 오르기 시작해서 내가 농사로서 본보기를 보여 줘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70년도에 제일 처음 시작했던 것이 고추육모였습니다. 당시에는 온상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었는데, 제가 농사를 시작하면서 참나무와 소나무의 가지를 이어 조그마하게 비닐하우스를 지어 고추육모를 시작하니까 동네사람들이 다 욕을 했습니다. 마을사람들은 50년 내지 60년 농사를 짓는 동안 비닐하우스를 안 해도 여태껏 먹고 살았는데, 제가 대학 나왔다고 잘난 척 하는 줄 아셨는지 많이 욕했습니다. 당시 마을사람들은 고추를 그냥 직파(直播)를 했고, 수확할 때는 한 나무에 고추가 보통 3~4개가 나와 5평에 마른고추 한 근이 될까 말까인데, 제가 비닐하우스에 심은 고추나무에서는 한 나무에 100개 이상으로 300평에서 680Kg를 땄고, 마을사람들의 10배도 넘게 땄습니다. 당시 자장면 한 그릇에 100원 할 때인데, 고추 600평에서 608,000원을 수확했습니다. 그러니까 동네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제가 고추밭에 있을 때는 한 명도 안 오더니 저만 없으면 동네사람들이 밭에 와서 고추를 보곤 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제가 한명씩 붙들고 이론상으로 설명을 하니까 한 사람 한 사람씩 제 사람이 되었습니다. 고추농사해서 돈이 되는 것을 보고는 1971년도에 67호 마을에 68동이 비닐하우스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농사의 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 마을에 진흙땅이 많아 콩을 하면 잘 될 거라고 생각하고 콩 농사를 시작을 했습니다. 당시 충청북도에는 증산왕 제도가 있어서 각 작물별로 다수확한 사람을 증산왕이라고 했는데, 제가 71년도에 대두 증산왕을 했습니다. 제가 고추뿐만 아니라 콩도 다수확을 하니까 저를 비웃던 사람들이 완전히 달라지고 제가 이야기하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호응을 하고 한번 해 보자는 식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정부에서 71년도에 시멘트 120포대와 철근 1톤을 마을에 지원을 해 주었는데, 그 철근과 시멘트를 제대로 쓴 것이 아니라 자기 부뚜막과 벽에 바르면서 흐지부지 다 써버렸습니다. 그 이전에도 정부에서 무엇을 시키면 시원찮았는데, 지금도 농민들의 입에서 어떤 얘기가 나오느냐면 정부에서 시키는 일을 반대로 하면 농사꾼은 돈을 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정부에서 시키는 일을 거의 안하는 것이 관례가 아니라 동네가 그렇게 해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새마을교육을 받고 난 후에 새마을운동을 한번 해 보자고 마을사람들에게 얘기해서 새마을사업이 시작된 것입니다.

문. 주로 추진하셨던 새마을운동 사업은?
답. 우선 유능한 새마을지도자는 자기가 구상한 것을 동네 전체의견으로 통과시키는 것이 최고 지도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민주주의의 꽃은 다수결의 원칙입니다. 비전문가 천 명의 의견보다도 전문가 한 명의 의견이 우월할 수가 있습니다. 가난에 찌들고 자기의 삶을 포기 했던 사람들의 백 명이 아니라 천 명의 의견이라도 새롭게 개혁하려는 한 명의 의견을 못 당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을사람들을 100% 제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50대 내지 60대였던 이장 및 반장들을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으로 다 바꾸고 제가 새마을지도자를 자원 했습니다. 그렇게 새마을추진위원회를 만들어 놓고 매일 우리 집이나 동네 사랑방에 불러서 고스톱을 치고 술을 마셨습니다. 술 먹고 노름하기 위해서 새마을추진위원회를 구성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제 사람으로 만들고, 새마을일꾼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매일 불러 모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제가 고추를 다수확생산하고 콩으로 증산왕이 되니까 그 사람들이 전부 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제가 서울에서 대학교졸업하고 집에 내려갈 적에 아무 것도 가져간 게 없는데 딱 한 가지 제가 보던 책 1,500권을 가지고 갔습니다. 전문적인 책은 따로 놔두고 일반 책을 사랑방에 전부 갖다 놓고 마을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마을문고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마을이 얼마나 꿈이 없고 삶을 포기했던 사람들이었냐면 사람들이 책을 본다고 빌려가서는 책을 찢어서 담배를 말아 피웠습니다. 담배종이도 없던 시절이어서 아이들 공책 찢어서 담배 피우던 사람들이다 보니까 책을 찢어서 담배를 말아 피웠던 것입니다. 모든 농촌이 그런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도 잘살아보자고 시간만 되면 잘사는 마을들의 성공사례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우리도 잘살 수 있으니까 한번 해 보자고 마을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일 처음 시작한 사업이 농로확장이었습니다. 당시 저희 집이 시골에서는 부자였습니다. 땅이 15,000평정도 되었는데, 길과 연관된 곳은 우리 논과 밭부터 내놓아서 길을 만들었습니다. 길을 만들다가 땅이 아까워서 내놓지 못하는 사람들의 땅은 건너뛰고 그 다음에 길을 만들어 놨더니 너무 좋았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동네사람들이 땅을 내놓지 않은 사람한테 ‘네 밭 때문에 길을 다 만들지 못하지 않느냐’라고 말하게 되고, 그때부터는 땅을 내놓기 시작해서 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동네 어지간한 곳에는 경운기가 다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닦아놓았습니다. 그리고 초등학생들이 학교를 갈 때 비가 오면 개울이 넘쳐서 학교를 가지 못해서 교량도 만들었습니다. 또 우리 마을이 67호인데 67호 중 안동 권 씨 문중 묘답을 관리하는 사람 집 안채 하나만 기와집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안 되겠다는 생각에 지붕개량을 하자고 동네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를 시켰습니다. 추진하는 방법이 어떠냐에 따라서 성공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가 있는데, 하자고 해 놓고 그냥 놔두었다면 스스로 하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 같아서 추진위원들과 밤을 새워 이야기한 것 중에 하나가 각자 하지 말고 너나 할 것 없이 동네 전체를 다 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농협에 가서 슬레이트 15,000장 정도를 외상으로 주라고 하니까 담보 없이는 안 된다고 해서 이장과 제 논과 밭을 담보로 잡고 슬레이트 15,000장 가져와서 마을에 쌓아놨습니다. 당시 시골에서 지붕개량을 하면 서까래에 각목을 걸고 위에 슬레이트만 입히면 되는 것이었는데, 각목이 없어서 동네에 있는 미루나무를 베서 했는데 나무가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제 아버님이 심은 낙엽송이 굉장히 많아서 그것을 베서 하려고 면에 가서 산에 낙엽송이 있는데 그것을 베서 지붕개량을 하겠으니 묵인해 주라고 했는데 면장이 해 주고는 싶은데 법이 있으니까 못해 주고 경찰서장한테 가라고 해서 경찰서장한테 가니까 또 면장한테 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장날에 셋이 밥을 먹으면서 ‘산에 있는 나무를 다른 곳에 쓰는 것도 아니고 훔쳐오는 것도 아니고 내 산에 있는 내 나무를 베어다 동내 지붕개량 하겠다고 하는데 뭘 그러냐, 내가 오늘부터 베겠다.’고 말하고 그날 동네사람들을 동원해서 산에 가서 나무를 다 베어 와서 밑에 집부터 시작을 하기 위해서 지붕을 다 뜯었습니다. 지붕을 뜯고 보니까 지붕이 그냥 허물어지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흙벽돌과 시멘트로 블록을 찍어서 지붕개량을 완성하고 보니까 동네가 새로운 방향으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제가 동네사업을 할 때 사업을 하기 전 사진과 사업을 하는 과정 사진, 끝난 후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래서 도곡리에서 한 모든 새마을운동 사진이 제천을 대표하는 사진으로 다 나갔습니다. 청풍면에서 제일 말썽 많던 마을이 달라지니까 공무원들이 청풍면 도곡리 최고라고 지원해주고 홍보도 하기 시작했습니다. 동네사람들도 옛날 일제강점기시대에는 면장네 일꾼하고 밥을 겸상만 해도 오늘 면장네 일꾼하고 겸상했다고 자랑을 했었는데, 당시 군수가 고생한다고 마을에 올적에 음료수도 사오고 악수도 해 주니까 동네사람들이 점점 더 힘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74년도에 동네 전체가 지붕개량이 다 되고 마을안길과 농로가 다 되어서 우수마을로 선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67호 조그만 마을에 술집이 6집이 있었습니다. 그때 계산을 해 보니까 시골로서는 술을 통에 담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조각조각 댄 둥그런 통이 있는데, 그런 술통이 10되 들어가는 통이 있고, 20되 들어가는 통이 있었는데, 10되 들어가는 것은 소통이라고 하고, 20되 들어가는 것은 대통이라고 했는데, 한 집에 대통 두통씩을 팝니다. 그러면 한 집에 40되고, 67호 되는 마을에 약 500리터 정도가 하루에 팔리니까 술에 찌들어서 엉망진창이 된 것입니다. 이 마을이 잘되려면 새마을사업도 중요하고 다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신이 바로 박혀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꿈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꿈을 키워주고 비전을 줄 수 있는 일이 있어야 될 것 같아서 술집을 없애야 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동네회의에서 술집얘기를 했더니 술에 찌든 사람들이 말도 못하게 했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도 객지생활을 많이 했기 때문에 회의진행법에 대해서 좀 아는데 일사부재리원칙으로 한번 부결된 것은 그 다음 날 또 못하기 때문에 좋다 그러면 이걸로 끝내자고 회의를 그만두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제가 혼자 생각한 것은 우선 동네 남자들만 회의에 참석할 것이 아니라 여자들도 참석을 해서 같이 회의를 했으면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자들은 거의 다 술에 하도 지쳐서 다 찬성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부녀 회장한테 얘기를 했습니다. ‘다음날 저녁에 회의를 한다고 남자회원들을 소집할 테니 부녀자들은 남자들이 회의장에 가기 전에 절대 회의장에 오지 말고 집에 가만히 있다가 남자들이 집을 나가면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다 같이 들어오고 도장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여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그곳에서 제가 마을 주민들에게 ‘마을이 술을 많이 먹으면 아무리 새마을사업을 많이 해도 우리 마을은 잘살 수가 없다. 제일 중요한 것이 정신개조다. 술집을 없애야 되는데 술 피해가 얼마나 큰지 따져보자, 우리 마을에서 하루 없어지는 술이 240되가 없어진다. 한 되에 얼마이고, 이것을 계산해 보니까 1년에 150만 원이다’라고 하면서 말로만 술집을 없애자고 할 때 보다 이론적으로 설명을 하니까 동네사람들도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술집 없애는 것을 다수결로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우리나라 특히 강원도나 충청도 사람들은 손을 들라고 하면 찬성을 하면서도 내가 안 들어도 다른 사람이 들겠지라는 생각 때문에 거의 손을 안 듭니다. 그래서 제가 술집 없애는 데 찬성하는 사람 손드시라고 하니까 처음에 몇 사람들이 손을 들었는데 여자들 눈이 손든 사람들 쪽으로 시선이 몰리니까 손을 슬그머니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의견은 세 번 물어봐야 하니까 술집을 없애는데 찬성하는 사람 손들어라, 손 안 들면 만장일치로 통과시키겠다고 했는데, 손을 아무도 안 들어서 만장일치로 통과시키겠다고 선언을 하고 추진위원들한테 주민들의 도장을 받으라고 해서 도장 다 받고 도장 없으면 지장을 받아서 술집을 없애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동네사람들 중 저나 추진위원들 보는 앞에서는 술집에 들어가지 않고, 지키는 사람이 없으면 술집에 들어가는 사람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추진위원단과 상의를 해서 제가 술값을 다 대고 술집의 술을 전부 샀습니다. 그리고 동네사람들이 보는 데서 술집에서 사온 술을 퇴비장에 전부 부어버렸습니다. 그러기를 9번을 했습니다. 9번을 했더니 동네사람들도 미안한지 술집을 없애야겠다고 해서 한 집 한 집 없애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술집이 다 없어졌습니다. 술집이 없어지고 나니까 부녀자들이 너무 좋아해서 새마을사업은 부녀자들이 나와서 하다시피 했습니다. 술집 없애고 일거양득(一擧兩得)의 효과가 났습니다. 그리고 새마을운동 중에 하나인 미신타파운동이 있었습니다. 점을 보고 굿하는 것이었는데, 정부에서도 진절머리가 나서 미신 타파하라고 대통령 특별지시가 있었습니다. 저도 미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미신을 없애는 것을 거의 반 강제적으로 동네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를 시켰습니다. 동네에서 1년에 한번 음력 정월 대보름날 고사 치르는 것을 이제는 안 하기로 결정을 했는데, 만일 미신을 없앤 후에 새마을사업이나 동네 사람들이 농사를 지면서 농사가 제대로 안되었으면 모든 화살이 저한테 오는 것만이 아니라 새마을운동 전체에 영향이 가서 새마을사업 전체가 안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미신타파를 없애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었지만, 정부의 정책이기도 하고 저도 없애기로 생각을 해서 없애버렸습니다. 옛말에 ‘스스로 돕는 자는 하늘이 돕는다’고 마을 지붕개량 할 때 지붕에 있던 썩은 볏짚은 다 밭에 내놓으라고 해서 그것을 갈아 밭에 뿌리고 그 위에 고추를 심었는데, 그 해에 다행히 비가 많이 와서 다른 고추 밭은 다 죽어도 우리가 심은 밭은 썩은 볏짚을 뿌려 놓아 배수가 잘 되어 고추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동네에서 ‘미신한테 제사 안 지내니까 고추가 잘되지 않느냐’라고 큰 소리도 치면서 새마을사업을 추진하니까 새마을사업도 잘되고 최고의 영광을 누리는 마을이 되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답. 힘들고 어려웠다기보다는 그것을 할 수 있기까지의 분위기조성, 즉, 동네사람들이 포기했던 삶과 꿈을 되살리는데 힘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해 놓으니까 오히려 내가 힘들고 다른 일 때문에 못가면 지도자가 왜 지각을 하느냐 빨리 해야지 않느냐 하면서 그 사람들이 먼저 나와서 일을 했습니다. 사업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꿈을 어떻게 키워주고 그 사람들을 어떻게 이끌어 가느냐가 중요하고, 마을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를 육성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시행착오나 아쉬웠던 점은?
답. 74년도에 최우수 마을이 되어서 상금이 나오고 그것을 가지고 재투자해서 사업을 하고, 성공이 외부에 알려지다 보니까 여기저기서 저를 초청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또 어떤 사업을 했느냐하면 우리나라가 배고픔과 보릿고개를 타파할 수 있었던 것은 새마을운동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또 한 가지는 통일벼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논 한마지기에서 쌀 한가마니 먹던 것을 통일벼가 나와서 세 가마, 네 가마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통일벼 자체에도 여러 가지 단점이 참 많았습니다. 농사를 이론상으로 적립하던 기술이 아니라 경험이나 자기 생각대로만 짓기 때문에 통일벼를 심으면 40가지 내지 50가지가 올라오는데, 한 평에 대개 75주에서 95주를 심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에 100톨씩 달리는 데 10가지만 되도 다수확입니다. 그런데 50가지에서 제대로 달리는 것은 몇 가닥 안 되고 나머지는 영양분만 빨아먹는 도둑가지가 됩니다. 수확을 올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도둑가지를 줄여야 되는데, 도둑가지를 줄이는 게 기술이었습니다. 그것을 제가 개발을 했습니다. 제천 청풍면만 해도 남쪽보다는 온도가 차기 때문에 담배 이모작을 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런데 저는 담배를 한번 해 내고 거기에 통일벼를 심어보자고 생각하고 논에 통일벼를 심었습니다. 대개 못자리를 물을 대고 논에 하는데 저는 밭에 했습니다. 밭에서 벼 한 톨에 세 가지를 벌리고 한 폭에 열 개를 심었고, 한 평에 80주를 심는 게 아니라 200주를 심었습니다. 통일벼의 제일 문제점이 너무 바람이 안통해서 문고병이 들어서 통일벼 수확을 많이 못합니다. 그런데 저는 200주를 심으니까 동네사람들이 조그만 못자리를 큰못자리로 만든다고 다 욕을 했습니다. 그런데 심어놓으니까 나는 한 폭에 열대이고 그냥 심은 사람은 50대입니다. 그러면 일반사람들은 4000대이고 나는 200주에 10대이니까 2000대입니다. 그래서 다수확을 하고 또 거기에 담배를 심었는데 굉장히 잘됐습니다. 통일벼 다수확에 성공하니까 생산조합교육원, 새마을연수원, 공무원연수원 등 에서 강의를 해달라고 해서 일주일에 4일은 강의를 하러 나가다시피 했습니다. 당시 우리 땅만 해도 15,000평에 사과, 복숭아, 밤나무, 담배 등 농사할 것이 많은데 농사는 아내와 어머니, 아버님이 지고 저는 만날 강의하러 돌아다녔습니다. 쉽게 얘기해서 제가 농사지을 때는 1년 소득이 당시에 천만 원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는데, 제가 강의하러 돌아다니니까 수익이 반도 안됐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동네사람들도 저놈 새마을 운동하더니 사람 버려서 이제는 집 농사도 안 짓고 돌아다닌다고 해서 연수원 강의 나가는 것을 일주일에 하루씩만 강의하고 새마을사업을 해서 우리 마을이 굉장히 잘 사는 마을, 또 저도 소득에 지장이 없는 그런 쪽으로 농사를 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보람 있었던 일은?
답. 청풍면이 27개 부락입니다. 27개 부락 중에 전기가 들어왔던 부락이 면소재지 2개 부락과 황석리 마을에 양수를 해서 밭을 논으로 만든 마을까지 딱 3개 부락만 전기가 들어왔고 24개 마을은 전기가 안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만날 욕먹던 우리 도곡리 마을이 74년도에 우수마을로 선정이 되면서 정부에서 청풍면 도곡리에 전기를 넣어줬습니다. 우리 마을에 전기를 끌어오는 큰 길에서 대두리마을을 통과하니까 그 마을도 넣어주자고 해서 대두리 마을과 우리 마을에 전기 불을 넣어줬습니다. 그때만 해도 전부 호롱불을 켜고 살았는데, 12월에 전기가 점화가 되는 것을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때 이게 새마을이구나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지도자로서 자부심이 있다면?
답. 박정희 대통령께서 말씀하셨던 ‘후세들에게 너희 조상이 누구냐고 물으면 새마을운동을 했던 지도자가 조상이다’라는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지금 제가 71세인데 71년을 살면서 후회는 거의 안했습니다. 나보다는 우리들이라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살아왔고, 서울에 있다가 여기에 오면서 교회를 나갔는데, 이 마을의 영농이 굉장히 뒤떨어져 있어서 교회를 주체로 영농교육을 시작해 금년 12회째 영농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서울에 있으면서 농업 전문가들을 많이 알고 지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무료로 모셔서 강의를 하도록 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도 지도자생활을 하고는 있지만, 항상 제 자녀들에게 하는 말이‘너희들이 살면서 너를 위해서 사는 것 보다 우리들을 위해서 살아라’하고 강조를 합니다. 제 막내아들이 사회복지사로 지금 장애인복지관에서 복지사업을 하고 있고, 딸은 태권도를 배워서 네팔에 가서 국가대표코치를 했습니다. 히딩크가 우리나라 축구발전에 기여해서 아주 유명한 사람이 되었는데, 제 큰딸이 네팔에서 히딩크 정도는 아니지만 선생님이라고 불립니다. 네팔에서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최고이고, 2,000년도 초 초등학교 사회교과서에 나라를 빛낸 사람에 나올 정도로 네팔에서 일을 열심히 합니다. 그런 것을 보면 ‘내가 지도자로서 역할을 참 잘 했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자부심을 느낍니다.

문. 새마을운동 전과 후에 바뀐 점이 있다면?
답. 면이나 군 행정기관에 가면 공무원들의 얼굴빛이 달라집니다. 예전에는 청풍면 도곡리 마을만 없으면 공무원들이 할 일이 없다고 할 정도였는데, 새마을사업도 잘 하고 27개 부락 중에 4번째로 전기가 들어오는 마을이 되니까 면이나 군에서도 새마을지원 사업이 오면 도곡리 먼저 지원해 줄 정도로 변했습니다. 그 전에는 어디 가서 도곡리에 산다는 말을 못했는데, 이제는 도곡리 산다는 말을 동네 주민들이 먼저 이야기할 정도로 마을의 위상이 달라졌습니다.

문. 새마을운동 본부에서 하셨던 활동은?
답. 본부에서 스카우트(Scout) 제의가 왔는데 처음에는 마을에서 농사도 지어야 하고 여기서 살아야 한다고 거절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충주댐이 되면서 마을전체가 수몰을 당하는 바람에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서울에 올라가보니까 농촌지도자출신이나 농업에 전문가 적인 사람이 거의 없어서 처음 시작한 것이 영농기술교육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농업을 망친 것 중에 하나가 영농교육입니다. 각 처에서 영농교육을 하면서 점심사주고 여비도 줘 가면서 교육을 시켰는데, 그 교육이 실질적인 교육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형식적인 교육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서울 새마을중앙회에 올라가서 새롭게 뭔가를 해 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새마을중앙회에서 처음으로 돈을 받고 영농기술교육을 했습니다. 그런데 돈을 받고 교육을 한다고 하니 농민들이 돈을 내고 교육받을 사람이 누가 있느냐며 회장님이나 총장님을 비롯해 모두 반대를 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될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처음에 5,000원을 받다가 나중에 만 원씩을 받아 교육을 했고, 농민들이 낸 돈으로는 책을 사고 영농에 필요한 도구를 사서 다시 농민들에게 환원을 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새마을중앙회에서 한 교육이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교육이 되어서 농협에서도 우리 교육을 본을 따 우리자료를 가지고 가서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새마을사업을 하면서 마을의 영농일지와 계획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농사꾼이 영농일지를 안 쓰면 서리가 언제오고, 비가 언제, 어떻게 오는지 모르기 때문에 농사를 지으면 농사가 엉망이고 발전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1984년도에 영농일지를 만들었습니다. 대개 업무일지나 수첩은 1년에 하나씩 쓰고 나중에는 버리는데 영농일지는 5년을 쓰도록 했습니다. 예를 들어 2월 1일에 일지를 쓰는 거면 한 페이지에 5년 동안 2월 1일자의 일지를 쓸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러면 작년에 2월 1일은 무엇을 했는지, 재작년 2월 1일은 무엇을 했는지, 날씨가 어땠는지 알 수 있으니까 농업에 획기적인 책이 되었고, 그 책을 전국의 마을 지도자들에게 한 권씩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5년씩 쓰는 것은 책이 너무 무거우니까 나중에는 3년씩 쓰는 것으로 다시 만들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서 했는데 농업에 연관된 기관이나 농업전문가들이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각 영농기관에서는 3년씩 영농일지를 기록할 수 있는 책을 만들어서 무료로 농민들에게 배포해 주었습니다. 이런 아이디어가 새마을에서 나온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도시민을 위한 공간원예라는 교육을 했습니다. 공간원예라는 말도 새마을에서 만든 단어입니다. 주거공간을 이용해서 식물을 기르고 관상하고 수확의 재미까지 보자는 교육이 공간원예인데 여기에 보면 무싹 재배라고 해서 지금 여러분들이 새싹을 구매해서 먹고 있는데 그것이 우리는 80년대 중반에 새마을에서 그 사업을 시작을 했습니다. 무 새싹이라고 재배를 했는데 그것이 거의 40년 만에 제품화가 되어서 나온 것입니다. 충주에 있는 장안농장에서 작년에 15억 원어치를 팔았습니다. 새마을에서 좋은 사업과 특별한 사업을 하면서도 그분들이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편견에 의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는데, 새마을에서 이와 같은 사업을 쭉 하면서 하나하나 국민과 서로 동화되는 것이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문. 후배들이나 국민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은?
답. 당시의 지도자는 마을을 위해서 열심히 일을 했는데 지금 사람들은 제가 보기에 제사를 지내는 게 아니라 잿밥을 위해서 생활하는 것 같습니다. 마을단위도 보면 새마을지도자는 이장의 뒷정리해 주거나 이장을 하기 위한 전 단계, 이런 식으로 되는 것 같습니다. 70년대에 새마을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그 마을에서 절실히 필요한 것을 정부에서 지원을 해 주었고, 그 지원을 받아서 일을 추진할 수 있는 지도자를 양성했기 때문에 새마을이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새마을지도자가 무엇을 하는지를 모르고 중앙에서만 새마을운동을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중앙협의회를 위한 새마을이 아니라 이제는 현실에 맞는 새마을을 해야 합니다. 지금 시골에도 할일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농업이 1차 산업이 아니라 1.5차, 2차 산업까지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농민이 못사는 이유 중에 하나는 자기 물건을 자기가 값을 못정하고 주는 대로 받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양배추를 한 박스를 보내면 한 박스에 1,500원까지 줄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박스 하나 가격이 구백 몇 십 원에 운임까지 더하면 적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팔 거냐, 안 팔 거냐하는 결정권도 없습니다. 그것이 농민입니다. 그러니까 최소한도 1.5차, 2차 까지는 끌고 가야 하는데, 그런 것을 새마을에서 맡아서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서울에 있을 때는 새마을문고에 대한 관심을 별로 갖지 않았는데, 이제는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농사짓지 말라고 하는 말까지 하고 다닙니다. 농사지으면서 기술 좋다고 하면 한 달에 책 몇 권이나 읽느냐고 제가 물어봐서 책을 안 읽는다고 하면 농사짓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도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업하다 실패하고 힘들면 농사지으러 간다는 말을 종종 하는데, 농사는 모르고 무식한 사람들이 짓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첨단과학을 하는 사람들이 농사를 져야합니다. 이제 새마을도 그 마을에 맞는 새로운 새마을을 개발해서 새롭게 지도자가 정립되어서 나라와 이웃을 위해서 기여하고, 기술을 전달해 줄 수 있는 전달자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