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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답. 새마을운동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제가 대학을 다닐 때에 농촌에서 살았는데 ‘농촌 운동은 4H 운동이다.’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4H의 의미는 마음, 머리, 팔, 다리입니다. 그런 뜻을 갖고 학교에 다니면서 사회에 공헌을 해야겠다, 무슨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저희 마을이 작았는데 젊은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어르신들도 나와서 일을 하시게 되고 그런 것이 동기가 되었습니다.
문. 당시 새마을운동에 대한 마을과 지역, 정부의 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답. 농촌에서는 저희가 새마을이라는 것을 1970년도에 시작을 했지만 도시는 1972년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한 2년 늦었죠. 저는 그때 당시에도 공직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리포트, 책들, 문헌을 많이 봤습니다. 마을 단위에서도 지금 회관 짓듯이 조그만 건물이라도 하나 우리끼리 모이는, 청년들이 모이는 장소를 만들자고 했는데, 저희가 집이 3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집 하나를 오픈시켰죠. 집 하나의 방이 좀 컸습니다. 그 방을 마을 주민들이 모이는 장소로서 회관으로 만들었습니다.
문. 주로 무슨 사업을 추진했습니까?
답. 처음에는 뒷골목을 중심으로 했습니다. 뒷골목 정비. 큰길은 정부에서 닦아주지만, 닦아줘도 흙바닥입니다. 비 오면 금방 빠지고 그런 정도였습니다. 자갈을 깔기 시작하고요. 그때 큰길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국가에서 인정받는 사람들이나 근로자들이 나와서 일을 했는데 상당히 조그만 보수를 받아도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하루 일과를 마쳤습니다. 뒷골목하는 것은 영등포 지역 전체에 대한 시멘트가 국가에서 나오면 제 이름으로 나왔습니다. 지금 강남 일대가 강동구 하나 빼고는 다 영등포구입니다. 그것을 가져다가 예치, 쌓아놓을 데가 없잖습니까? 그때 저희 집에 광이 하나 있었습니다. 광에 시멘트를 쌓아놓고 그 분량을 갖고 시작을 하는데 애로 사항이 뭐냐면 도시 사람들은 우선 대문을 안 열어줍니다.
그게 제일 힘들었고 두 번째는 만남이 되어도 주부가 남자하고 얘기할 기회가 없잖습니까? 주부는 ‘난 몰라요.’하고 피합니다. 그때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내가 이걸 왜 시작했나, 내 돈 들여가며 왜 이러나. 그래서 집사람이 시작부터 고생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독지가를 만나려니까 제 머릿속에서 교회나 잘 사는 사람들부터 설득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나와서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방법이든, 막걸리가 됐든 점심이 됐든 칼국수가 됐든 국수가 됐든 뭐 이런 거라도, 점심이라도 같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찾았습니다. 우리 집 근방에는 국방장관도 살고 계셨고 박순자 할머니도 살고 계셨고 국회의원이 한 서너 명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궁영씨라고 있는데, ‘비단이 장사 왕서방’이라는 것이 우리나라에 처음 강화로 들어옵니다. 그 아버님이 그런 상권을 가진, 고지식하신 사람입니다. 그분이 많은 일을 도와줬습니다. 나와서 격려도 해주고 같이 막걸리도 먹곤 했습니다.
몇 가지 4대 사업, 주로 한 것은 자연 노화로 둑이 엉망이니까 우리가 자연을 훼손시키는 것을 어떻게 해 보자고 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니 뭐니 해도 내 집 앞 쓸기부터 하자는 것이었고 세 번째는 질서 중에서도 가정 질서, 효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효에 대해서 상호 간, 가족이 소통이 안 되면 안 됩니다. 와이프와 소통이 안 되면 안 되고 자식 간에도 소통이 안 되면 안 되니 ‘평.잘.세’라고 평소에 잘하자며 제가 집집마다 포스터 붙였고 회원모집도 했습니다. 차마 이런 소리를 들으면 거부감이 생기니까 ‘평.잘.세’, 평소에 잘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동참을 했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이지 받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봉사는 봉사하는 것이지 봉사해서 뭘 기대하거나 다른 생각을 가지면 안 되잖습니까? 그때는 그런 생각을 가졌었습니다. 그런 뜻있는 사람끼리 모이게 된 것입니다.
문. 사업 추진상 제일 어려웠던 점은 무엇입니까?
답. 물론 어렵다는 내용으로 보면 지금 일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많았습니다. 우선 사람과 사람이 대화한다는 것이 서로 마음의 문을 열어야 되는 것이잖습니까?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아무리 해도 대화가 안 되잖습니까? 소통이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이 하시는 생각이 옛날의 그런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대게 새마을에서 활동하는 분들에게 미쳤다고, 도둑놈들이라고 그랬습니다. 저는 뭐가 제일 괴로우냐면 집식구였고, 아이들이 더 괴로워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일을 하긴 하는데 얘기를 들어보면 바깥에 나가면 욕먹는단 말이죠. 그래서 할 수 없이 학교에 갔는데 학교를 들어가면 또 괜히 저한테 감투를 씌웠습니다. 감투 씌우면 하다못해 뭐라도 해야 하니까요. 제일 먼저 화곡 국민학교 육성회장을 하면서 참모회장하고 같이 의논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돈은 내가 조금이라도 도와줄 테니 부녀회원들은 검소한 복장. 그리고 있는 사람들이 들어오면 처음 생겨서 자가용이 들어오고 그랬습니다.
문. 어떤 시행착오들이 있었나요?
답. 지금은 제가 나이가 있어서 참여를 안 하니 지금 흘러가는 것은 잘 모릅니다. 단지 저희가 여기 구청에서 빌려 쓰는 것 아닙니까? 저는 내 눈 감기 전에 건립 기금을 만들자고 했는데 이중근씨라는 분이 여기 아파트를 지었습니다. 그 양반도 지도자를 했었습니다. 지금 부영건설이라고 그룹입니다. 이 사람이 베트남에다 엄청나게 투자를 했습니다. 그 분이 우신아파트, 양사아파트 지을 당시에 새마을노인정으로 등록을 해버렸습니다. 그분이 새마을본부에다 기증한 돈이 아마 한 3억 정도일 것입니다. 지도자들이 바뀌니까 여기서는 그 유치되어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바뀌면 본부에서 교화 운동이나 교육이라고 하면 이상하지만 순회 활동을 할 때에 먼저 그만둔 사람들부터 1년에 한 번씩 모셔서 밥값이라 해봐야 돈 한 5,000원 정도 내외인데 지금 사람들은 나가면 자기들끼리 먹습니다. 여기는 안 그런데, 자기들끼리 먹고 먼저 있던, 회장을 했던 사람들이 많을 것 아닙니까? 안 부릅니다. 돈 안낸다고 하고요. 그런 것이 지금 많이, 엄청나게 제가 속상합니다.
문. 어떤 점이 아쉬웠습니까?
답. 우리 제의실을 찾아다닌다든가, 노인회를 찾아다닌다든가 청소년 사회실을 찾아다닌다든가 우리 말고도 많잖습니까? 로타리도 있고 라이온스도 있고요. 그 당시에는 많은 단체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분들하고 같이 협력을 했습니다. 방공연맹이 있든, 자유총연맹이 있든 방위협의회에 관련돼서 부위원장을 일부러 제가 하기도 했습니다. 돈도 좀 썼고요. 그러면 공장 관련 사람들 많이 알아야 되잖습니까? 그러면 저는 가서 얻어먹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얘기를 하고 오히려 거기서 고생하는 사람들 밥값을 제가 주고 나왔습니다. 그러면 그다음에 그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죠. 제과점에서는 부녀회를 같이 가면 제과점도 가져오고 제일제당 가면 뭐도 가져왔습니다. 여기 이쪽에 공장이 많았습니다. 그분들이 상당히 협력을 많이 해줬습니다. 그것이 지도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문. 일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무엇입니까?
답. 저도 나이가 77인데 나이는 늙었지만 지나가다 보면 옛날의 70대 넘은 사람들은 다 저한테 인사를 합니다. 그 인사 받는 것이 쉽지 않은 것입니다. 욕하는 사람은 없고요. 뒤에서 욕하는 사람은 모르죠. 젊은 사람은 욕하려나, 모릅니다. 나이 먹은 사람은 저한테 욕하는 사람은 없어요.
단지 제가 집사람한테 미안합니다. 근데 새마을을 오래 하다 보니 제일 동업자는 아내입니다. 제가 옛날에는 아내, 제 집사람을 무시했습니다. 그게 한이 맺혔었는데 요새 잘하려고 무척 애를 씁니다. 우선 그 어려운 지경에서도 항상 무엇을 하든 간에 서울특별시에서 1등을 했다는 것에 긍지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가능한 것은 대한민국에 하나 밖에 없던 것을 우리 지도자가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취락 구조라 해서 가난한 사람들 사는 곳을 우리 지도자들이 가서 전부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국기 보급이라든가 이런 것 등등. 저도 마을 안길에 취락 사업하는 동네에 가서 저희 손으로 저희가 밥 끓여 먹으면서, 부녀회원들이 끓이고 저희는 일하고 밥 먹고 했습니다. 그런 것이 전부 추억에 남습니다.
문. 지도자로서 본인의 장점과 아쉬운 점은 무엇입니까?
답. 성질이 급하긴 했지만, 대신에 책임감을 갖고 일을 했습니다. 뭐 하겠다, 지도자들 모아두고 이번 달은 무엇을 하자고 하면 오케이하며 승인을 합니다. 그러면 각 동을 밤새도록, 자지 않더라도 뺑뺑 도는 것입니다. 그런 특기성이 있었고 귀찮게 굴었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제가 회장을 하고 있을 당시에만 해도 제 말들을 잘 들어줬습니다. 그게 고맙습니다. 장점을 얘기한다면 그런 것이고 단점은 가족한테 잘 못했습니다. 차가 여기 있고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지 않습니까? 자가용이 저희 집에 있었습니다. 걸으라고 차를 안 태워줬습니다. 그러면 화곡 국민학교 있는 데서부터 덕원까지 걸어와야 하는 겁니다. 지금 딸이 50이 됐는데 ‘아버지, 옛날 얘기 나오면 우리가 골치 아프니 옛날 얘기하지 마라.’고 합니다.
문. 본인은 어떤 지도자라고 생각하십니까?
답. 아직도 지도자라는 얘기를 하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지도자 되는 것이 대통령되는 것에 버금가는 것입니다. 저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도 해보며 정치 속으로 들어가서 일을 해봤는데 저하고는 맞지 않습니다. 거짓말을 해야 하니까요. 저는 거짓말이라는 것을 싫어합니다. 지도자라는 의미는 참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외부의 세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불교에서 말하는 참선이랄까,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지요. 바로 우리 집 옆의 교회에 하나님한테 땅도 바쳐 봤고 부처님한테는 절도 지어주면서 종이 울리는 것 있죠? 그게 제일 좋다고 해서 지어줬습니다. 지금도 매년 엽서가 옵니다. 그런데 지도자는 죽을 때까지, 제가 어떻게 죽을지 모르지만, 가족한테, 특히 부인한테 욕먹습니다. 지금 가게나 어디를 나가서 제일 훌륭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간디가 ‘빛이 돼라, 소금이 돼라,’ 하는 얘기보다 와이프가 하는 얘기를 잘 듣고 나하고 다르다면 서로 대화해야 합니다. 좋은 일을 같이하고, 같이 토론하고 다른 길을 가지 마라는 겁니다.
문.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 수 있습니까?
답. 저도 말로는 많은 좋은 이야기를 했지만, 제가 찾아다니질 못하는 이유가 다리를 다쳤습니다. 다리, 무릎을 접니다. 그래서 오래 걸어 다니는 것, 멀리 가는 것. 그리고 또 한 번은 뇌를 다쳤습니다. 뇌진탕을 일으켜서 실려 가서 뇌수술은 안 받았지만 그런 이유로 몸이 좀 안 좋습니다.
문. 당시 정부의 정책이나 공무원들의 지원은 어떠했습니까?
답. 없었습니다. 백 원 한 장도 없었습니다. 단지 해준 것은 명예 경찰직. 그것도 한 3년 해야 해줍니다. 그 다음에 지도자직. 시골 사람들, 농촌 사람들이니 그것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웠던 것입니다. 경찰이 안 건드립니다. 원래 귀찮게 굴었는데 지도자들은 안 건드렸습니다. 백 원 한 장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전부 제 돈 들여가면서 하는 거고 회비도 제 돈 내놓고 하는 거였습니다.
문. 새마을운동 이전과 이후는 어떻게 변화했습니까?
답. 그때는 가난은 했지만, 그 마음속에 국가에 대한 것과 국기라는 것 또 국민이 해야 할 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본인들에게 엄청난 핍박을 받고 살다가 해방이 됐습니다. 저희가 학교 다닐 때는 1학년, 2학년 때도 일본말을 안 하면 막 때렸습니다. 그 설움을 받다가 해방돼서 애국심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나도 모르게, 그때 사람들은 다들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전쟁이 나고 하니 죽는 것을 눈으로 봤잖습니까? 저도 인민재판도 받아본 사람입니다. 우리 동네가 그런 이상, 사상적으로 많이 다른 것도 있지만 저는 한 사람도 해친 사람 없습니다. 정치 이념을 떠나서라도, 그분들이 어떤 정치이념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뒤에 있는 배경이 있습니다. 쟤 때려 하면 때려야 하니 공산당이 그만큼 나쁜 것입니다.
문. 후배들이나 국민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답. 얘기하면서 생각하다 보니 잊어버렸는데, 어쨌든 간에 새마을은 사람이 하는 운동이고 마음 운동이고 영혼 운동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봉사하는,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사람에게 변화가 오고 그렇게 해야 남이 따르고 가족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제는 가족이 따라줘야 합니다. 나는 국가를 위해서 일한다, 사회를 위해서 일한다는 것은 우리 세대 얘기고 지금은 가족이 따라야 하고 이웃이 따라야 합니다. 그러려면 어쨌든 가정마다 교훈이 필요하고 사회는 사회질서를 지키는 데에 그것이 필요합니다. 문헌을 가진 학자들이 좋은 얘기를 많이 만들어서 그런 것을 사회에 많이 보급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의 생각을 배워서 후배들한테 좋은 얘기를 해주고, 전달하는 전도사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