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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답. 새마을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지 않습니까? 그 당시에 종소리가 울리면 마을 회의를 했습니다. 시멘트를 준다, 삼백 포를 주는데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 하며 고민했습니다. 과거에는 ‘너희 무엇해라’하는 밀어붙이기 식이지 않았습니까? 저희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을에서 타협하여 가장 시급한 것과 편리한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첫 번째로 시작한 것이 길, 농로 넓히는 것이고 그 다음이 마을 골목 넓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차근차근 나아가서 나중에 지붕 개량이나 하천 사업 등도 저희가 스스로 해나갔습니다.
문. 당시 새마을운동에 대한 마을과 지역, 정부의 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답. 처음에는 반반이었습니다. 정부에서 시키는 일이긴 하지만 우리가 한다고 해서 무슨 효과가 있을까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마을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신 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광주 가서 사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런 분들이 저희보다 말씀도 잘하시고 설득력 있게 하셔서 우리 마을은 그렇게 하자고 하였습니다. 처음 시도할 때는 그렇게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막상 시작해보니 약간씩 어려운 일들도 있었지만 그것들을 해결하고 나니 어렵지 않게 정부 소록에 나왔듯이 스스로 나와 일하였습니다. 그 때는 보수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마을을 가꾸는 것이다.’ 하며 잘 됐습니다.
문. 주로 무슨 사업을 추진했습니까?
답. 길을 보면 골목길도 전부 좁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모든 골목길에 짚단으로 이엉을 엮어 울타리를 막았습니다. 그것을 뜯고, 마을에서 시멘트로 블록을 찍어서 담을 쌓았습니다. 담을 쌓아 길이 넓어졌으니 첫 째로 길을 제일 먼저 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하니 편리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지게를 없앴습니다. 전부 손수레로 밀고 다녔는데, 손수레를 사용하면 다 알고 계시지만 몇 배의 효과, 10배, 20배의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고되지 않았습니다.
하천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 하천은 꾸불꾸불하였고 엉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직선으로 다듬는 일을 하였습니다. 좁은 데는 넓히고 넓은 데는 좁힘으로써 물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하고 둑이 안 무너지도록 만들었습니다. 길 넓힌 게 최고였습니다. 마을 길을 넓히는 것이 어느 정도 끝나니까 농로를 개선하였습니다. 당시 농로는 겨우 사람이 하나, 둘 밖에 다니지 못했습니다. 농사를 지으려면 지게를 버려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지게 버리기 운동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농로를 확장하니 손수레, 그 후에는 손수레가 지나갈 수 있으니 경운기, 지금 세상은 그로부터 한 40년 되었으니까 트랙터가 지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저희가 이렇게 단계를 거쳐서 했던 그 당시 마을 중심에 대한 가꾸기 사업은 바로 기초적인 터를 닦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총 집중을 한 것입니다.
문. 사업 추진상 제일 어려웠던 점은 무엇입니까?
답. 농로라든가 토지 보상을 못 해 주기 때문에 뼈아프게 벌어서 가꿔놓은 자기의 영토나 돈을 내놓아라, 희생하라고 했던 것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두 번째는 가족 문제입니다. 지도자가 나서서 일을 하면 아무래도 집안을 등한시하게 됩니다. 아무리 부모님과 처가 좋다고 해도 그렇습니다. 저 역시 그 당시에 결혼을 했는데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솔직히 눈치 봐가며 했습니다. 지금에는 자랑스러운 새마을 지도자라 합니다만, 그러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는 없었습니다.
문.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셨습니까?
답. 처음에 저희가 가서 ‘너희 토지 좀 내놔야겠다.’ 하면 ‘예’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백 명이면 백 명 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설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주먹구구식으로 백지를 놓고 그렸습니다. 그리고 넓혀야 할 것 아니냐, 손수레는 가야할 것 아니냐는 것이 당시의 문제였습니다. 그 당시에 자동차 길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넓혀야 한다고 하면 처음에는 반대하지만 차근차근 자꾸 설득을 시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하도 수차례 만나니 열 번 찍으면 나무도 넘어온다는 옛날 말처럼 성공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사정하고 무릎도 꿇었습니다. 그렇게 한두 사람이 된다고 하면 그 후에는 차근차근 ‘저 사람도 하는데, 나도 하자.’는 생각을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토지가 가장 많이 들어가는 사람을 처음에 설득하는 것입니다. 적게 들어가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손쉬우니까요. 제일 많이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애 좀 써주시죠.’ 하며 사정하니까 그 후에 적게 들어가는 사람들 것은 무난하게 희생을 받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문. 생각만큼 잘 진행되지 못했던 새마을운동은 무엇인가요?
답. 저는 안 됐던 새마을이라고는 느껴보지 못했습니다. 주민들에게 제일 안타까웠던 것은 저희가 계속적으로 그분들을 지원해주지 못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민들 스스로 음식을 해줘야 하여 참을 부탁해야만 했습니다. 사람이 못 먹으면 일도 잘 못하니 먹을 수 있게끔 해줘야 했습니다. 그런 것이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좀 있는 사람들이나 동네에서 좀 하는 사람들에게 ‘이번에는 네가 참 좀 내주어라.’라고 하면 고기는 아니어도 죽 한 그릇씩은 됐습니다. 밀가루 죽이라도 쒀서 먹이는 것이 하나의 보람이었고 그것을 극복해가려고 노력했습니다. 나중에는 서로 한 번씩은 받으니 점차 ‘점심은 각자 해결하니 점심은 아니고 나도 한 번 참을 내야 하겠다.’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또한, 객지 사람들이 일을 잘한다고 있는 사람들이 먹거리 좀 대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것이 다소 어려웠습니다.
문. 어떤 점이 아쉬웠습니까?
답. 저는 오히려 그 당시를 잘 했다고 생각하고 아쉬운 것은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때의 그 기틀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잘 살 수 있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당시에 하찮은 것 없고 땀 흘린 것 없고 보잘 것 없었지만 생색은 안 냈잖습니까? 지금은 새마을운동이 대한민국 상표이지 않습니까? 이 시대말로 브랜드라고 하지요. 그 당시에 어떻게 해서라도 조금 더 했으면 낫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지금의 바람입니다. 이제 지나간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더 할 생각도 못했는데 지나오니까 우리가 더 열심히 더 오지까지, 더 멀리 길을 확장했더라면, 그리고 길도 이왕 할 때 배로 확장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아쉽습니다. 지금은 자동차가 지나다니지만 그 당시에는 손수레 밖에 못 다니고 경운기도 못 지나갔습니다. 지금 자동차가 다녀야 하니 일이 두 번 진행되었습니다. 그것이 아쉬운 것뿐입니다.
문. 일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무엇입니까?
답. 저희가 한 것은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는 농촌 지역이니까 농사를 지으려면 모든 일에 노동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기에 운반이 최고였습니다. 가벼운 운반이 가장 많았는데, 운반이 돼야 했기에 그 보람이 가장 좋았습니다. 저희가 고통을 덜어준 것입니다. 그 고통 대신에 소득에 대한 집중이 가능해졌습니다. 소득 면에서, 시간이 있으니 특수 작물도 해갈 수 있고 그런 것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토지도 안 내주는 사람들, 억지로 하는 사람들도 있고 모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가 인정해야 합니다. 이제 와서 저희끼리 그 당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 당시는 어쩔 수 없이 그랬지만 이제 세상이 좋아졌다고 합니다. 자동차하고 트랙터 등 다 다닐 수 있게 되었다고요. ‘당신들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잘 살게 되었고 편리하게 되었다.’는 말을 들을 때 보람을 느낍니다.
문. 자신을 어떤 새마을지도자라고 생각하십니까?
답. 농촌에 와서 보니까 사실 못 살고 있었습니다. 혁명도감에 가난을 물리친다 했어요. 저희가 그 당시인 1960년대를 볼 때는 엉망이었습니다. 혁명이 1962년도에 났지 않습니까?(516 군사정변) 그래서 비판하는데 새마을운동이 나왔습니다. 잘살기 운동 등 무엇 무엇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저희가 건의만 안 했지 구상하고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뛰어들었습니다. 그런 것은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저는 어디가도 자랑스러운 새마을지도자라고 말합니다. 누구도 새마을 비판할 생각은 안 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현재에도 ‘새마을 운동이 아니면 지금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사느냐.’고 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후회하거나 아쉬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문.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 수 있습니까?
답. 저는 제 자신이 잘 했다고 믿습니다. 누구한테도 떳떳하고 누군가는 제가 독재라고 하더라도 제가 그렇게 했으니 이렇게 완성되고 목표를 달성한 것입니다. 아무래도 시멘트 삼 백 포를 주면 더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 농로를 생각할 때, 전체 마을 주민들의 농토까지 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제 목표는 더 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하자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시멘트가 모자란다고 하면 더 하려는 새마을에게는 많이 주었습니다. 그렇기에 욕심이 생겨서 더 했습니다. 또 있으면 마을에서 제가 조금 내놓고 마을 부잣집 사람에게 너도 조금 내놓으라고 하였습니다. 토지를 많이 번 사람이 가장 혜택을 보지 않습니까? 그러니 네가 좀 내놓으라 하였는데 그것이 독재니까 단점이기도 하였죠. 하지만 ‘그래야 할 것 아니냐. 너희를 위해 해주는 것이고 너희는 손해 보지 않는다. 그러니까 좀 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아쉽지만 저는 잘 했다고 봅니다.
문. 당시 정부의 정책이나 공무원들의 지원은 어떠했습니까?
답. 공무원들도 지원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와서 애로 사항이 있으면 뭐냐고 물어봐주시고, 애로 사항에 대한 지원 가장 큰 지원은 그 당시에는 시멘트였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읍사무소 분들이 관여를 많이 해주셨습니다. 그분들도 자주 오셔서 참 같은 것을 보면 비참하다고 느끼셨을 것입니다. 지금은 빵이라도 있지만 그 당시엔 없었습니다. 밀가루로 개떡 만들어서 먹는 때였으니까요. 그런 것을 보시면 미안해하시며 참을 가져 오시기도 하셨습니다. 그 당시로써는 공무원들도 어쩔 수 없이 새마을운동에 참여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 이전과 이후는 어떻게 변화했습니까?
답. 그 당시 농촌의 삶은 비참했습니다. 쌀밥도 몇 집만, 그마저도 명절이라든가 제일 어르신만 드렸지 한 80~90%는 겨울에는 수수밥, 조밥을 먹는 식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죽을 많이 쒀먹곤 했습니다. 이것이 그 당시 식생활입니다. 의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양복이 아니라 한복, 한복도 일 년이면 한두 차례 입는 정도였습니다. 찢어지면 꿰매었습니다. 품바 같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가난할 때의 농민들의 의복이었습니다.
좀 더러운 말 같지만, 그 당시에는 항아리를 파고 거기에 판자를 놓고 대소변을 봤습니다. 지금은 밑을 닦아야 하니까 휴지가 다 있지만, 그때에는 신문지도 가장 잘 사는 사람이나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는 신문지가 아니라 벼를 비비게 되면 마분지 같은 것이 나오는데 그런 것으로 뒤처리를 하는 비참한 생활을 했습니다. 식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 마을이 70여 명 되었는데 우물 하나를 놓고 썼습니다. 그 당시 여름에 부녀자들은 동을 이용하여 새벽부터 물을 길러 갔습니다. 그 당시의 농촌 환경은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골목길의 경우 겨우 사람이 빗겨 갈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그 또한 당시에는 손수레가 없기 때문에 전부 지게질을 하여 갔습니다. 여자들은 이고 남자들은 지게질을 하였습니다. 나갈 때도 그냥 나가는 것이 아니고 전부 지게 지고 총 동원해 나갔습니다. 그 당시 농촌 생활은 그런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경운기, 트랙터 등이 골목길을 누비고 있습니다. 그만큼 처음의 새마을 가꾸기는 우리가 잘 살 수 있는 틀을 만든 것이고 지금의 우리가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니 하는 데의 밑거름이 된 것입니다. 저는 이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
문. 후배들이나 국민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답. 저는 지금은 어디를 가도, 마을회관가면 떳떳해 합니다. 새마을운동은 계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앞서 보듯이 새마을운동이 지금은 어떻습니까? 마을 신문 보면 74개 마을인가 국가에 수출되어 있지 않느냐고 할 정도로 이야기 합니다. 이제 대한민국 새마을운동이 아니라 세계의 운동인 것입니다. 이러한 단계가 왔기 때문에 중앙에서 열심히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만 저는 그때보다 더 열심히 해주십사하고 부탁합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잘 되면 새마을운동을 잘 했구나!, 보람 있구나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