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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새마을운동 하게 되신 계기가 어떻게 되세요?
답. 제가 70년대 초에 예비군 소대장을 했었는데 그 당시에 이 지역에 지도자 색출이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75년도에 동장과 또 동 주민들의 추천에 의해서 당신 같은 사람이 새마을에 헌신 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75년도 5월 달에 새마을 지도자로 위촉을 받아서 지역에 봉사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문. 추천을 받을 당시 선생님의 마음은 어떠셨어요?
답. 제가 여기서 결정하기가 상당히 힘이 들었었는데 사실 시골에서 올라와가지고 도회지에 정착을 하다보니까 지역 주민들과 화합하기도 힘이 들고 또 많은 가정사에 어려움에 부딪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예비군 소대장을 하면서 지역의 현황, 그 지역에 내가 살던 송림동 8번지라 하는데 속된 말로 통금에 걸려도 귀탱이를 한번 더 때린다는 아주 우범지역이었습니다. 그 지역에서 몸을 담고 활동을 시작하려고 하다 보니까 다름 사람들이 너무 격려는 고사하고 멸시를 하고 너 같은 사람이 과연 새마을에 몸을 담아도 되겠느냐 이렇게 많은 질책들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일부 우리 예비군 소대장들이나 이런 사람들이 과거에 국가에 공헌했던 그런 사항들을 거울삼아서 꼭 이 지역에 보탬이 되도록 노력해달란 그런 말을 듣고 시작을 했었는데 처음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예비군 소대장을 할 적에 그 지역에서 소대장 같이 소대장을 하는 부인이 난산으로 병원에 입원을 했었는데 그 사람이 퇴원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걸 보고 안타까운 나머지 이 해결할 방법이 없나 그래서 주민들에게 협조를 구해야겠다, 그래서 헌금을 받기 시작하고 돌아다녔는데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몇몇 사람들이 주도를 해가지고 관으로부터 인정을 해 주는 그런 과정에서 약 15만원의 돈을 성금을 걷었습니다. 그래서 무사히 그 사람을 퇴원을 시켜서 그 사람을 가정에 복귀시켜주는 그런 일을 하고 보니까, 하면 된다는 내용이 이런 것들이구나, 또 사람이 강박하지만 않고 내가 베풂으로 해서 사람들에게 진리를 얻어낼 수 있는 이러한 일들이 꼭 있다는 걸 생각하고 야, 이거는 나 혼자만 알고 있을 게 아니라 전체적인 지역을 위해서 예비군 소대장을 떠나가지고 봉사를 해야 되겠구나, 그런 결심을 가지고 새마을에 몸을 담았습니다.
문. 당시 새마을 운동에 대해서 그 마을과 지역, 정부 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답. 제가 75년도에 새마을지도자로 위촉을 받았으니까 그 이전에 새마을이 선포가 됐었죠. 그런데 이제 몇몇 사람들이 새마을에 몸을 담고 일을 하면서 그 지역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주민을 선도할 수 있는 그런 일들을 못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런 것을 결심을 했었고, 나와서 보니까 그냥 봉사라는 것이 지금과는 시대가 달라가지고 남에게 지탄을 받는, 쉽게 말하면 저거 저 먹고 살기 바쁜 사람이 무슨 봉사를 하나, 이렇게 멸시를 당하던 때가 바로 그 때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극복하겠다는 나머지 예비군이라는 기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역의 봉사는 우선 주민들부터 호응을 받아야 되는데 그렇기 위해서는 우선 주민에게 인정받는 일을 해야 되겠다, 그래서 예비군들 몇 사람들과 지역의 통반장을 위주로 해가지고서 그 지역에 지금 말씀드렸던 우범지역, 어려웠던 지역을 야간순찰 내지는 지역의 청소년들을 선도할 수 있는 이런 방법을 계속 이끌어 나갔습니다. 그래서 관에서부터 인정을 받아가지고 그 후에는 계속 구나 동에서 꼭 저를 위주로 해서 새마을을 이끌고 나가는 그런 현상까지 일어났던 그런 사항입니다.
문. 그러시다면 주로 무슨 사업 위주로 추진을 하시게 된 건가요?
답. 75년도에 위촉을 받아가지고 78년도에 수원새마을연수원에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새마을에 대한 진리와 그리고 주민들로부터 받아 낼 수 있는 새마을의 기본 역할 이런 것들을 꼭 해야겠다는 결심을 거기서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나와서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 지역에 그렇게 헌신하고 있는 과정에서 그 지역에 저희가 살고 있던 데는 약 640여 세대의 아파트촌이었었는데 인천에서 제일 최초로 지어진 아파트, 그래서 지역에 포장도 하나도 안 되어있고 또 여러 가지로 아주 이름이 시흥이라고 시청에서 지어줬는데 어렵게 주민들 스스로 골주만 세워놓고 주민들이 스스로 집을 지어서 살 수 있는 게 어렵게 만들어졌던 뎁니다. 그런데 그 포장도 하나도 안 되고 그래서 아주 주민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 그걸 보고 제가 구청에 신청을 했습니다. 이곳에 포장을 해야 되겠는데 좀 관에서 도와 달라.
그러니까 제가 새마을지도자 그 당시에 새마을 지도자라는 걸 왜 제가 크게 느꼈느냐하면 교육받으러 가서 이런 걸 느꼈습니다. 기획 실장님이 나와서 답변을 해 주는데 지역에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말 해보라고 해요. 그래서 제가 뭘 느꼈냐면 우리 지역에 천광유지라고 비누공장이 있었는데요, 그 악취가 바람이 불고 정중앙에 하천을 타고 내려올 적에는 그 냄새 때문에 아주 몹시 아주 그냥 막 그 주민들이 피해를 보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걸 여러 번 구청에 건의를 했더니 그 날 좋은 날은 거기서 재봐야 아무것도 없거든, 멀쩡한데 뭐가 피해가 있느냐.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정중앙에 하천 옆에서 꽃이 죽는 형편인데 사람의 건강에 지장이 있지 않겠느냐. 그래도 아니라고 그러냐, 그래도 자기들은 관에서 나와서 재는 사람들은 날이 좋은 날 와서 재보고 근거가 없으니까 못하겠다 이런 얘깁니다. 그래서 그때 가서 기획실장보고 교육을 받을 때 이랬습니다. 이런 과정에 놓여있는데 이걸 해결해주십시오. 그랬더니 아 잘 됐다고, 지도자가 내려가기 전에 벌써 연락이 갔을 테니까 염려 말고 가십시오. 해결하겠습니다. 그래서 내려왔습니다. 내려왔더니 난리 났어요. 관에서 몇몇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이 정병희 죽일놈이라고 말이여, 이 지역을 갖다가 다른 데 외포를 시켜가지고 이 지역 망신을 시킨다고 말이지 막 난리가 났습니다. 근데 단 동사무소 동장이라는 사람이 할 얘기를 했구나, 자기가 겪어보니 이 지역이 어려웠던 일을 정 해결 못하는데 이 지도자라는 것이 이런 거나 하고서 저를 찾아와서 격려를 해 줍니다.
그래서 그런 과정에서 정리가 됐습니다. 그래서 정책적으로 정리를 시켜서 이건 주민들이 피해를 보니 안 되겠다 해서 내보냈습니다. 그 후에 주민들로부터 신망을 더 받았죠. 그래서 그런거, 저런거 해가지고 지도자라는 위상을 가지고 구청에, 시청에, 구청에서 안 되면 시청까지 가가지고 꼭 신청을 했습니다. 이 지역에 포장공사를 해야 되겠는데 지금 현재 아무 것도 없다. 이걸 좀 해 달라. 그래서 그걸 78년도에 1년 이상을 끌어서 79년도 80년대 초까지 가가지고 이것이 됐습니다. 시멘트 325포대와 또 모래, 자갈, 또 부산물들을 25자루를 보조를 받아줬는데 이 325포대의 시멘트를 받아놨는데 그 당시에는 어떻게 됐냐면 새마을사업이, 50%를 관에서 보조를 해 주면 50%를 주민 자력으로 보태야 됩니다. 그런데 그걸 어려운 서민 아파트에서 할 길이 없어요. 그래서 그걸 쌓아놓고선 그냥 일을 못하고 있는데 그냥 그거 가지고 시작을 하면서 우리가 스스로 해결 해 나가라고 하면 좋겠는데 관은 어떤 조건을 내 걸었냐면 50%를 돈을 확보를 해서 은행에 예치를 예치된 금액내용을 보고해 달라, 그래야 사업 승인을 해 줍니다. 근데 그게 할 수가 있습니까. 돈이 없으니까 그래가지고 장마철인데 7월 달에 그냥 비는 오죠, 시멘트는 쓸려 나가지~, 이거 길이 없어요. 그래서 밤새워가면서 제가 그걸 가서 지키고, 그땐 지금 같은 비닐이 좋은 게 없습니다. 천막을 다 떨어져가는 천막 같은 걸 구해다가 덮어놓고 이렇게 해가면서 그걸 지키고 있고 그런 것을 독려하는 것을 보면서 주민들이 그때 맘이 바뀌었습니다. 안되겠다. 관에서만 협조하는 것 보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한번 해 보자. 그래서 주민들이 일부 성금을 걷어주고 또 자기들이 사업비를 자기들이 배당 될 금액을 걷어주고 보탰는데도 그래도 부족합니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때 이제 새마을금고라는 데가 처음 생겨가지고 새마을금고에서 지역의 그 봉사를 시작할 땐데 그 지역에서 200만원을 제가 집을 담보로 해가지고 대출을 받고 그때 차비 150만원을 제가 보태서 350만원을 은행에 예치를 해가지고 통장을 갖다 시청에 주니까 그 때 확인해줘서 이제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공사를 일부 하다 보니 그래도 여직 주민들이 피동적입니다. 돈을 냈어도 피동적이에요. 왜 우린 돈 냈는데 돈 냈으면 네가 해야 될 것 아니냐. 근데 그때 어떤 일이 생기느냐 하면 지역에 이 반대하는 나를 또 불신하는 이런 사람들 불량배들이 쳐들어와서 너 먹고 살려면 너나 살지 뭣하러 새마을운동이야. 새마을운동이 뭔데 너 먹여 살리지도 않는데 네가 주민들을 건방지게 따라댕겨, 하고선 막 이제 반발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반발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제가 고통을 겪고 있으니까 참 고마웠던 것은, 그 뒤에 지금으로 말하면 깡패, 그때 얘기로는 깡패, 지금으로 말하면 불량배라고 하죠. 그 불량배 대표되는 사람들이 예비군들이었었는데 나를 찾아와가지고 소대장님이 이렇게 일을 하시는데 내가 도와줄게 하십시오. 그래서 그 사람들이 힘을 빌려서 일을 하기 시작하니까 그 어깨에 힘이 들어있는 사람이 시작을 하니까 많은 시민들이 호응을 하더란 얘깁니다. 그래서 주민들로부터 전부 일손을 시켜가지고 일부, 일부를 포장을 하고 나니까 그때 포장하고 나서 비가 많이 왔어요. 일부 하고 나서, 지역이 붕괴되고 하수도가 막 뚫려나가고 하니까 이거 아주 보기 흉하거든요. 그러니까 아 주민들이 이거 해야 되겠구나. 과연 정병희가 하는 게 옳은 일이구나. 새마을이 이런 거로구나, 하는 걸 그때 주민들이 깨닫게 됐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공사를 다 했고 그렇게 하고 나니까 이 옆에 있는 소골목 주민들도 우리도 해 주시오, 우리도 보탤테니 해 주시오. 근데 뭐 예산이 있습니까. 거기 것만 하고 마는데. 다시 시청에 가서 사정을 하고 새마을이란 지도자란 그 명목을 가지고 새마을 사업을 해야 되겠는데 관에서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해가지고 그때 또 지원을 받아가지고 그런 것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런 것을 다 하고 났는데 나중에 이건 나중에 말씀드리면 되겠습니다마는 사업에 관련해서 한 가지만 더 얘기를 할게요.
그 지역에 350m의 도로 포장과 하수도 정리를 해야 되는데 그게 몇 십 년을 내려오는 주민 숙원사업입니다. 왜, 비만 오면 팽겨 내려가고, 수돗물이 다 끊어져나가서 못 먹고 이런 형편이거든요. 그런 때 마침 정부로부터 전두환 대통령의 특별 하사금이 내려왔습니다. 지역의 공사비가 그때 돈 2,500만원이 내려왔는데 그걸 가지고 시작을 해서 약 600만원의 예산이 들어가는데 그 예산을 보태기 위해서 종전과 마찬가지로 그런 어려움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관의 협조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가지고 350m에 달하는 흉관 설치를 해가지고 하수도를 정리했고 그 포장 공사를 자력으로 이렇게 하고 했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완공을 해 놓고 주민들로부터 이제 저기를 받아서 신뢰를 받아가지고 이렇게 할 동안 마지막에 가서 제가 너무 주야를 막론하고 시작하다보니까 몸에 이상이 있어서 병원에 입원까지 하는 어려움까지 겪었습니다. 그런데 무난히 다 해결이 됐고, 그 후로부터는 주민들이 과연 새마을이 이런 거로구나, 새마을은 과연 이렇게 해야 되는구나. 그 이외에 할 얘기들 많이 있습니다마는 너무 길어서 이걸로 줄이겠습니다.
문. 다른 사업은 없으셨나요?
답. 저희 이런 과정에서 지역 일부 주민으로서는 신뢰를 받고 자기 집 앞에 포장을 해 주니까 그런 신뢰를 얻었습니다만 전체 주민들은 다시 말하면 지역의 어른들부터 설득을 시켜야 되겠다. 그래서 그 이 새마을금고라고 하는 데가 있는데 새마을금고라고 하는 그 지역에서 제가 주민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것은 구판장을 한번 개설해야 되겠다. 그래서 구판장을 개설해가지고 새마을 회관 내에 구판장을 개설해서 그때 돈으로 하루에 400만원에 해당하는 판매고를 올렸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남는 이익금을 가지고 맥아더 장군 건립비에 거기다도 냈고, 예비군 사격 보습장에 일부를 냈고, 또 지역에 어려웠던 게 불우이웃 돕기를 하면서 시작이 됐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 그 돈을 가지고 지역에 확산시킬 수 있는 일이 뭐냐, 그래서 이제 노인들을 경로효친 사상을 고취시켜야 되겠다. 그래서 거기에 일부 남는 돈과 주민들의 협조를 얻어가지고 거기에 지금도 있습니다마는 지금은 재능대학이 됐는데 대헌학교라는 학교에 노진철 이사장님이 계십니다. 그 분에게 쫒아갔습니다. 이렇게 어렵게 했는데 노인들이 지금 들어갈 데가 없어. 그러면 노인들 학장님도 나중에 경로당에 가셔야 될 분 아니오. 그러니까 이거 좀 어떻게 해주쇼. 그러니까 그 분이 나는 어렵게 지역에 이러니까 협조를 해준다고 해봐야 지금 얘기하면 만 원, 이만 원 해주는데 그분이 설득해서 돌아다니니까 십만 원 이십만 원씩 협조 해주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경로당을 지어놓고 노인들을 위해서 관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관광이라고 하면 어폐가 있겠습니다만 노인들의 여가선용을 시켜주는 그런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노인들이 이제 새마을이라는 이러한 일들, 또 차에서 올 적, 갈 적마다 새마을에 대한 홍보, 그리고 거기 자료도 있습니다만 전체적인 새마을의, 이제 새마을을 잘 몰랐다 하더라도 연수원이라든지, 아니면 새마을 신문, 또 등등 이런 것들을 보면서 새마을의 기법을 배워가지고 그걸 계속 설명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나중에는 저 사람 새마을에 미친 사람 소리까지 들었었는데 그렇게 해서 노인들부터 신뢰를 받아내니까 노인들이 이거는 우리가 해야 될 일이고, 새마을이 이런 거고 국책사업이 아니냐. 이런 것을 자기 자손들에게 전파를 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새마을이 이렇게 퍼져 나가니까 그걸 봐가지고 이웃 동네에서 따라하고 또 구청에서 표창까지 받아가면서 이 구청장이 직접 찾아와가지고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그 자세를 일러달라고 해서 나중에는 사례 발표까지 하게 됐습니다만서도 아침저녁으로 꼭 거리 질서는 물론이거니와 뒷골목 청소 같은 것을 제가 마다않고 도맡아했던 그런 일들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공사를 해야 되는데 사업비가 없어. 그래서 그 사업비를 50%를 주민들이 부담을 해야 되는데 그 부담할 수 있는 힘이 없더란 얘깁니다. 지금 같이 이렇게 경제가 성장이 되고 가정으로부터 풍요로운 사회였다면 쉬웠겠지만 그땐 참 어려웠습니다. 국수 한 그릇 가다가 전 식구가 식사를 때우는 이런 어려웠던 그 시절이거든요. 또 그 지역이 아주 인천에서 제일 못 살고 어려웠던 지역이 바로 거깁니다. 지금은 이제 전부 개발이 되가지고 아파트를 지었지만 그렇게 지역 주민들이 협조를 안 해주는데 제가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솔선수범해서 하는 그런 것을 보고 주민들이 일부, 이 봉사라는 것이 이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언제고 돈 많고 힘 있는 사람은 안 씁니다. 그 지역에도 풍요롭게 살고 남에게 손 안 벌리고 걱정 없는 사람은 안 해 절대. 근데 이 상당히 어려운 사람들이, 머리에다 이고 다니는 다라장사, 날마다 끌고 다니는 리어카 장사, 이런 사람들이 스스로 얼마씩 내서 아 소대장, 전 그때 아주 별명이 소대장입니다. 소대장 이거 보태가지고 해요. 이렇게 해서, 하기 시작하는 걸 보고서 주민들이, 그때 신문도 여러 번 났었는데요. 그러니까 이제 행정기관에서 그걸 보고 저보다 행정기관에서 더 설득을 시킵니다, 주민들에게. 이건 당신들의 일이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지금 피부로 느끼지 못하지만 새마을이라는 것이 우리가 국비를 다 들여서도 할 수 있지마는 주민 스스로 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게 새마을이기 때문에 여러분들 해야 된다. 그러니까 도와 줘라. 이런 식으로 관과 민이 혼연일체가 돼서 했습니다.
문. 사업을 진행하면서 겪은 시행착오는 어떻게 극복을 하셨나요?
답. 시행착오라고 하면 잘못된 걸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저희들이 좀 부족했던 점은 이 공사하는데 지금은 그런 일이 없겠지만 그 때는 그 어려웠던 시절에 사전에 어떤 진실한 계획을 가지고 일을 했더라면 지금과 같이 어렵게 사업을 하지 않았을 거에요. 근데 그 당시에는 의욕만 가지고 관으로부터 협조를 받아냈는데 인천에 제 1호 사업으로 인천에서 시작을 해 주는데 관에서도 그런 것을 다 캐치 못했던 겁니다. 그래서 그 우선 자재부터 받아놓고 시작을 하려고 했던 게 그 어려웠던 점. 이런 것들이 상당히 힘이 들었고요. 그리고 그 기간이 연장됨으로 인해서 굳어 들어가는 시멘트라든지 비에 씻겨 내려가는 모래, 자갈 이런 것들을 관리하면서 상당히 힘들었다는 것. 그래서 사전 계획 없이 공사는 못 하겠더라 하는 그런 것들을 상당히 어려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문. 그 외에도 조금 아쉬웠던 부분이 또 있으신가요?
답. 새마을 초창기니까 주민들이 호응을 안 해줘요. 주민들이 참여 부족인데, 이걸 하기 위해선 이런 걸 했습니다, 그때도. 반상회마다 다니면서 새마을지도자 이름으로 반상회마다 몇 명이든 좋고 다섯 명도 좋고 열 명도 좋고 쫒아 다니면서 지역에 대한 현황사항, 제일 먼저, 그리고 이 우리가 공사를 해야 된다는 원리, 그리고 이게 왜 새마을이냐, 새마을은 뭐 하는 거냐. 새마을은 누가 만들었고 우리가 왜 해야 되는 거냐. 이런 것들을 아주 역설을 그냥 했습니다. 그래서 구청에서 새마을 선도위원으로 까지 나중에 임명장을 줘서 다른 동에도 다니면서 제가 설명을 하러 다니고 그랬었는데 그래서 저 것도 마찬가지로 저것을 각 지역에 다니면서 새마을에 대한 홍보. 그러니까 제가 너무 자부하는 것 같은 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우리 인천에 동구에서는 새마을이 지금 확산이 됐을 거예요. 그렇도록 노력 했습니다.
새마을이라는 게 그렇게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너무 생소했던 운동이고. 그래서 이 운동을 제가 거기 따지고 보면 한 가지만 더 말씀 드리면 그 시절에는 그 지역에 아주 화투를 많이 했어요. 노름. 가뜩이나 어려운 사람들이 그걸 그렇게 많이 합니다. 그래서 지금 말씀드린 대로 반상회 같은 데 다니면서 홍보를 하는데 그 홍보하는 과정에서 이런 얘기를 하죠. 무슨 3.1운동이 국가운동으로 떠들어댔든 개인 운동이다, 아니다. 3.1운동이 1920년도에 일어났는데 1919년도에 일본 놈들이 화투를 우리 한국에 전파 시켰다. 근데 이게 꼭 일본 사람들이 한국을 잘 되라고 보내준 건 절대 아니다. 근데 이 화투라는 것을 내가 보니까 절대로 처음에 시작을 하면 좋게 모여서 시작을 하지만 나중에는 분쟁을 하고 주먹이 왔다 갔다 해야 되는 이런 노름이 바로 화투다. 이것부터 근절시켜라. 그걸 하고 다니니까 여자들이 어떻게 좋아하는지 남자들이 그러고 다니니까. 그래서 전 여자들로부터 그런 것들도 호응을 받아냈고 그리고 그 새마을에 대한 역설을 하면서 반상회에서 새마을에 대한 이미지, 그리고 지역에 대한 우리 현황, 그리고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해야 된다는 이런 일들, 남에게 우리가 받아야 되는 것보다도 우리가 스스로 해야 된다는 이런 일들, 이 새마을의 원리를 역설하고 다니면서 새마을에 미친 사람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제가 그렇게 새마을을 전파시켰습니다.
문. 가장 보람 있었던 사업이 어떤 것인가요?
답. 보람 있던 일들이 상당히 많죠. 제가 이렇게 어렵게 새마을 일을 하면서 이 집안 식구들한테도 외면을 받았습니다. 너무 어려운 살림에 집안 살림을 안고 너무 돌아다니기만 하니까. 그리고 주민들로부터 따가운 손가락질을 받는 일을 왜 당신이 해야 되느냐. 이렇게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81년도에 새마을 장학금을 우리 막내들이 받았습니다. 그 장학금을 받아놓고 지금도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마는 한 가족들이 장학금을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내가 이런 일을 하면서 장학금까지 아이들이 받게 되는 이런 일들이 내가 스스로 남에게 베풀어 주는 일들이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는 일들이 이렇게 힘을 받아서 장학금이라는 참 돈을 가지고 등록금을 내면서 제가 상당히 그 환희에 젖어 있었던 그런 일들이 제일 감명 깊었고. 그래서 그 뒤로도 어려운 제가 새마을 지도자를 하면서 각 지역에 장학금을 전달할 적에 어려웠던 일로 제일 고통을 겪고 있는 그런 사람들에게 선행을 줄 수 있는 그런 것들을 그 뒤로 많이 했고요. 그리고 그 뒤에 가장 보람을 느꼈던 일은 주민들로부터 신뢰를 받다 보니까 그 주민들의 뜻에 의해서 새마을금고 이사장이 됐습니다. 새마을금고 이사장이 됐는데 새마을금고 이사장을 13년 동안, 13년을 하면서 4번 동안 선거를 하는데 한 번도 대적자가 없이 정병희를 시켜줘야 되겠다고 주민들이 나서주는 일, 다시 말씀드리면 92년도에 지방의회가 시작이 됐는데 그 지방의회에 제가 출연을 했습니다. 제가 또 뜻에 의해서 했지 절대로 거기에 출연을 안 하려고 했는데 주민들의 뜻에 의해서 구의원에 나가가지고 1대, 2대, 3대를 주민들 뜻에 의해 무투표로 당선이 됐습니다, 선거도 없이. 그래서 제가 주민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때 과연 이런 것들이 참 보람이로구나. 그리고 내가 선행을 했던 이런 일들을 상당히 자부심을 느꼈고요. 그리고 83년도에 새마을 훈장 근면장을 받았는데 이 근면장을 받아다놓고 지역의 전체 주민들을 불러 놓고서 제가 술 한 잔을 나눠주면서 지역의 일 할 수 있는 이런 여건들, 그리고 쉽게 얘기하면 훈장이라고 하면 사형도 면한다는 어려운 일을 내가 받아냈는데 내가 많이 배운 사람도 아니요, 잘 사는 사람도 아니요, 똑똑한 사람도 아닌데 지역에 내 역량껏 자기 힘을 잘 하는 일을 하는 것이 새마을이다. 이런 것들을 하면서 여러분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이런 일들이 바로 새마을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제가 역설하고 제가 보람을 느꼈습니다.
문. 새마을 지도자와 협의회장으로 보내면서 어려웠던 점은 없으셨나요?
답. 어려웠던 일들이 주민들로부터 소외당할 적에 가장 힘이 들었고 그리고 지금 같으면 예산 확보가 힘이 들었는데 한 가지 다행스러웠던 것은 그때 관과 민이 공존하는 시절, 그 관으로부터 협조를 받아가지고, 도움을 받아가지고 주민들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내가 부족해도 주위에서 도와주는 이런 일들이 생겼기 때문에 별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고. 또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습니다. 우리만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도농간 자매결연을 맺어가면서 그때 한참 새마을이 그것을 권장하는 사업이었죠. 도농간 자매결연을 맺어야 되는데 우리 힘으로 하기가 힘들어가지고 저기 김포군 길상면이라는 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길상면하고 길상면 목상리 거기에서 자매결연을 맺는데 그때 자매결연을 맺어가면서 매년 자매결연을 맺었으니까 일을 해야 될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각종 농기구도 도와줬고 또 이런 것도 도와주는 길에 가서 힘을 덜어주기 위해서 일손을 도와줘야 되는데 그 일손을 도와주기 위해서 사람들을 동원하고 하는 게 제일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동원을 하고 보니까 인솔 할 수가 없어, 왜, 차를 빌릴 돈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제 버스를 이용해서 가는 데 이렇게 어려웠던 이런 것들을 나중에는 주민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했습니다마는 그런 시절이 상당히 힘이 들었던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문. 시 협의회장이 하는 활동은 어떤 것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답. 사실 시 협의회장은 꿈도 안 꿨습니다. 구 협의회장을 하고서 마을금고 이사장도 그만뒀고, 13년 하고서. 구 위원도 12년 동안 하고 그만뒀고 전부 끝나고서 집에서 그냥 쉬고 있을 땝니다. 근데 2001년도에 전부 직업을 내놓고 쉬고 있는데 2002년도, 2003년도에 여기 지금 돌아가셨습니다만 저보다 먼저 인천시 협의회장을 한 강재준 씨라고 있습니다. 그 분이 중앙회 부회장도 하고 총무도 하면서 여러 가지로 애를 많이 썼던 분인데 그 분이 찾아와서 저에게 부탁을 합니다. 야, 저하고 이제 나이가 비슷한데 저보다 그 사람이 한 살 덜 먹었는데 다시 한 번 새마을에 손 댈 수 없느냐. 그래서 나 현재 이 지역에 협의회장직은 전부 내 놓고 의원이라는 사회의 권위를 가지면서 다 내놨어도 그 지역의 새마을 협의회에 몸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새마을 지도자의 일원입니다. 제가. 그래서 그걸 알고 이 사람이 찾아왔고 지금도 제가 새마을지도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시 협의회장에 출연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해야 되겠다. 여지까지 자기가 시 의장 하고 내가 부의장 할 때부터 알아봤는데 너만치 열성을 가지고 너만치 이 새마을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어. 그러니까 좀 해 달라.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 때는 다른 걸 그만두고 놀 때니까 과연 내가 나이 먹은 사람이 이걸 해가지고 내가 39년생인데 나이를 먹어가지고 이걸 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까 지금 형편이면 충분하다고 자꾸 권유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말을 듣고서 같이 협력을 해가지고 각 지역에 순회를 하면서 협의회장에 취임을 해가지고 홍보를 하러 다닙니다. 근데 이 지역에 지금도 있습니다마는 내가 그 사람 이름은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현재 시 협의회장이 어떻게 반대를 하던지 또 그때 여기 사무국장으로 있던 박영로라고 있죠. 그 사람이 퇴임한 사람인데 사무국장으로 있을 때, 그 사람마저 저를 소외시하고 상당히 배격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각 주민들을 각 구 10개 군,구가 있는데 8개 구, 2개 군 인천 10개 굽니다. 10개 구 협의회를 다 찾아다니면서 저의 호소를 했습니다. 새마을은 이렇게 하는 거고, 우리가 같이 한번 해 보자. 그리고 당신이 한 만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길을 내가 열어주마. 이런 식으로 다니며 얘기를 계속 했습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그 당시에는 심지에 새마을 시 의장 나왔던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가지고 나이도 먹고 그랬는데 그만 해야 될 거 아니냐. 그리고 후배에게 좀 물려 달라. 당신이 하면 뻔한데, 뻔한데 이걸 자꾸 망신을 당해야 되겠느냐. 이 사실 강압적인 말까지 하는데, 좋다, 나는 나이가 먹었으니까 물러나도 좋아. 그러나 마지막으로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역량을 좀 발휘해야 되겠어. 그러니까 해야 되겠다. 이런 자부심을 가지고 다음 날 시작을 했습니다. 시작을 했는데 다음에 참 3분의 2정도가 호응해 줘 가지고 시 협의회장에 선임이 됐습니다. 근데 시 협의회장이 되고 나서 보니까 제가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각 지역의 화합이라는 것이 참 어려웠습니다. 현재 되지 않고 있고. 그래서 그런 것들을 하기 위해서는 저기 지금 우리 저기 있습니다만 그 홍보내용을 가지고 10개 군,구를 돌아다니면서 제가 모든 새마을에 전수를 다했습니다. 지금도 각 지역에 나가면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요. 그래서 주로 새마을에 대한 원리, 뭐 이런 것들을 계속 홍보를 하면서 그 지역의 정기총회, 그리고 어떠한 불우이웃 돕기 뭐 이런 것들을 계속 찾아다닙니다. 여기서 강화 같은 데가 상당히 먼 데, 멀다 않고 제가 차가 있으니까 차 가지고 돌아다닙니다. 그래서 그 제가 각 10개 군,구를 빠지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새마을에 독려를 하면서 이런 짓을 하니까 각 도 의장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그래서 다시 나중에 2006년도에 다시 재임이 돼서 2009년도 까지 제가 새마을 협의회장을 하면서 중앙회 감사를 역임했고 이렇게 홍보를 하고 돌아다녔습니다.
문. 스스로 평가를 내리신다면 어떤 평가를 내리시겠어요?
답. 평가를 내리라면 전 지금도 제 스스로 점수를 매긴다면 저는 100점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습니다. 그리고 누가 하든 일을 해야 되는 일들이,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누가 해도 나만치 열심히 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제 스스로는 자부합니다. 그래서 나는 내 힘껏, 내 역량 껏, 지역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헌신했다고 저는 자부합니다.
문. 정부나 인천시에서 정확히 어떤 지원이 나왔나요?
답. 네 그 당시에 지원 사업비를 주는데 다른 구에는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인천시는 재정이 좋았습니다. 그 당시에 95%의 자립도를 가지고 인천시가 상당히 좋아져 있을 땝니다. 그랬는데 그 새마을이라는 게 원래 주민 자력으로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 자력으로만 하는데 지역에 현재 인천시에서도 그런 역량이 있으니까 새마을 사업을 할 수 있는 어떤 길들을 열어 달라, 우리 힘으로만은 절대 부족하다. 새마을은 관에서만도 할 수 없는 게 새마을이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도와줘서 이런 사업을 할 적에 어느 정도의 예산을 가지고 배려를 해 주면 우리 힘으로 해 나가겠다. 이거 좀 해 달라. 이렇게 시나 구에 가서 간청을 하고 그 사람들에게 부탁을 해가지고 시작이 돼서 나머지 다 달라고 하면 어림도 없고, 안 주고. 나머지는 우리 힘으로 한다고 해서 어려웠던 걸로 시작해서 했습니다.
문. 새마을 운동 이전과 이후, 어떤 변화가 일어난 건가요?
답. 아까도 쭉 설명 드렸습니다만 새마을 이전에는 그 지역에서 어깨 높은 사람들이 돌아다니면서 지역을 장악하고 주민들에게 힘을 쓰고 다니고 이렇게 어려웠던 그런 시절을 새마을로 많이 정화가 됐고, 그리고 화투를 치면서 집안을 돌보지 않고 방랑하던 방황하던 그런 일들은 많이, 다는 아닙니다, 일소시키면서 주민들로부터 신뢰를 얻어낼 적에 과연 국가적인 사업보다는 지역적인 사업이다. 우리 스스로 해야 우리 새마을이다. 그리고 잘 살기 운동이라는 그 이념이 바로 주민들에게 박히면서 그 후에는 새마을이라는 이름으로 지역에 상당히 인정을 받았던 그런 내용입니다.
주민들이 제일 선호하고 좋아했던 건 하면 된다는 자부심. 그리고 주민 스스로 해야 겠다는 의지. 이런 것들이 새마을에서 일어났다고 봅니다. 그래서 지역에 근면, 자조 협동이라는 그런 말을 그 지역에서 써 가면서 주민들이 이해 못 하는 것을 근면과 자조와 협동의 원리를 설명을 드리면서 주민들에게 이해를 시켰던 그런 일들로 말미암아 지역에 사업을 하면서 지역에 누가 해도 못하는, 관에서도 못해주는 이런 일들을 주민들이 스스로 할 수 있게끔 독려시켰던 또 이끌어냈던 그런 일들을 보고 주민들이 야 이거 한 사람의 지도자가 이 지역을 변모시켜놓는구나. 그런 데서 다시 말씀 드리면 아파트를 포장을 해 놓고 그렇게 하니까 그 당시에 아파트 한 채가 2,500만원 밖에 안 하던 것이 5천만 원 7천만 원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걸 보고 주민들이 스스로 내가 하면 할수록 지역에 활성화시킬 수 있구나. 그리고 그 지역에 옛날에 많이 하던 꽃동산 사업, 쌈지 공원 축성, 이런 것들을 새마을이 아주 몇몇 사람들이 뜻이 맞는 사람이 있어가지고 계속 이런 걸 해서 이끌어내면서 지역이 깨끗해지죠, 지나가면 꽃향기 많이 일어나죠, 그리고 또 내가 할 수 있는, 내가 봉사한 만큼 이익이 찾아오게 되죠, 그러니까 주민들로부터 나중에는 새마을이 아주 근원이라는 것이 아주 그냥 뿌리박히도록 제가 심어 놨습니다.
문. 새마을 지도자 후배들이나 국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답. 저는 이런 걸 생각합니다. 지금 뭐 사람은 세대가 바뀌게 되니까 자연 나이 먹은 사람들은 물러나게 되죠. 그런 신진사들이 자꾸 올라오는데 전 요새도 이런 얘기를 좀 들어봅니다. 그 지역에서 어느 모임이라든지 제가 향우회라든지 노인회라든지 이런 등등 다른 모임에 가면 제가 이런 얘기를 합니다. 자연스럽게 새마을을 이끌어 내봅니다. 이 새마을로 말미암아 우리 지역에 2,800불 밖에 안 되는 자립도가 23,000불로 올라가는 이런 일들이 원동력이 새마을 아니냐는 걸 지금도 자연스럽게 끌어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로 말미암아 새마을이 이랬는데 과연 그 시절에 태어나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이 어려웠던 일들을 이끌어 내 줘서 지역의 경제성장의 디딤돌, 5000여 년간 찌들었던 가난을 몰아내줬던 이런 양반. 이런 운동이 아니었던들 우리가 이렇게 호황을 누릴 수 있었겠느냐. 그러니까 과거를 무시하지 말고 우리는 과거를 되새겨서 새마을 운동이 지금도 제가 자세히는 모르지만 제가 알기로는 48개국에 새마을이 전파되었다는 그런 얘길 듣고 있는데 이런 것들이 나라의 원천이 우리가 홍보가 되고, 그리고 모델이 될 수 있는 이런 운동들을 여러분들은 잊지 말고 우리가 계승을 해야 된다. 이런 것들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반드시 새마을을 후손들에게 계승시켜 달라. 그리고 저는 아까 말씀해주신 젊은 지도자들이 좀 이런 것들을 배워가지고 이런 것들을 교육이라는 것이 항시 필요합니다. 물론 많이 배우고 학력적으로 여러 가지 충분한 사람들은 거의 다 이해를 하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이해를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 과정에서 이런 이렇게 묻습니다. 박대통령은 이름이 뭐냐. 지금 이렇게 묻습니다. 물어보면. 그래서 이제는 그런 때마다 어딜 가면서 마이크를 잡을 수 있을 그런 시간이 되면 그런 얘기를 합니다. 박대통령의 어록, 박대통령이 독일 가서 어려울 때 차관을 들여올 때 그 힘들었던 이런 얘기들 이런 것들을 쭉 얘기를 해 주면서 이렇게 해서 나라의 부강이 됐던 것들을 너희들은 아느냐. 너희들은 보릿고개도 뭔지 모를 거야. 이런 것들을 타파시킨 것이 새마을운동이요, 이것을 제창시킨 것이 박정희 대통령이다. 이건 지금 와서 그것을 부인한다고 하면 너희들은 몰랐다고 하면 그건 못써. 그러니 이런 것들은 우리가 꼭 지켜 나가야 되고, 앞으로도 우리가 계승해야 되는 운동이 바로 새마을운동이다, 꼭 지켜 달라, 전 이렇게 부탁을 합니다.
문. 새마을 운동의 핵심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답. 국민의 힘입니다. 그러니까 나라에서 아무리 이끌고 나가려고 하더라도 국민이 따라주지 않으면 소용없는 겁니다. 근데 새마을의 원동력, 또 새마을이라는 것이 꼭 국민운동, 그 시절에 나왔던 국민 화합운동. 그러니까 물론 지금 이런 운동이 일어났다고 하면 다소 어려웠을는지 모르지만 그 시절에는 꼭 필요했던 그 운동이 바로 새마을 운동이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새마을로 말미암아 주민들의 아주 머리가 개혁을 시켰고, 그리고 지역으로부터 이것은 내가 해야 된다는 일, 남에게 바라는 것 보다는 내가 보탬이 돼야겠다는 이런 일들이 아주 주민들로부터 수련하는 아주 훌륭한 운동입니다. 저는 아주 새마을에 몸을 담고 일생을 바친 사람으로서 저는 새마을이라 하면 아무데서나 가서 역설합니다. 언젠가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서구에서 국회의원 몇 분이 지금 참석을 해가지고 저기를 해가지고 전진대회를 하는데 나오는 걸 봤어요. 그래서 제가 그 사람들을 보고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내가 새마을운동에 힘을 입어서 구 의원이 됐는데 구 의원이 되가지고 독일에 비스마르크 예를 들어서 그때는 초창기라 외국 선진지 시찰을 해가지고 그 지역으로부터 새마을 저기를 의원들 의정에 대한 신청을 배워다 여기다 접목을 시켰습니다. 근데 거기 갔을 적에 내가 새마을지도자라 하고 거기다 아주 자랑스럽게 배지를 달고 갔습니다. 그랬더니 그 비스마르크의 의장이 그 이름은 제가 잊어버렸습니다만 뭐라고 하는지, 당신 새마을지도자요, 그 통역을 하는데, 그래 그렇다고 그랬더니, 얼마나 했소, 그래서 35년을 했습니다, 그래요 그럼 새마을이 뭐에요, 그래서 거기 가서도 제가 새마을에 대해서 역설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뭐라고 하냐면 당신네 나라는 절대로 국민성 자체가 민주주의로 할 수 없는 나라다. 새마을만으로 민주주의가 되겠느냐, 그래서 저는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새마을이 원동력이란 얘기를 거기서 설명을 했고 국민의 화합과 질서를 이끌어내는 운동 이걸로 인해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이끌어 나갈 수 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뭐냐고 얘기를 하냐면 왜 민주화가 될 수 없느냐 하는 것을 얘기하겠다는 얘기요. 그러더니 자기네 나라는 230년을 민주화를 하는데 당신네는 몇 년밖에 안 됐어. 근데 거기 어려웠던 점이 뭐냐면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하는 다수결의 원칙을 지켜야 되는데 한국 사람은 그걸 못 지켜. 자기네 나라는 아무리 좋은 일이 있을 것 같고 많이 떠들어도 열 사람 중에 여섯 사람이 옳다고 하면 네 사람이 쫒아가. 근데 한국 사람은 아홉 사람이 옳다고 해도 한 사람이 죽어도 그려, 아니여 이건. 그래서 이런 민족성 가지고는 절대로 민주화가 될 수 없다. 한 가지 더 큰 사람이 절대로 못 만든다. 왜 못 만드느냐, 그래서 한국 사람은 그 전에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상을 받았습니다마는 그 이전이니까 큰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래요, 왜 그러냐고 그러니까 자기네 나라는 열 가지 중에 여덟 가지를 잘 못하고 한, 두 가지를 잘 하게 되면 노벨상을 탈 수 있도록 국민들이 도와줘서 큰 사람을 만들어 놓는다. 좋은 일이니까. 근데 한국 사람은 열 가지 중에 아홉 가지를 잘 하고 한 가지를 잘 못하면 매도시켜 죽여 버려. 그러니까 절대로 큰 사람이 못 나와. 이게 새마을에서 한단 얘기에요. 그러면서 제가 국회의원들 모임에서 그 얘기를 했습니다. 이런 것을 거울삼아서 당신들 지금 국회에서 하는 일이 뭐냐. 화합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외국 사람까지 이렇게 비난을 받아낸 이런 일들을 당신이 지키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 지켜라. 반드시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걸 지키고 그런 승리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그런 일들을 해봐라. 제가 그렇게 이야기 하니까 그 사람들이 고맙다는 얘기까지 하고 간 그런 적이 있습니다.
남을 도와준다는 일, 사실 남을 이해시킨다는 게 제일 어렵습니다. 내 말로 다른 사람이 나를 따르게끔 한다는 것이 제일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그 당시에 제가 생각했던 것은 내 스스로 솔선수범을 해야 되겠구나. 그래서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그 무너져가는 시멘트 더미를 안고서 제가 밤을 새워가면서 주민들에게 호소했던 그런 일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이 내가 함으로 해서 주민들에게 따라오게끔 만드는 솔선수범. 그러니까 내가 내 자부심을 가지고 내 몸을 헌신해서 해야 된다는 그런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새마을을 외국 가서 이렇게 보면 많이 홍보는 못하고 미국 가서도 한번 그런 일을 겪었었는데 미국 워싱턴 시에 가서 그때 거기서 명예 시민증까지 받아가지고 왔는데 그 분들이 새마을을 상당히 우월을 하더라고요. 한국의 이 운동 때문에 지금 민주화가 성립이 되고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의회제도가 그 전에 생겼다가 없어졌다가 중간에 생긴 것이 바로 이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되지 않느냐 그런 얘기를 하면서 새마을 해서 이끌어졌던 그런 일들, 이런 것들이 상당히 저들이 생각할 때 보람 있었고, 또 일반인들에게 제가 그때 그런 일들을 얘기 하면서 전 세계 각 국에서 새마을이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우리나라가 모델이 된 일. 영국 갔을 때 제가 이런 얘기를 들어왔습니다. 한국이라는 코리아보다는 세계 대 사전에 새마을이라는 단어가 먼저 들어가 있다. 그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해요. 그래서 제가 새마을지도자라고 가는 데마다 그런 얘기가 들어가니까 이렇게 어려운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당신이구나 하는 그런 얘기도 들어보고, 각 선진국에서도 꼭 새마을이 필요하다는 국민운동이라는 것을 아주 자부하고 있다는 얘기를 지금 후배들에게도 종종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