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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답. 1960년도 하반기에 북한에서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기습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1월 달인데 그리고 나서 4월 달에 갑자기 우리나라에 예비군이라는 제도가 생겨서 창설을 하게 됩니다. 그 당시 저는 제대를 한 제대군인이었는데 갑자기 예비군이 창설되면서 각 마을마다 예비군 중대가 생겼는데 중대를 조직하다 보니 지휘관이 없었습니다. 저는 하사관 출신이지만 우선 위관장교라든가 영관급장교들이 없으니까 하사관 중에서 이를 테면 집무대행을 뽑았는데 제가 원창동 예비군중대 18소대를 관할하는 본부 소대장 다시 말해 중대장 직무대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18개 소대를 지휘하면서 예비군 활동을 하던 때 우리 마을에 조그마한 금고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이것이 새마을금고가 되었는데 당시 상인들을 위주로 하는 금고였습니다. 그런데 금고가 잘 생성이 안 되고 저축이 없고 해서 제가 대원들을 훈련시킬 때마다 천 원씩 무조건 저축을 하라고 하여 이를테면 금고 운동을 시작했는데 나중에 새마을운동이 시작 되면서부터는 자연적으로 여기에 관여하다 보니까 새마을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문. 당시 새마을운동에 대한 마을과 지역, 정부의 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답. 도시에서는 새마을운동을 잘 모릅니다. ‘새벽종이 울렸네!’노래는 나왔지만, 새마을운동은 농촌에서 마을 안길 넓히고 초가지붕 개량하고 소득 증대, 농사 잘 짓기 그런 것을 했지 도시에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저 자신도 그랬습니다. ‘새마을운동은 농촌에서 하는 것 아니야? 초가지붕 버리고 시멘트 지붕 올리는 것’ 그것이 새마을이라고 알았습니다.
문. 주로 무슨 사업을 추진했습니까?
답. 금고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저축운동을 하기도 했지만, 이것만으로는 안 되었습니다. 우리 예비군 대원들한테 물론 정신 교육을 통해서 저축을 해야 한다고 말을 하지만 거의 안 됩니다.
우선 마을 사람들이 서로 실행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뭔가 생각하다가 폐품 수집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과 같이 손수레를 끌고 다니면서 폐품을 수집하러 다녔습니다. 그것이 우리 마을로서는 도시 마을운동의 한 근간이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까요. 그래서 ‘이것이 바로 새마을운동이다. 새마을운동을 넓게 보고 힘들게 생각하지 마라. 조그만 것부터 시작하면 그것이 새마을운동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되었습니다.
문. 사업추진상 제일 어려웠던 점은 무엇입니까?
답. 가장 어려웠던 것은 누구든지 처음 시작할 때는 뿌듯한 희망과 어떤 자부심을 가지고 하는데 빨리 호응을 안 해 줬습니다. 우리 주민들이 빨리 호응을 안 해주고 강 건너 불 난 것 보듯이 쳐다보고 ‘괜히 왔다 갔다 하면서 사람 시끄럽게 하는 것 아니냐.’하는 식으로 냉소적인 반응이 느껴져서 실망감을 주고,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헐뜯고 ‘그거 해서 뭐하냐고’ 이럴 때 주민들을 마음을 어떻게 집약시킬지 방법이 빨리 떠오르지 않아 고심하느라 괴로웠던 것 그것이 힘든 일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문.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셨습니까?
답. 우리 마을에는 경로당이 그 당시 두 개 있었습니다. 마을이 18개 소대가 있으니까 큽니다. 그래서 위에 하나 밑에 하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제가 어른들에게 의식 교육을 했으면 하고 생각했습니다. 어른들에게 의식교육을 하면 동네 사람들이 따라오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70년대 초 새우깡이라는 과자만 가져가면 최고로 알 정도로 유명한 과자였는데 그 새우깡 두 개를 사고 소주를 사서 가서 교육을 하기 위해 어른들한테 하나씩 나눠드리고 했습니다. 당시 경로당에 들어가면 담배피우고, 장기두고, 화투치는 것이 일입니다. 하지만 마을 경로당 어른들도 회장이 있고 총무가 있습니다. 그 분들을 만나서 교육에 관하여 상의하니 처음에는 저보고 미쳤다고 하셨습니다. 가서 집에 어른이나 새마을운동 관련 교육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끈질기게 설득을 했는데 한 2주 정도 걸렸습니다. 설득해서 ‘우리 새마을운동 같이 합시다. 그 길은 바로 의식개혁운동입니다.’ 그래가지고 어른들에게‘새마을이라는 것이 무엇이냐.’를 제가 연수원에서 받아온 그대로 교육을 했습니다. 새마을 정신 중의 하나인 ‘자급자족’은 우리 스스로가 잘 살게 만드는 그런 운동이라고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도 뭔가 탈바꿈을 합시다. 어른들이 하면 마을 사람들이 따라 올 것입니다.’그래서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그 교육을 시작하면서 시장 상인들도 받게 되고 또 금고에도 어른들도 저축을 했습니다. 더 배불러지고 더 활성화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우리 마을 금고에 100만 원 이상 기금을 축적해서 매년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그런 놀라운 성과를 거드는 대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몸소 느끼고 실천한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문. 생각만큼 잘 진행되지 못했던 새마을 운동은 무엇인가요?
답. 농촌은 마을 들어오는 길이 좁으니까 어떤 사람이 자기 땅을 갖다가 내놓으면 그것으로 길을 만들고 차도 다니고 그렇게 해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도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도시라 해서 다 깨끗하고 아름답지 않습니다. 좁은 골목길도 있고 좀 넓어도 짐 같은 것을 내려놓아서 통행이 불편하기도 하고, 조금만 손질해도 갈 수 있는 길인데 내 땅에 내가 짐을 놓는데 뭐 어떠냐 하는 식으로 막무가내로 하는 주민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우선 동네 분위기, 생활환경 분위기를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물건을 조금 더 안으로 들여놔서 사람들이 부딪침이 없이 통행 할 수 있게 그런 것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저희 마을 안길 정리 운동이었습니다. 이런 것 갖다 놓은 것을 좀 들여놓으면 수월하게 다닐 수 있고 또 손수레도 갈 수 있는데 내 집 앞이라고 해서 그런 마구 갖다 놓으니 우선 그런 개혁부터 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애들이 뛰어다녀도 걸릴 일이 없이 진짜 마을 안길이 깨끗하게 훤히 트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왜 간섭을 하느냐며 짜증내고 달려들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아 그렇게 해야죠.’ 할 정도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처음에는 호응을 하지 않던 사람들이 그걸 보고서 도와줘야겠다, 이것이 참 좋구나 하면서 돌아설 때 그걸 보는 지도자들은 기분이 좋고 참 보람을 느낍니다. 역시 지도자는 열심히 해야겠다, 안 하면 안 되겠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문. 일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무엇입니까?
답.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은 제가 유성에 있는 학하리 신생원이라는 사회복지사 총무 일을 맡고 있었던 때의 일입니다. 총무이니까 당연히 직장새마을도 관여하고 있었고 그래서 우리 신생원에서 자매결연하는 농촌 마을인 대덕구(현재 계룡시)를 가서 새마을도 지원해주고 그런 식으로 직장생활 중에도 새마을 관련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대전시 문창동 동사무소 사무장님이 찾아왔다고 전화가 와서 들어갔더니 사진이 있으면 사진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영문도 모른 체 대전 시청까지 가서 사진을 찍어서 가져다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유를 알아봤더니 1975년도, 77년도에 정부에서 새마을지도자한테 훈장을 주었는데 그 명단에 대전시에서 저를 추천해서 훈장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원 조회하는데 사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당시 대전시 새마을과에서는 다른 세 사람을 훈장 대상자로 해서 이미 정해놨었습니다. 그런데 중구 청의 ‘이학구’ 계장님이란 분이 대상자를 하나 더 추가하자고 하여 세 사람과 함께 추천을 하였는데 그 세 사람이 떨어지고 제가 된 것입니다. 중구청 새마을과에서 볼 때 그 세 사람이 일한 것 보다 제가 진행하고 실행한 일들에 대하여 도시 새마을운동방법으로 확실히 높은 점수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동네가 난리가 났습니다. 대전광역시 1호 새마을지도자로서 훈장을 받은 사람이 되었는데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있던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평생을 우리 중구청 새마을과 ‘이학구’ 계장을 잊지 않고 그 당시 윤 모 과장도 그렇습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한테 가서 직접 훈장을 받았는데 제가 전국에서 좋은 예가 되었다고 어깨를 두들겨주며 세 번을 악수했습니다. 그것을 저는 가장 제 인생 일대의 보람 있는 날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박정희 대통령께서 실시해온 새마을운동에 관한 것들을 영원히 기리고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새마을운동 발상지인 청도도 다녀오고 했는데 그런 게 지금도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안 따라주면 못하니까 저를 따라주는 것이 보람 있습니다. 우리 청소년들에게 새마을 교육을 통해서 충의 교실을 운영한다든가, 또 직업 청소년들에게 ‘너희 고등학교도 못 갔으니 야간에 와서 공부해야 할 것 아니냐 내가 장소를 만들어 놨으니까 그렇게 해라.’저는 그것을 위해서 집도 땅도 팔았습니다. 그 아이들을 교육을 시켜야 하니까 의자도 있어야 하고 칠판도 있어야 하고 뭐든 소품이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만 해도 누가 자기 집 팔고 땅 팔아서 좋다는 사람이 있겠어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20년 동안을 직업 청소년들에게 명심보감, 사자성어, 기초 한문, 윤리 도덕, 국악 등을 가르쳤습니다.
새마을운동이 없었으면 제가 하겠습니까? 새마을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우리 학생이 저에게 깨알같이 글을 써준 것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가슴속에 묻고 제가 괴로운 일이 있으면 ‘선생님 존경합니다.’라고 쓴 그 학생의 편지를 봅니다. 그 아이가 이제 25살 되었는데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와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초등학교 졸업할 때,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분기마다 걔를 만나면 꼭 5만 원씩 줬습니다. 걔는 그것으로 도서를 사봤던 모양입니다. 자기가 이제 25살인데 곧 결혼하겠지만, 선생님을 평생 잊지 못하겠다고 글을 써서 보냈는데 저는 그걸 보고서 아주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났습니다. 그것을 제가 여기에 놓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는 걔의 글을 읽어봅니다. 이만한 곳에 써서 줬습니다. 걔들이 커서 ‘선생님 주례 서주세요.’ 또는 ‘고등학교 졸업해요.’ ‘그래 며칠이지?’ 부르면서 축하한다고 할 때 제가 새마을운동이 아니면 저런 것을 느꼈을까 싶습니다. 참 멋지다, 보람을 느낀다. 그럴 때가 보람을 느끼고 가슴이 뭉클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 어떤 점이 아쉬웠습니까?
답. 제가 문창동에서 새마을운동을 할 때 아침부터 빗자루 들고 나가서 청소를 안 한 적이 없습니다. 아침마다 어떤 일이 있던 아침마다 빗자루 들고 나가서 하고 새마을운동을 안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새마을 조기축구회에 나가서 젊은 회원들이 나와서 새마을운동 같이 하자고 하면 고개를 흔들 때 그것이 아쉽습니다. ‘형님 혼자 하면 되죠?’, ‘회장님 혼자 하면 되죠?’, ‘새마을은 새마을지도자가 혼자 다하는 것이 아니야?’ 하면서 웃고 지나갈 때, 꼭 같이 동참해서 같이 도와줘야 할 사람이 나 몰라라 할 때 참 아쉽고 때려주고 싶습니다.
그런 일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서 동네에서 어떤 집이 어려운 일에 쳐했습니다.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생활이 어려운 일, 가정 관계가 어려운 일, 마을하고 이웃 간 어려운 일,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있는데 그중에 제일 나쁜 건이 이웃 간의 어려운 일입니다. 도저히 해결이 안 되는 일입니다. 서로 죽자 살자 아니면, 너 죽고 나 죽고입니다. 그걸 해소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하고 가서 고개를 숙여야 하고 그런 것을 지도자 입장에서는 제가 뭐 형사도 아니고 경찰관도 아니고 판, 검사도 아닌데 지도자는 그런 것까지 매달려야 합니다. 단순히 새마을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됩니다. 새마을이라는 것은 포괄적으로 말하면 전체 마을을 위해서 있는 것이 새마을지도자입니다. 그 마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보고서 그것을 잘 조화롭게 해결 내지는 포용할 수 있는 것이 새마을 지도자입니다. 그런 역할을 할 때 잘 수용이 안 되고 제 뜻대로 안 될 때 그럴 때 아쉽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문.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 수 있습니까?
답. 사람은 누구나 장단점이 다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장점이 55%고 단점이 45%라고 생각합니다. 제 장점이라는 것은 전 한번 생각하면 그대로 이행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셨을 때도 제일 먼저 청와대까지 달려갔고 그리고 한 6일 있다가 김준 원장 수원 새마을연수원에 가서 원장님께 의견도 제시했고, 그것을 확대해서 신념이 굳은 22명의 지도자가 모여서 손을 잡고 새마을운동중앙본부를 지켜왔고 끝까지 신념을 굽히지 않고 일을 했던 것이 장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점은 어떤 일을 하고자 하면서 생각을 깊이 하다가 타이밍을 놓쳐서 실패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이 가장 나쁜 단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마을운동하면서도 그것 때문에 실수한 적이 꽤 많다고 저 스스로 인정합니다. 예를 들면 제가 새마을지도자 부회장을 할 때도 한 편에서는 차기 회장을 해야 되지 않느냐고 했는데 그냥 차기 회장 한번 해야지 하고 밀고 나가면 되는데 에이 내가 무슨 회장이야 하면서 미루다가 실패한 적이 있었는데 이런 것들이 저의 아주 큰 단점입니다.
전국의 마을에 3만 3천 명 중에 저도 하나지만 그 3만 3청 명 지도자가 똑같을 수 없습니다. 똑같은 생각을 할 수 없고 또 같이 일하는데 같은 것을 추구 할 수 없습니다. 다 개성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개입하는 것도 다르고 뭔가 조직력도 다릅니다. 그런데 저는 어렸을 때 고아로 컸습니다. 6.25사변으로 부모를 다 잃었고 밑에 동생 둘을 두고 3형제 고아로 컸는데 저는 동생들도 제가 가장으로서, 형으로서 그 어떤 가정의 애들보다 훌륭하게 키워냈습니다. 우리 막내 동생 월남까지 갔다 오고 제 동생은 또 웅변대회에서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습니다. 그 정도로 훌륭하게 키웠고 저는 대학교를 못 나와도 동생들은 대학교를 나왔습니다. 그렇게 훌륭하게 가장 노릇을 하면서 제가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마을지도자가 다른 어떤 지도자한테 지지 않으려고 했고 또 그것이 그대로 입증이 되었고 현재도 지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22명 중에 5명 돌아가셨고 17명 남았습니다. 전성장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 있는 분을 우리가 대표로 모시고 있는데 그분도 현재 모든 것을 저하고 상의하면서 우리 모임을 헤쳐나아가고 있습니다.
다른 지도자한테 절대 지고 싶지 않습니다. 또 제가 현재 있는 지도자들한테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떨 때는 답답함을 느낍니다. 제가 있었을 때 저렇게 하지 않았는데 왜 떳떳하게 행동을 못 할까, 과감하게 행동을 못 할까, 나는 새마을지도자다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왜 못 할까 그런 생각이 들 때가 많고 그렇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저는 전직 새마을지도자는 제가 서울지도자라는 것을 욕되지 않기 위해서 항상 누구한테든지 ‘나는 서울지도자야.’ 그것도 박정희 대통령한테 직접 훈장을 받은 사람이고 그래서 그분에게 누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제가 더 열심히 해야겠다, 그러니까 저는 ‘전, 현직이 없다. 내가 새마을 경로 학교를 안 할 때까지, 청소년들을 지도 안 할 때까지 나는 새마을지도자다.’ 그렇게 생각하는 좋은 지도자라고 과감히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문. 당시 정부의 정책이나 공무원들의 지원은 어떠했습니까?
답. 한마디로 말하면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농촌에는 지원이 없으면 안 되니까 소정의 지원이 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도시는 없었습니다. 도시는 그냥 자생조직으로서 스스로가 움직여서 어떻게 하면 도시를 발전 또는 환경 변화, 도시 사람들 마음을 순화시킬 수 있느냐 주안점을 둔 것 같은데 딱히 또렷하게 정부에서 어떤 물질적인 지원이라든가 어떤 계획을 내려 보낸 것은 없습니다. 그냥 새마을운동, 글자 그대로 어떤 변혁을 요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자체적으로 도시에서는 이런저런 새마을운동을 해야 된다 생각해서 예를 들어 말하면 제가 서두에서도 말한 적이 있습니다만 혼잡한 골목을 치워서 말끔하게 정돈을 한다든가 사람들이 보행을 좀 쉽게 한다든가 손수레를 끌고 갈 수 없는 곳이라도 서로서로 정리하고 도와줘서 끌고 갈 수 있게 한다든가 그런 데에 주안점을 두고 도시 새마을운동을 한 것 같습니다. 정부의 지원은 없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 이전과 이후는 어떻게 변화했습니까?
답. 새마을운동 자체적으로 볼 때 우리가 처음에 도시에서 특히 농촌하고 달라서 농촌은 보이는데 주로 주력을 했습니다. 집을 새로 단정을 한다든가 마을 안길의 들어가는 곳이 좁으면 넓힌다든가 이런데 목표를 두고 했기 때문에 딱 정해 져있었습니다.
그런데 도시는 사실 좋아진 것이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막연하게 무얼 해야 하는가를 구성하고 거기에 따라서 움직였다고 봐야 합니다. 다만 도시 새마을운동도 보면 할 것이 무궁무진하게 많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우리 도시는 골목길로 형성되어 있는데 골목길을 걸어가다 보면 사람도 혼자도 걸어가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이 집에서 이것을 협조하면 좋겠는데 주민들에게 그런 것들을 모두 나서서 동참하도록 유도하고 또 직접 지도자가 손수 그것을 가르쳐줌으로써 주민들이 호응 할 때 도시 새마을운동도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 어렵게 생각하면 어렵고 쉽게 생각하면 쉽다는 것 그런 면에서 도시 새마을운동도 할 것이 많았고 괜찮았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새마을운동 자체가 없었더라면 그대로 이어져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그 새마을운동 자체를 다섯 글자 놓고 ‘이것이 새마을운동이다, 이 새마을운동 차원에서 여러분 같이 움직입시다, 또 이것은 이렇게 하고 이것을 여기에 두지 말고 다른 곳에 옮기면 보기 좋던데 이렇게 하면 안 되겠습니까?’ 이것도 새마을운동이라는 타이틀 속에서 하니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없었으면 말할 끈이 없고 원인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새마을운동이란 글자 자체가 끈이 되어서 사람들 마음을 움직여주는 계기가 돼서 참 좋았고 그것이 있었기 때문에 좋았는데 만약에 없었더라면 그것이 그대로 흘러 나가지 않았을까, 어떤 변화를 우리가 바라볼 수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새마을운동을 참 잘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문. 후배들이나 국민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답. 새마을운동을 다시 돌이켜 보는 자리에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니까 지난 세월 여러 가지가 떠오르고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새마을운동 자체는 근면, 자주, 협동입니다. 근면, 자주, 협동 그 중에 저는 근면하고 자주는 여러분들이 잘 알 거라고 생각해서 말씀을 안 드리지만, 협동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 국민들이 또 우리 지도자들이 협동만큼은 아주 진솔하고 솔직하게 가슴 속에 묻어서 잘 활용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박근혜 정부가 추구하는 4대 악, 가정폭력, 성폭력, 학교폭력, 음식부패 그런 운동 그런 4대 악을 뿌리 뽑는 일에도 결부시킬 수 있어서 모든 사회악을 뿌리 뽑는 그런 대 운동에 근본이 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새마을운동을 무슨 정권적인 것도 아니고 어떤 것에 예속되는 것이 아닌 우리 국민들의 의식을 개혁하는 정신혁명운동으로 승화시켜서 세계로 뻗어 나아갔으면 합니다.
이 운동이야말로 정말 북한 사람들도 인지해서 이 운동의 정신이 북한 사람까지 전파되어서 통일되는데 근본적인 그런 운동이 되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누가 뭐래도 우리 국민들 마음속 깊이 새마을운동이라는 그 다섯 자가 가슴 속에 심어져서 조금 더 나은 세계적인 새마을운동이 되었으면 하고 그 이전에 대한민국 국민들이 모두 사랑하고 가슴 속에 남을 수 있는 그런 운동으로 더 발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