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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재건국민운동을 통해서 새마을 운동에 참여하게 되신 겁니까?
답. 새마을 가꾸기 사업을 하게 된 동기는 67년부터 우리나라가 한해가 3,4년에 걸쳐 와가지고 굉장히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농민들이 일 년 먹을 양식도 못 만들고, 겨울에 농한기가 되면 뿔뿔이 돈벌이하러 도시로 공사장으로 나가버리고, 또 그렇지 못한 농촌에서는 화투놀음, 농한기 6개월 동안에 할 일이 없으니까. 그걸 해서 패가망신한 부락도 많고 그런 시절이었는데, 가보니까 대통령께서 지방순시 하다가 보니까 개발할 생각은 안하고 돼지머리 갖다 놓고 고유제를 지내고 비 내려주십사 하고 하늘에다 빌고, 정성을 모으는 데는 가치가 있을 지도 몰라도 실제 도움이 되는 건 하나도 없거든. 이러니 답답해서 전국 시장, 군수를 부산에다가 71년 4월 21로 기억합니다만 전국 회의를 열었어요. 내가 전국의 모범 부락이 잘 사는 부락은 어떻게 잘 사느냐 다녀보니까, 책에도 나오고 뉴스에도 나오는 얘긴데 경산 아양도 있고, 경상북도 청도군 신도리도 있고, 여러 군데 많더라. 그런 부락은 지도자가 훌륭하고 농민들이 일심단결해서 부락에 필요한 사업들을 스스로 해왔고, 잘 살아보자고 하는 의욕이 있어서 되는 것 같더라. 한해가 왔는데 하늘에 돼지머리 갖다 빈다고 해서 비가 올 리도 없고, 물 한 바가지라도 하천을 굴착을 해서 그 물을 모심기에 갖다 연다든지 이런 생각은 추호도 없더라. 그래서 이 한해 대책은 시장, 군수가 5천년 역사의 주민들의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앞으로 제 생각에는 국가 재정이 어렵지만 한 십 만 원 정도 범위 내의 시멘트를 지원을 한다든지 부락의 환경 개선 사업부터 사소한 걸 해 나가면 좋겠나 하는 말씀을 당시 하셨어요. 그래서 돌아와서 그 해 6월 달부터 정부에 새마을 부서가 각 군에 없으니까 담당 공무원 지정해서 회의를 소집했어요. 중앙 내무부에서. 그래서 새마을 가꾸기 사업인데 내용인즉, 부락에 길이 좁은 데는 넓히고, 또 하수도가 없는 데는 시멘트로 해가지고 돌 석축을 쌓으면 조그마한 하수도가 되니까. 주민들의 노력을 플러스 해가지고 환경개선 사업을 해라, 담장도 치고. 이래서 부락별로 사업 규모가 다르겠지마는 국가가 돈이 없으니, 335, 한 부락에 무조건 크든 적든 간에 335대의 시멘트를 지급하겠다. 이걸 잘 활용해서 주민들의 불편사항도 없애고 한번 멋있게 사업을 해봐라, 이런 취지의 교육을 시달해가지고 왔는데 당시에 저는 내무과, 행정계에 제가 근무를 했는데 어느 날 군수님이 불러서 내 회의 자료를 보고 당신이 내 특별 보좌관을 해라, 군 출신이다 보니 보좌관 제도를 즐기는 것 같아요. 제가 뭘 합니까. 자네는 다른 일 하지 말고 내가 지시한 시멘트를 어떻게 하면 활용을 잘 할 수 있겠느냐. 여기에 대안을 나한테 보고를 해라. 내가 마침 혁명직후에 재건국민운동 지방순회 교수를 했어요. 각 시군을 다니면서 먹고 자고 그 부락에 가면 청년 회장이 있거든? 회장 집에서 자고, 얘기도 나누고, 또 어떻게 하면 우리 동네가 발전할 수 있는가 연구도 하고, 그래서 내가 빈손으로 갔는데 할 게 있어야지. 그 집에 밥만 공짜로 먹고 그냥 올 수도 없고 그래서 청년들을 저녁에 좀 모아줘. 그래서 내가 잘 사는 국가는 이러하고, 미국 같은 데는 청교도 정신, 프런티어 정신, 개척정신, 이런 걸로 해서 광활한 토지를 만들고 또 개척을 하고 그래서 선진국이 되었고, 그것도 저것도 못하는 나라는 우리처럼 못살게 되었는데 우리도 열심히 하면 잘 안 살겠나, 쉬운 것부터 하자. 그래서 마을에 종을 치면 사람들이 모여요. 새벽 6시에 일어나서 빗자루 들고 전부 나오라고 해서 골목골목 청소도 하고 종이도 줍고 이런 일을 내가 한 6개월 자원봉사 요원으로 했어요. 다녀보니까 그래도 환경이 괜찮고 잘 사는 부락은 눈에 띄게 잘 살고, 또 그렇지 못하는 부락은 형편없죠, 말이 사는 거지. 이런 걸 내가 보면서 이 나라를 어떻게 하면 좀 더 발전시키고 그런 훌륭한 지도자가 없을까. 지금 박대통령은 그런 때 차관을 해서 재건국민운동도 하시는데 싶어서 내가 그때 나라를 사랑하는 법도 배웠고, 봉사하는 법도 배웠어요. 그런 경험을 토대로 해서 군수님이 하명하는 가꾸기 사업을 잘 한번 해봐야겠다.
문. 당시 새마을 운동에 대한 정부 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답. 제일 중요한 게 한 고을의 고을 군수 잘 만난 것도 행복이고, 한 나라 대통령 훌륭한 사람 모시는 것도 국민의 행복이고 욕구입니다. 그래서 내가 첫째 지도자를 잘 양성을 해야 되는데 대학 졸업한 사람을 월급을 주고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자기 부락에 있는 사람 중에서 똑똑한 사람을 선정을 해야 되는데, 이 양반들은 견문이 없다고. 막연하게 시멘트 주고 한번 잘 해봐라. 이래가지고는 꿈을 이룰 수 없다 싶어서 내가 군수님 보고 지도자 양성에 관한 제안을 했어요. 해병 부대가 일개 사단이 있는데 여기 훈련소도 있어요. 그리고 또 관리들 하는 막사가 있어요. 훈련 할 때는 그게 필요하고, 필요 없을 때는 논다고. 이 막사를 참봉 통해서 내가 타진을 해보니 빌려줄 뜻이 있다. 거기다 솥 걸어놓고 밥도 해 먹을 수 있고, 침실도 매트리스 해가지고 침대가 좋아요. 여기 적어도 1박 2일 내지 2박 3일 정도에 지도자를 새로 발굴해가지고 군대식으로 아침에 점오도 받고, 또 체조도 하고, 시간 되면 밥 먹고 강의도 받고, 이분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교육을 통해가지고 군수님 우리가 이 추진할 새마을 가꾸기 사업계획을 접목을 시키면 상당한 발전이 안 나오겠습니까. 그러니, 좋다 한번 해봐라. 군사단장한텐 군수님이 좀 협조를 구하세요. 그 지도자 교육을 누가 시키느냐. 대학교수한테 물어봐야 사회계열의 학자들은 엉뚱 소리해요. 맞지도 않고 이 사회에 탁상공론. 학생들에게는 그게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을 해서 필요할지 몰라도. 그거 필요 없습니다. 교수들 돈 주고 할 필요 없고 내가 직접 하겠습니다. 이래서 젊은 혈기에 내가 30대 초반인데 나이가 그때 또 장가를 갔어. 32살인가 갔는데. 열심히만 하겠습니다 했는데, 그 정성이 지도자 연세 많은 분은 70대 할아버지도 있고 그랬는데 부락마다 남자 한 사람, 여자 한 사람. 490개 마을이라 500개 마을 잡더라도 천 명이지. 이런 연차적으로 하는데 4개 반을 나눠가지고 했어요, 먹고 자고 교육을 시키고. 돌아가시거든 교육받은 얘기를 마을에 전파를 하면서 올해부터 시멘트가 335대씩 정부가 온다고 얘기를 하니, 여러분 마을에 뭐가 제일 급한 사업인지 순서대로 좀 해라. 이래가지고 우선순위를 매겨가지고 가져왔는데 일차 면사무소 면장님이 부락을 가보시고 그 사람들이 하는 계획이 맞는지, 또 그게 분에 넘치는 건 아닌지, 또 더 이상 무슨 지원을 바라면 안 됩니다. 그건 다음 얘기지. 있는 것만 잘 써도 좋은데.
문. 주로 추진했던 사업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답. 이래가지고 취합을 해 보니까 상당히 사업비가 불어나요. 우선 돈은 못 줄 거면 시멘트를 더 달라고 하는 동네가 많고, 또 여기 16호 사는 조그마한 마을이 있어요. 거기도 335폰데 이걸 운반해 공짜로 줄 때 가져가라 해도 운반할 길이 없습니다. 사람이 걸어 다닐 정도의 논두렁길인데 우마차도 못 들어가고, 리어카 운반도 안 되고, 그러니까 어떤 문제가 발생 하냐면 골이 아프니까 가져가기는 가라고 하고, 이걸 운반비의 수단으로 쓰려고 시멘트를 팔아먹는 거예요. 팔아봐야 250원이라 한 포에. 돈도 안 되지. 이런 사고를 자꾸 유발하기 때문에 군수님보고 일부 수정을 해야 되겠습니다. 뭐냐. 인구가 많고 사업도 많은 곳에서 능력이 맞는다면 그건 필요한 대로 줍시다. 335가 아니라 500대가 필요하면 500대를 줍시다. 단 공사기간은 6개월뿐이다. 농한기에 하는 거니까. 지금부터 11월 달에 추수 다 하고 11월 달, 12월, 1,2,3,4 그 당시에는 모내기를 4월 달 5월 달에 안 했습니다. 6월 달 7월 달에 했거든. 잘하면 7개월까지 일 년에 사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에 잘 활용해서 하면 마무리 사업이 안 되겠습니까. 또 무리하게 한 곳에는 내년도 사업으로 이월 하더라도 자기 팀에 알맞은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선정하는 것이 귀결이다. 그 수정을 하는데 부족한 시멘트는 어떡합니까. 작은 동네 것이 남으니까 적당히 쓰도록 하고 그걸 이쪽으로 놓으면 되는데 양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군에서 그 해 건설 사업을 할 남는 예산을 별도로 시멘트 만이천포, 또 철근 12톤 정도 별도로 구입을 했습니다. 원재료를 구입을 해서 조달요청을 하니까 싸죠. 종합제철에서 나오는 철근이니까 딴 데 가져갈 것도 없고 우리는 자재 확보하기가 굉장히 좋았습니다, 영일군이. 그래서 이걸 가지고 계획의 분담대로 다시 군의 기술팀들이 나가보고 교량을 놓는다 예를 들어서. 제일 긴 철근의 길이가 8m니까 길어봐야 8m의 교량을 놓을 수 있고, 폭은 차가 다니면 4m도 돼요. 그땐 4.5톤 차가 제일 큰 거니까. 조금 더 크면 4m 50정도, 길이 8m 이러한 교량 신청이 들어온 것만 해도 1971년도 한 해 6개월 동안에 다리를 놓은 게 250개가 신청이 들어왔어요, 8m짜리가. 그리고 전체 교량이 소유 교량이 4m 이상 교량이 큰 것도 있고 여기 문성동은 126m 입니다마는 어느 정도냐 하면 520개 돼요, 영일군에. 520개 놓으면 교량 놓을 데가 없어요. 주민이 원하는 거니까 그게. 이게 큰 사업이다. 정부가 하면 돈이 엄청날 텐데. 우린 시멘트, 철근만 주면 주민들의 노력으로 모래, 자갈치고, 여자들은 모래, 자갈을 체에다가 치고, 물에 잘 씻어서 모래를 별도로 사질 않고 자기들이 만들어 쓰도록 하고. 하다가 보면 합판이 필요하죠. 교량을 한다면 위에 상판을 놓고 철근 배열을 해야 되고, 큰 다리 같으면 이중으로 철근을 놔야 됩니다. 밑에는 굵은 거, 위에는 16m, 18m 정도. 그렇게 하려니까 철근 자재비가 너무 많이 들어요. 그래서 정했습니다. 우선은 금년도는 8m 이상 다리는 안 된다. 이것만 하자. 그래서 기술자들이 나가서 필요한 철근의, 폭에 따라서 철근의 양이 결정되니까, 1.5톤 되는 데도 있고, 2톤 되는 데도 있고 맞춰가지고 그리 하도록 합시다. 이래가지고 하고 전 공무원이 당시에 숫자가 영일군에 250명이에요 군청공무원이. 마을은 500개가 되고. 그래서 한 사람이 적어도 2개 이상 마을을 지도 담당 책임을 지어야 돼요. 그래서 여러 가지 애로가 있으면 면에서 조정 위원회가 있어가지고 조정하고. 또 자재가 더 필요하다면 군의 보고를 받아가지고 우리가 또 나가보고, 아 이래선 안 되겠구나 줄게 해라. 단 여기에 필요한 부수적인 돈이 들긴 들어요, 부락에.
왜냐하면 문성동에 다리 놓을 때 어떻게 했냐면 8m 경간(a span)인데 합판이 없단 말이야. 없으니까 주민들이 부엌문이 있어요. 부엌에 삑-삑-하고 열리는 나무문 있잖아. 이걸 뗘가지고 두 개씩 붙이고. 또 구멍이 생기니까 모래, 콘크리트를 부으면 빠져버린다고 구멍 사이로. 그래서 포대를 뜯어서 위에다 깔고, 철근도 배열을 하고 철사로 묶고. 그럼 밑에 받쳐야 돼요. 다리 받침대 나무가 어디 있어. 좀 편법으로 밀식된 소나무, 마을 뒷산에 가면 나무가 많잖아. 밀식된 소나무가 적어도 직경 한 5,6cm 되는 정도의 나무를 간벌해라. 그 당시 소나무 베면 산림법이 5cm 이상은 구류입니다. 그런 건 우선 돈이 없으니까 살려고 하면 안 되니까 우리가 좀 군에서 봐주자. 군수 산하의 산림 경찰이 있어요, 수산 경찰이. 사법권을 군수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봐줘라. 그 담당 공무원 입회하에 낫 들고 톱 들고 가서 필요한 양 만큼 베가지고 밑에 받치고. 이런 철근 철판에다가 시멘튼 철근 자갈 물 부어가지고 믹스 하는 거지. 해가지고 진흙이 주룩 빠지니까 아까 이석걸씨 말씀처럼 리어카를 다 구입해서 합판으로 짜가지고 콘크리트 안 새도록, 그걸 담아가지고 아주 능률이 빨라요. 금방 해서 금방 갖다 부으니까. 하루 지내면 경간 다리는 하루 만에 완결이 되더라고. 그래서 여기는 2주 지나면 양성이 되거든요. 보름 되면 나무하고 전부 해체하지. 하면 시멘트만 덩그러니 남아있어요. 그때 쾌감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별 기술도 아닌데 다리 놓는 걸 이걸 생각을 못해서 주민들이 5천년동안 이렇게 지내왔는가. 그래서 나는 기동력이 없어서 군수님보고 오토바이를 하나 사주셨으면 좋겠다. 그땐 국산 오토바이가 나오기 전이니까 내가 공무원 출신인데 내 후배가 동촌 비행장 K2에 조종사에요. 일본 가서 비행기를 정비를 해 오는데 오면서 밀수지 나쁘게 얘기하면. 전부 분해해가지고 일본 오토바이를 가져와서 여기 와서 조립해서 타고 다니는데 국방 분과의원 국회의원들한테 걸렸어. 동촌 비행 군인들이 무슨 돈 가지고 일제 혼다 오토바이를 새 것을 타고 다니느냐. 이래서 공군 참모 총장이 혼이 나고 당장 없애라. 밀수로 가져 온거지 그걸 버리지도 못하고 있는데 나한테 연락이 왔어. 그걸 줄 테니까 할 수 있느냐. 면허장도 없는데 낸들 넘버를 어떻게 내노. 일단 줘. 아깝다. 그렇게 가지고 와서 그때는 시장, 군수가 전부 군 출신이죠. 군 출신이기 때문에 이걸 기부 채납을 해가지고 영일군 재산으로 기부 채납을 하겠다. 단 국가사업을 위해서 내가 현장을 뛰어야 되기 때문에 기동력이 없으니 나만 운전 할 수 있도록 해주십사 해서 경상북도 김인 지사가 그걸 버리려고 하니 아깝고 국가를 위해서 쓴다는데 좋다. 이래가지고 넘버가 179에요. 경북 관 179를 내가 타고 다니면서 사업 지도를 하고 했는데 문성동 시본부라고 하나 정해서 군수님이 직접 지도하는 마을로 하고, 바빠 못가시면 제가 대신 실무자니까 지도를 해서 주민들하고 머리를 맞대서 한번 해 보겠습니다. 이러니까 마침 저 이석걸씨가 패기가 대단했습니다. 그 앞에 면장도 입을 못 떼고, 사명과 신념 그런 게 뭉쳐있는 것 같은 기분이 내가 들어요. 그때 나하고 참 호흡도 맞고 그랬는데 연세도 나보다 많고, 또 경찰관 출신이고, 그래도 수준이 높은 그룹에 속하니까 의사소통이 또 되고. 또 성격이 화통해요. 저도 그런 성격이고 그래서 우리 한 번 해 봅시다. 당신은 기개면 전체 36개 부락의 자원지도자를 하시고, 문성동은 홍성표 동장, 아마 이석걸씨 하고 동갑일거에요. 그 양반을 동장 겸 지도자로 해서 한번 이상을 구현합시다. 이렇게 호흡이 맞아가지고 하는데 그럼 뭐부터 할 것이냐. 그 부락에 자면서 연달 조그마한 마을 회관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전부 모아놓고. 또 사람이 모아놓고 앉아서 자꾸 입으로만 해가지고는 화합이 안돼요. 분위기를 만들려고 막걸리도 한잔 갖다 놓고, 묵도 사다놓고 노인네들 먹도록 하고, 잘 사는 부락 얘기도 들려주면서 이렇게 하라고 하는 기회가 왔는데 이걸 못해서 되겠느냐. 여러분들은 피땀 흘려 노력만 하면 머지않아 제일가는 부촌 될 수도 있다. 여건도 되어 있다. 그런데 제가 3자 입장입니다마는 여러분과 더불어 잘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공직자로서 내 꿈은 여러분들과 같다. 이거 하는 동안은 여러분들은 저를 동네 주민으로 생각하고 제 얘기를 따라 주십시오. 해서 계율을 만들었습니다. 첫째 저 부락은 진입로가 없어요. 지금 천지개벽했지. 차가 들어가는 도로도 있잖아요. 이 도랑을 따라가지고 뱀이 기어가듯이 사람이 걸어 다닐 정도지 리어카도 없고 운반 수단이 지게밖에 없고. 길이 우선이다. 길로 놓아 놓고 보니까. 하천을 건너야 되고. 비가 오면 물이 장류수가 흘러가면 애들 학교 못가요. 이 앞에 기개 초등학교가 있는데 초등학교 못가고 집에서 지내야 되고. 소나 몰고 다니면서 소 풀 뜯어 먹이고 할 게 없어요. 그런 형편인데 길부터 내 보자. 해가지고 가운데로 길로 내도록 새끼줄 치고 5m 폭으로 기왕 하는 거 하자. 근데 땅을 내 놓을 사람이 없어요. 하고는 싶은데 왜 하필 내 땅이냐. 다행이 마침 면장님이 홍성표씨 집안의 어른인데 옛날 자유당 때 민선 면장을 했어요. 홍면장님 문전옥답이고 미나리를 키우는 밭이 있었거든? 미나리는 비 오고 나면 또 올라오잖아요. 문전옥답이지 진짜 소득도 있고. 근데 그걸 아까운 걸 이백 몇 십 평짜리를 선뜻 내 죽으면 다 소용 없을 텐데, 그래도 선견지명이 있잖아요 면장까지 지냈던 사람인데, 내가 이걸 내 놓겠다. 여러분도 같이 십시일반으로 해가지고 한번 해 보자. 이토록 면장도 군의 군수님도 도지사도 모두 응원하는 건데 논 해서 뭐하느냐. 그걸 있는 분이 내 놓기야 쉽죠. 없는 사람은 힘들죠. 그래서 설득에 설득을 거듭해서 거의 80%정도 동의를 받았습니다. 받고 일로 해야 되는데 주민들이 나와 가지고 삽을 가지고 하는데 내 생각에 이건 아니다. 좀 무리지만 강제로 80% 기공 승낙을 받았기 때문에 강제로 한 건 아니지. 밀어야 되겠다. 사단의 협조를 구해서 민사 참모한테 불도저를 대민 지원 받아가지고 저녁에 강바닥에 교량 밑에 놨단 말이야. 사람들이 이상하지 도저가 왜 와 있느냐. 씻으러 왔다 작업하다가 도저를 씻어서 부대에 간단다 내일. 그렇게 해서 새벽에 김평식 하사라고 해서 내가 지금 그 사람 이름도 안 잊어 버려요.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사는지. 그 친구보고 그래서 내가 새벽 4시에 무조건 일어나야 된다. 그럼 내가 전짓불 들고 딱 비출 테니까 도저를 속도를 내서 한번 해줘. 논두렁이 계단식이니까 경사가 져가지고 그냥 밀어버렸어요. 밀어버리고 넌 가거라. 그래서 주민들이 아침에 밥한다고 우물에 물독 이고 아주머니들 와가지고 천지개벽이 되었어. 소리가 나길래 탱크인 줄 알았더니 불도저가 밀고 가버렸다. 난리가 났어. 그래서 홍성표씨가 외가가 경주거든. 전화가 왔어. 정주사 큰일 났다. 도저 밀어버리면 안 돼. 홍성표 때려죽이라 해가지고 주민들이 처들어 오는데 경주 달려간다 이거야. 달려가거라. 맞아죽지 주민들이 갑자기 화가 나면 군중심리가 무섭잖아요. 자기들이 승낙을 해 놓고도 아깝고 설마 도로를 내겠나 했는데 도저가 밀어버렸어요. 그래서 면장님 보고 책임 져라. 갔으니까 당신이 수습을 해야 될 것 아니냐. 또 면장이 군 출신 면장이 되어서 성격이 활발하죠. 홍순락 면장님 댁에 찾아가서 선배님 살려주세요. 동장이 무슨 죄가 있느냐. 군에 정주사하고 먹고 자면서 회의를 골백번 해가지고 동의를 받아 놓은 건데 혼자 한 게 아니지 않느냐. 공감을 한다 이 말이야. “누가 시끄럽노” 한번 남자가 말이야. 주겠다고 도장까지 찍었으면 줘야 되는 거지. 내 땅 조금 아깝다고 그러면 내가 내 놓은 땅은 아무 것도 아니냐. 이래가지고 호통을 치고 난리를 쳤더니 딱 수습이 되었어요. 딱 이게 동기라. 선정 됐을 때 빨리 해 버리자. 그래서 주민들이 나와서 한 집에 한 사람 이상 나와서 양 쪽에 새끼줄 쳐 놓고 거기다 하려고 하다 보니 길은 높여야 되잖아. 성토를 해야 되지. 그래서 하천의 자갈을 갖다 해야 나중에 배수가 잘 돼요. 도로에 물이 자꾸 생기면 안 되거든. 경사가 진 도로라서. 그래서 윤곽이 잡힌 거예요. 그걸 내가 사진을, 하기 전에 도저 밀고 가버린 형태, 석축 쌓아 놓은 것, 그 다음에 성토 다 되어서 나중에 포장해서 준공한 걸 나와 두드리면서 주민들이 지금도 눈에 선해요. 문성동 고속도로 다. 그렇게 좋아하는데 어떤 아저씨 보고 당신 도장 찍어 놓고 홍성표 때려 죽인다 했느냐 하니까 지나고 보니 참 좋네요. 그래서 이게 화합을 하는 동기가 되어서 그 뒤에 농로 1600m, 또 길로 만들고 보니까 담장이 옛날에는 돌담이 피라미드식이거든. 돌담이 한 1m 60정도 높이가 있으면 이 밑은 1m가 넘습니다. 이렇게 쌓아야 되기 때문에. 내 생각에 이 담을 치워버리면 이 안에다 블록 해봐야 20전도 안 되거든. 블록 사가지고 공짜로 담 쌓아 주고, 남는 땅은 동네 안길 확장을 해야 되겠다. 해보자. 저 쪽에도 1m50, 1m50 도로가 3m가 공짜로 생긴 겁니다. 그래서 마을 일주 도로를 돌아가면서 내고 다 했어요. 그리고 부녀자들을 위해서 빨래터도 강가에 만들어서 여러 사람이 한참을 나와 가지고 이 얘기, 저 얘기, 동네 얘기, 사회 얘기, 딸 사는 얘기 오만 얘기가 다 안 나옵니까. 그런 얘기 하면서 빨래 할 수 있도록 빨래터도 만들고. 또 우물이 공동우물이거든. 비탈길에 한 서 너 개 있어요, 마을에 공동으로. 이것도 가물면 물이 없습니다. 이래서 빗물이 바로 들어가니까 이거라도 안 들어가도록 함석을 써서 위에 지붕이라도 만들고, 옛날에는 거기서 빨래를 했잖아요. 빨래 한 물이 어디로 가요. 바로 스며들면 우물에 들어가는 거에요. 그걸 또 먹어야 되고 반복이 되고. 그건 또 괜찮아요. 우물 가까이에 전부 화장실이 있다고 집집마다. 이게 물이 안 새느냐 그게 아닙니다. 김장하는 독 있잖아요, 큰 독. 큰 독을 아까워서 못 쓰니까 깨졌단 말이야. 깨진 데 시멘트를 바르고 철사로 해가지고 안무너지도록 만들어서 그런 걸 가지고 화장실로 했기 때문에 화장실에 물이 우물에 들어가서 비위생수다. 그래서 우물 세 개도 고치고. 또 아까 길 내면서 블록을 사줘서 할 때 이 부락은 요건이 좋습니다. 하천이 있으니까. 하천은 전부 모래거든, 자갈이고. 모래, 자갈이 쉬웠기 때문에 다른 부락보다도 환경 개선 사업이 제일 빨리 안 되었느냐 저는 그런 생각을 하고. 또 하나는 효과적으로 효과를 극대하기 위해서는 산비탈이 경사이기 때문에 사진 찍기가 좋아. 여기 카메라도 계시지만 사진 찍기가 좋거든 다 눈에 들어오니까. 그런 여러 가지로 봐서 내가 모범 부락 군수 담당 부락으로 정해서 군수님이 바빠서 못 나오시니까 내가 대신 해서 나와 가지고, 제일 또 앞서가고 잘 하니까 지사가 소문을 듣고 헬기를 타고 2군 사령관, 정보부 소장, 신문사장, 이런 기관장을 데리고 와서 주민이 일하는데 격려도 해주고 필요한 게 뭐냐. 이러니까 신바람이 나도록 했죠. 그렇게 했는데 그걸 함으로 해서 봄이 되었단 말이야 마무리를 할 때 봄이 되었는데 모내기도 해야 되고, 나와서 일 할 수 있는 시간도 없죠. 없지만 그걸 반으로 나눠서 일은 마무리 할 때까지 해야지 여기서 끝내면 안 된다, 그래서 했는데 횃불을 들고 콘크리트도 치고 눈물 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감동이죠. 저도 홍성표도 한때 부락에 잘 못 갔습니다. 길 때문에. 나중에 그 분들이 정주사는 왜 안 오나. 오라고 해라. 우리가 잘못했지, 그 사람이 무슨 죄가 있나. 동장도 한번 갑시다. 열심히 일 하자. 이제 여러분이 시킨 대로 할 게. 이래서 욕심이 나서 자꾸 했는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시멘트 335포 플러스 철근 1톤이 얼마냐. 그 당시 시가로 9만 8천원입니다. 거기다 운반비, 철근하고 이걸 개인별로 하려고 하면 트럭 운반비가 비싸니까. 또는 군에서 일괄로 지원을 해서 통운차는 안가는 데가 없거든. 빨간 차 있잖아. 통운차에다 계약을 하면 아주 싸게 할 수가 있었어요. 거기 만 2천원 지원이 돼서 11만원 지원을 해 줬는데 문성동은 일을 얼마나 했느냐, 57가지 사업에, 지붕 개량도 들어갑니다, 57가지 사업에 580만원어치. 10만원 대 580, 58배의 일을 더 했단 말이야. 우리가 준 것은 시멘트랑 철근뿐이라. 그럼 그 사람들이 노임도 평균 노임, 일반 노임으로 정부 단가로 계산해서 그렇다는 얘긴데, 이렇게 해서 8월 5일날 경제동향보고 석상에 군수님이 보고를 하니까 대통령께서 불 켜라. 캄캄한데 슬라이드로 보고를 하는데 불 켜라. 켜니까 얘기를 합니다. 지금 한 지도자, 한 공무원의 생각, 한 군수의 결심, 이것이 60호 사는 홍씨 마을을 대동단결해서 협동, 화합, 자립, 자조, 좋다고 하는 얘기는 다 갖다 한 거지만 이게 두레라고 이조시대, 삼국시대에도 있었거든 품앗이는 그게 발전 된 거다. 머리를 잘 쓰니까 이렇게 발전 안 하나. 58배 발전이라는 것은 지금 몇년만 있으면 그 곳은 신흥 부촌이 된다는 거야. 그리고 문성동이 그냥 환경 개선만 한 게 아니고 동장이 재대하고 나와 가지고 하천 부지를 빌려가지고 공동 모금을 그때부터 만들었고, 그런 씨앗이 커져가지고 양수장을 만들어서 쌀밥을 먹게 되니 지도자가 시키는 대로 하니까 이게 성공을 했구나. 그 기초를 다져놓는데 시멘트 335포를 주고, 환경개선 사업이 알파가 되니 저런 훌륭한 모범 부락을 만드는 게 아니냐. 거짓말 하면 안돼 박군수. 내 한 달 내로 문성동을 방문하겠다. 이래서 8월 5일 경제동향보고 석상에 우리가 처음으로 했데 보따리를 들고 보고를 하고 군수하고 저하고 올라가서 있었어요. 여관에 있는데 자꾸 높은 사람들이 찾아와. 행정실장이라는 사람이 오고, 농산부 장관이 오고, 수산청에서 오고, 그 사람들이 왜 오느냐. 우리 환경사업은 내무부에서 보고 각하한테 보고하도록 되어 있는데 왜 너희가 오느냐 물으니까 거기도 있거든 그 속에 소득이 내가 같이 해 온 게 있잖아요 과거. 땅 개간 해가지고 공동 작업을 해서 소득을 부락에 저축을 하고, 그게 나중에 새마을 사업을 할 때 유용하게 쓰였습니다. 교량 놓고 하는데 판때기가 어디 있나. 부엌문을 가지고 할 판인데. 그러니까 그걸 사가지고 합판 교량 끝나고 나면 버립니까. 까만 칠 해서 놓았다가 또 일 할 때 쓰는 거 아니요. 여러 차례 쓰거든. 그런 걸 생각할 때 주민들의 생각과 이런 걸 전부 해서 하는데 내가 생각할 때는 아마 이게 사기를 북돋우고 정신적인 쇼크를 많이 준 게 이석걸 면지도자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해요. 나는 바쁘니까 매일 여기 있지를 못하잖아요. 이틀에 한번 이렇게 와서 일을 했고. 저 양반은 자기 집이 여기니까 오토바이 하나 사가지고 그러고 다니다가 밤에 논에 차가 끼어가지고 재미난 일화도 있습니다. 그래도 얼굴이 이만하길 다행입니다. 좋은 일 하니까 그렇죠. 그래서 내가 죽는 둥 사는 둥 있는데 미꾸라지가 귀에 들어가서 ‘이석걸씨 빨리 일어나세요. 일어나서 계몽하러 가야지 논에 누워 있으면 어떡하느냐’ 그렇게 논에 자빠져 있었으면 죽었지. 그런 일화도 있습니다. 그게 밝아오는 새 농촌 8m 영화에 국립 영화제에서 만들어가지고 주면서, 촬영기가 없잖아. 활동 사진기가 없단 말이야. 농촌에. 그러니까 대통령께서 이걸 사라. 사서 전부 전국 시, 군에 보급을 하고 그래서 계몽을 하고 그랬는데 8월 5일 경제동향보고 처음으로 할 때 저는 들어가서 슬라이드를 만지고, 대통령은 여기에 계시고, 군수님은 앞에서 슬라이드 자막에 캄캄합니다. 얼굴 보이지도 않아요. 이런 지휘봉 가지고 설명을 하고 그러는데 이걸 하기 전에 장관께 보여야 되고, 장관이 OK하면 부총리께 또 보여야 되고, 이런 절차가 되는데 저희한테 얘기를 함부로 하지. 저녁에 와서 바꿔오라 하고, 화면을 자기들 좋은 대로 바꿔라 이거라. 우린 뭐 그런 줄 알지 촌사람이 되어서. 이거 아니다. 한 일주일 있는데 바꿔 놓은 것 또 와서 잔소리 하고, 또 장관이 와서 내일 보고 어떻게 되는지 한번 봐야 되겠다. 그래서 또 들고 가서 장관실에서 안합니까. 주눅이 들어가지고 못하겠어. 내가 열불이 터지는 거야. 군수님은 오죽하겠나 싶어서 내가 한 잔 고생했다고 술사더라고 지방 국장이. 그 양반 보고 그랬어. 군수는 벼슬이 높으니 모르겠지마는 나야 행정 중사인데 군수가 임명하는 거지 장관, 도지사 겁나는 것도 없고, 박대통령이 보리밥 먹고 싶다고 한다고 있는 그대로 보고를 하라고 하는데 갖다 놓으니 자장면을 만들고 앉았고, 관련도 없는 농촌 지도소장이 난리고, 농산부 장관이 어떻고 그 얘기를 다 들으면 시나리오가 깨지고 아무 것도 안 되는데, 난 그런 거짓말 보고 할 거면 난 안 한다 집에 간다. 그리고 이튿날 여관을 옮겼어요.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덕수궁 돌담 밑인데 환성호텔이라고 내 이름이 환성이야. 군수님한테 내 이름하고 똑같은 호텔인데 이리로 옮깁시다. 호텔도 삼류급이 가격이 싸더라고. 그래서 제일 꼭대기 층에 7층에다가 여관에 들어가면 적잖아 사람 이름. 그때 간첩도 많이 할 때니까. 그 주인보고 그랬어. 나 공무원 보이고 나 공무원인데 여긴 군수 영감이고, 한 2,3일 있는데 그 좀 적지 맙시다. 인검(검문) 오고 뭐 하면 우리가 일을 못합니다. 그러니까 주인이 인검 오면 책임지세요. 책임지겠다고. 그리고 숨어 있었는데 이 양반이 치안본부장을 불러가지고 영일 군수하고 같이 온 사람 찾아라. 그래서 덥석 붙들렸어. 파출소장이 와가지고 하니까 어떡해. 적으면 귀찮아서 일 하느라고 적지 말라고 그랬지 주인은 아무 죄도 없습니다. 처벌을 하려면 군수하고 날 처벌하라고. 내용을 보니 처벌할 형편도 아니거든. 그래서 농산부 장관도 양해를 구하더만, 그렇게 하자고 한 건 아닌데 잘 해보자고, 각하한테 보고 하는거 여러 가지 이어가지고 잘 해보자고 하는 거지 그런 거 아니라고, 아니긴 뭐가 아니라고, 거기 뭣도 없는데 무슨 고기 피우고 그따위 소리나 하고 난 절대 못한다고. 밑에 사람들 얘기 들으면 안돼요 장관. 내가 무슨 용기가 났는지 막 싸우고 그랬다고. 그러니까 보자고 안 할 테니까 그대로 보고 하세요. 근데 시간은 엄수해 달라. 왜, 이와 같은 내용을 각하께 전달이 돼서 본인이 공감을 하도록 하려고 하면 필요한 만큼 시간이 필요하잖아. 화면도 그렇게 만들어야 되고. 근데 각하가 바쁜 어른이기 때문에 25분짜리로 해라. 나는 25분짜리는 못합니다. 그러려면 당신들이 하세요. 난 간다. 나와 보니 경호하는 사람이 얼마나 날 꾸지람을 하는지, 그러면 가도 뭐하고 어디서 뵙기 뭐하니 우리 군수가 달래더라고. 정주사 당신 화내는 것 보다 내가 속에 열불이 더 난다. 그래도 잘해보자고 하는 뜻으로 갔다고 하니 이해를 하고 기회 온 거 우리 군민을 위해서라도 참고 각하한테 보고나 마치고 가자. 그러니 내가 꼼짝도 못하고 인해장막에 가려가지고 박대통령도 불쌍합니다. 그 한마디 내뱉고 같이 했습니다. 우리가 하는 경제동향보고에 고속도로 닦는 얘기도 나오고 여러 가지 새로운 사업들 하는데 나와요. 사업이 다 끝나고 불을 켜면서 대통령이 90분에 걸쳐서 얘기하는 게 있습니다. 소감. 그걸 내가 테이프 큰 거 있잖아요. 옛날 녹음 테이프 두 개를 사가지고 녹음을 해 달라고 했거든. 옆방에서 녹음을 했어요. 내가 들어보니 대통령 목소리가 카랑카랑 했잖아요. 이걸 내가 녹음을 안해 가지고 왔으면 아무도 이 감정을 모를 텐데 녹음의 내용이 그겁니다. 중요한 게. 나밖에 정의를 못합니다. 그 테이프도 영일군에서 통합되면서 없애버렸어요. 근데 아까 준 책 있죠, 말미에 보면 해놨습니다. 영일군수가 보고하는 문성동 성공사례는 우리나라 5천년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열쇠다. 내가 혁명 나고 군인출신이 돼서 무슨 잘 살아보자고 애먼 걸 하고 그런데 다 실패고 시행착오가 많더라. 호주 목장도 해석해보니 250억 일 년에 적자라. 초지 만드는 게 쉬운 게 아니라 백 년이 걸려. 그래서 경제동향보고의 결과는 그렇습니다. 박대통령께서 90분 중에 ‘지금 다리 놓는 게 나오는데 저 다리가 8m짜리냐.’ ‘그렇습니다.’ ‘사진 효과가 카메라 앵글에 따라서 길게도 보이고, 좁게도 보이고, 작게도 보이고, 크게도 보이고, 클로즈업 하면 크게 보이고 시각적인 차이가 있지 전부 8m짜리입니다.’ ‘나는 옛날에 초등학교 다닐 때 구미보통학교에 책보자기를 옆으로 둘러매고 갔다가 저학년이기 때문에 오전 수업을 받고 집에 가라고 한단 말이야. 오다보니까 소나기를 맞아가지고 소나기가 얼마나 오는지 집에 와보면 상모동 자기 동네 들어가는 좁은 개천이 있어요. 개천에 위에 외나무다리를 놨는데 물이 범람하니까 떠내려가 버렸어요. 건너편에 가면 자기 집인데 보면서도 못가고 돌아서서 구미에 이모 집에 친구 집에 잔 기억이 있는데 외나무다린데 말이죠. 3m도 안 되는. 이게 지금 군민들이 놓은 다리가 8m인데 이건 미츠비시나 큰 회사 토목회사만 할 수 있는 전용물인 줄 알았는데 오늘 기개면민들이 동민들이 하는 걸 봐. 시멘트 놓고 부엌문 뗘다가 밑에 소나무 놔가지고 시멘트, 모래, 자갈 섞어가지고 얹어놓고 보름 후에 뗘보니까 모양은 매끄럽지 못하지만 교량이 돼서 아까 4톤 차가 지나가네. 이게 발상의 전환이다. 이렇게 하면 되는데 꼭 관공서보고, 군수보고, 나라보고 다리를 놓아 달라. 그리고 놀란 게 영일군에서 252개의 8m짜리 다리를 6개월만에 놓았다고 하는데 이걸 어떻게 생각하느냐.’ 참여하고 보시는 분들이 누구냐하면 옛날 공화당 국회의원들, 또 각 분과의원의 간부들, 그 다음에 장관들, 최하가 장관, 국회의원이야. ‘여러분 눈으로 지금 보고 있잖아. 사진이잖아 사진. 소감이 어떤지 몰라도 나는 참 감개무량하다. 오늘에야 우리나라 조국 근대화의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는 해답을 내가 오늘 영일 군민, 군수께 받았다. 저런 식으로 해나가면 영일군에 전체 교량이 몇 개에요?’ ‘550개 됩니다.’ ‘반을 했네 반을, 6개월에 250개를 놨으니 내년에 하면 다리 놓을 게 없네.‘ ‘큰 게 남아있죠’. ‘큰 거야 당신들이 주민들보고 하라고 하면 안 되지. 그리고 또 광역권 사업 교량이라 해가지고 12개 놨다고 하는 게 있는데 그건 뭘 얘기합니까.’ 군수보고 질문을 하더라고. 군수영감이 아까 성개다리 얘기를 한 게 126m인데 그걸 어떤 식으로 놨냐면 이 양반이 공병 중령 출신인데 보통사람 같으면 그걸 생각도 못해요. 전봇대 있잖아요 철근 콘크리트 전봇대. 기초 박는 파이프라고 하는데 연필처럼 뾰족하게 되어 있는 큰 걸 박아서 쾅쾅 때려 누르면 이제 자갈 속에는 들어가는데 저 밑에 암반에 받히면 더 이상 안 들어가요. 안 들어가면 위에 필요한 만큼 잘라서 그걸 깨면 안에 철근이 들어있잖아. 두 개를 세워서 철근 옆으로 해서 철근이 나와 있으니까 횡으로 철근을 사각형으로 조립을 해서 합판을 붙여서 콘크리트 친단 말이야. 그럼 디귿자가 되요. 교량 상판이 되는 거죠. 교대가 되는 거지. 여기다가 이런 식으로 계속 연결을 하면 교량이 돼요. 바로 그런 공법인데,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군수가 하긴 해야 되겠고, 자재는 들어가잖아 시멘트하고. 지원은 했지만 주민 힘으로 노력으로 하는 건데 이걸 그래도 설계라도 대충 해라 그래서 도장 찍어라 사업비가 들어간 거니까. 아무도 토목계 직원이고 담당자고 건설과장이고 도장 안 찍으려고 해. 이런 공법은 없기 때문에 나중에 무너져버리면 책임 못 집니다. 그래서 내가 올라갔더니 자네하고 나하고 형식은 갖춰야 되니까 둘이 도장 찍자. 그럽시다. 그러니 날 보고 자제는 왜 찍나. 군수영감 책임지는데 낸들 못 찍을 게 뭐 있습니까. 넘어가진 않겠습니까. 서로 붙들고 있는 인장력에 당기고 밀고 하는 게 있고, 파이프가 차가 지나가면 들썩거리더라도 더 밑엔 안 들어간다 암반이기 때문에. 자갈을 많이 빼버리면 무너질 가망이 있지. 아무 관계없다. 하자. 이렇게 해서 9개나 나왔거든요. 다 100m 넘습니다. 얼마 전까지도 버스가 다니고 차가 다니고 했어요. 언젠가 서울에 무슨 다리입니까 한강다리 무너졌죠. 성수대교? 무너졌잖아요. 그 다음에 지방에 위험한 다리는 전부 새로 해라. 그때 없어졌습니다. 10년 20년 썼습니다. 이 문성다리도 얼마 전에 태풍 때 날아 가가지고 나는 이걸 두자고 했거든. 상징적으로 새마을의 주민들이 이런 식으로 옛날에 일을 했다는 것을 교육적으로 두고, 그 옆에다 새로 놔주면 될 것 아니냐. 난 그걸 원했는데 쓸데없이 보기 싫다고 없앤단 말이야. 역사라고 하는 것은 나쁜 것도 역사고 좋은 것도 역산데 버리면 안돼요. 지금 있으면 와가지고 누구든지 아 그때 주민들이 놨구나 이렇게 생각할 텐데 그 중력식 교량이죠 이건. 파이프로 못 박고 주민들이 하는 거니까. 물은 흘러가잖아요. 반은 하천을 막아가지고 물을 저리로 돌리고 이쪽은 물이 안 흘러가는 곳에는 구덩이를 파는데 사람 인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불도저를 지원받아서 아주 깊게 장비로서 팔 수 있는 만큼 팠어요. 1m 50은 넘을 거야. 팠는데 밑에 암반까지는 못 파거든. 암반부터는 동그랗게 잡고 밑에 들어가면서 안으로 자갈을 끌어올려야 되는데 이건 못하니까 그걸 다 수중 콘크리트를 치는 거야. 물속에. 쳐가지고 거기서 기초를 올려가지고 똑같이 땅속에 묻히는 자리니까 이렇게 다리를 놨는데 태풍에 물이 많이 오니까 물살이 세잖아요. 세면 물이 이렇게 흐르면 이쪽이 파진다고. 이쪽이 파지니까 이게 한쪽으로 삐딱하게 넘어가는 거야. 다리가 경사가 졌는데 차가 못 가잖아요. 그래서 위험하다고 뜯어버렸거든. 다 그런 공법이니까 만일 계속해서 태풍이 온다고 하면 그걸 견디지를 못해요. 어차피 새로 놓는 게 맞긴 맞지만 그 당시에는 그래도 큰 힘입니다, 주민들의. 횃불로 들고 밤낮없이 12시까지 일을 하고 부녀자들이 머리에 이고 저녁을 가져오고 배가 고프니까 수제비를 끓여오고, 감동을 일로 말할 수 없는데 아마 40년 세월이 흘렀네요. 그것을 대통령은 앞으로 이 사업은 계속 추진하게. 이거 말고 큰 다리 놓고 할 경우가 있잖아요. 이 다리를 건너서 혜택 보는 몇 개 마을. 1개 마을이 아니고 2개 또는 3개 마을이 합쳐서 하는 광역권 사업. 규모가 크게. 그때는 지원도 많이 해 주죠. 이런 식으로 해 나가면 국가 예산도 절약이 되고, 근대화도 빨리 되고, 새마을 정신이라고 해도 좋고 3.1운동 정신이라고 해도 좋은데 우리 민족의 끈끈한 공동체 의식이 있다는 거야. 이런 걸 나는 새마을 운동이라 하고 싶다. 새마을 정신이라 하고 싶다. 그 내용을 말씀을 해요. 그 후에 그대로 실천이 되고 했는데 그걸 하시면서 현지에 오시겠다는 말씀은 내가 자고 나도 아무리 생각을 해도 뾰족한 방법이 없었는데 오늘 군수가 보고를 해 준걸 보고 내가 잠이 안 온다. 하루 빨리 가고 싶으니까 1개월 내에 내가 간다. 그게 8월 5일 날 보고를 하고 9월 17일 날 날을 잡아서 오셨는데 헬기가 날아온다고 하니 비행장도 없고 학교 아이들 공부하는데 운동장에 내릴 수도 없고. 또 내가 공군 출신이니까 해병대 항공 참모하고 현지답사를 와가지고 이걸 어떻게 하면 좋겠나. 헬기가 프로펠러가 피칭을 할 때 부력 때문에 먼지가 나고 자갈, 모래가 날아가니 이걸 정리만 하면 헬기가 앉을 수 있습니다. 그것 좀 해줘. 그래서 거기서 공병대가 나와 가지고 찰흙 있잖아요. 옹기 만드는 논에. 쪼대라고 합니다 경상도 말로. 그 흙을 갖다가 대충 깔고 롤러로 밀어대니까 압력이 증가해가지고 자갈 속에 흙이 들어간단 말이야. 가만히 놓아 놓으니까 햇볕에 수분 증발하고 말라가지고 아스팔트 같아. 단단하고 바람 아무리 불어봐야 날아가지도 않아. 서로서로 붙어가지고. 그래서 H자 네 개를 만들고 하천에 내려서 동네로 올라가는데 도시에서 차를 갖다놓고 각하 여기 타십시오 하니까, 동네 보러 왔는데 차타고 어디 갈 데가 있다고 치우라고. 그럼 걸어가시라고. 가다가 보니 농로에 어린 아이들이 아버지 엄마는 밤낮으로 다리공사하고 새마을공사 한다고 이렇게 하는데 그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가르친 것도 아니에요. 하천에 가서 코스모스 씨를 훑어가지고 그걸 갖다가 모종을 했어. 모종을 올라오는 걸 이식을 한 거야. 코스모스고 나락이고 식물에 이식을 하면 배로 커집니다. 꽃도 크고 국화도 이식을 하면 이런 꽃이 나오고 그냥 갖다 올라오면 작은 꽃이 나오는데. 그걸 심어놓아서 하늘색, 연붉은 분홍색. 코스모스가 한들한들 하잖아요. 그게 양 켠에 넓은 들에 황금 들판인데 각하가 감동을 해. 이게 전에 사진에 나왔던 좁쌀 심고 하던 밭인데 이게 논이 되었느냐. 그렇습니다. 논이 16정보. 그래서 불도저 엔진 가지고 승합시켜서 저 위에까지 32정보를 수리안전답을 하니 강 건너 부락이 여러 개 있어요, 섬처럼. 쌀밥 먹는 동네는 문성동 보입니다. 돈이 있으니 한단 말이야. 또 그게 못하는 경우는 아까처럼 누에를 쳤는데 그 당시에는 농상부에서 누에 보급을 많이 했어요. 뽕나무로 해야 되잖아. 뽕나무를 농민들이 거부반응이 심했어요. 그래서 강제적으로 도에서 심고 남은 뽕나무를 김덕엽 도지사님한테 군수님이 다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12정보를 천수답에 물이 안 올라가니까 거기다 뽕나무를 심은 거에요. 원잠조예라고 누에 종자를 만드는 회사, 경주에 있습니다. 거기에 자매결연을 해서 기술 지도를 해줘서 원잠종은 굉장히 비싸거든? 그걸 하려면 누에 튼튼한 놈을 골라서 한단 말이야. 그걸 문성동에서 해라. 그래서 등급이 있죠, 누에고치가 굻고 실 많이 나오고 실 하나 길이가 얼만지 알아요? 2km입니다 1등급은. 누에 실로 뽑으면 고치 하나가 1km가 되요 엄청나게 많이 나와요. 이걸 팔면 5만 5천원이에요. 1등급이 한잠, 누에 한잠 하면 요만한데 이게 좁쌀처럼 씨앗이 있어요. 이게 누에가 되면 이걸 키우면 누에고치 값이 정부 수매로 5만 5천원이라. 5만원을 주면 세 칸짜리 초가지붕을 이을 수 있는 시멘트 값이야. 그걸 가을에 잘 키워가지고 한잠만 먹이면 되는 것인데 아래채가 있으면 두잠 먹이면 되거든. 어려운 것도 아니야. 공동으로 먹이고 그렇게 합시다. 그래서 뽕나무를 심어서 그 소득 가지고 지붕개량은 딴 데 없는데 환경 개선 사업이 가꾸기 사업이야. 지붕개량을 했다고. 처음에는 하고 싶은 사람만 해라. 신청이 잘 안 들어와. 열 두채 밖에 안 들어와. 전체가 115동인데. 그래가지고 이걸 했는데, 한국 슬레이트 김인덕 회장이라고 그 양반이 각하 온다고 하니 자기 슬레이트를 팔아먹었단 말이야. 잘하면 큰 사업이 되겠거든 전국에 농어촌에 초가집이 얼마나 많아요. 그걸 슬레이트로 바꾼다고 하면 자기는 돈방석에 앉는거야. 그래서 왔길래 회장님 내가 돈 버는 방법을 가르쳐 드렸는데 제 얘기를 하나 들어 주세요. 보기 싫어 그러는데 여기다가 색깔을 먹일 수 있는 것을 한번 연구 해 주시면 이게 알칼리성이야. 석면도 들어가요. 요새 같으면 슬레이트 안하지. 인체에 나쁘고 발암물질이라고 농민들도 펄쩍 뛸 텐데. 그땐 모를 때니까 싸고 초가집을 안지어도 좋고 집은 또 팔면 되거든. 양송이 재배해서 월남 전쟁이 터졌으니 군납을 많이 하는데 양송이 재배 회사가 큰 게 있었어요. 짚이 없어서 못하는 거야. 부토를 만들려면 짚을 썩혀야 돼. 그래야 양송이가 뻗어나니까. 초가집은 짚이 엄청나게 들어가는데 인건비하고 짚을 파는거야. 팔아가지고 농가 소득에 보태 쓰고, 대신 슬레이트 이고, 보기 좋고 위생적이고, 거기다가 칼라를 좀 해 주십시오. 내가 다른 노루표 대리점을 우리 후배가 했는데 칠 한번 해봐라. 칠하니까 여름에 비가 오니까 습기 차서 발라 놨던 게 뜨는 거야. 아주 엷게 떨어져 버려요, 바람 불면. 보기 싫어요. 근데 이게 알칼리성이니까 중화를 해서 화공약품 여기서 만들어서 장사하면 돈 된다. 이 양반이 만든 걸 슬레코드라고 하는 걸 만들었잖아. 색깔은 어떤 게 필요합니까. 옐로, 연분홍, 연초록, 블루스카이, 5종을 만든 거야. 그래서 실로 멀리서 내가 보고 지그재그로 모자이크를 했지. 이건 노란 거, 파란 거. 이걸 해가지고 대통령이 보시면서 지붕개량이 이런 데가 어디 있나. 아주 아름답다. 그래서 그게 시발이 된 거야 지붕개량의.
문. 그 외에 생각나는 사업이 있으시면 한두 가지 더 말씀 해 주세요.
답. 내무부 지침에 일차 언급 했지만 환경개선사업이거든. 나무를 친다. 우물을 비 안 맞게 깨끗하게 한다. 빨래터를 해서 부녀자들의 편의를 제공한다. 길을 내서 농사를 편하게 짓도록 리어카 보급도 하고, 또 초가지붕 슬레이트로 바꾸면서 기왕이면 아름답게,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있는 나라니까 모자이크식으로 빨갛고 새파랗고 고운 색깔을 들여서 자연환경이 참 아름답고 살고 싶다, 나의 살던 고향은, 그런 꿈동산을 만드는 게 꿈이라고 생각한다면 아까 얘기처럼 그것만 해가지고 사는 것도 아니고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하지만 소득이 없으면 아무 생활에 변화가 없다 이거야. 그래서 양식도 쌀 못 먹는 집이 천지고, 조밥을 먹고, 또 비가 안오면 포기를 하는 이런 국민이 되어선 안 되겠다. 그래서 이차적인 새마을 사업은 환경개선 플러스 소득, 여기에 치중을 해야 되는데 문성동은 쌀밥 먹기 운동으로 자체적으로 새마을 운동 이전에 동장이 스스로 주민들하고 해가지고 양수장을 1단계, 2단계 사업을 해서 36정보를 수리안전답을 하고, 나머지 물이 못가는 개간이 필요한 지역은 뽕나무를 심어서 농외소득을 하면서 또 군에 갔다 온 젊은 친구들이 양계사업을 추진해서 새로운 계사, 게이지식 입체적으로 2층, 3층 해서 닭을 키울 수 있고, 계란을 놓으면 굴러와서 별도로 수집이 되는, 또 공동 사료 구입도 하고, 이런 걸 육천수를 키워가지고 확장시켰고. 또 이 사람들 소득은 불모지 개간을 해서 논도 만들고, 밭도 만들고, 공동 마을 기금을 조성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 이었다. 이렇게 결론을 짓고. 제일 큰 소득은 주민들의 생각입니다. 발상의 전환. 전에는 노름을 하고 6개월간 술이나 마시고, 오죽했으면 이석걸 지도자가 얘기한 것처럼 노름을 하지 말자. 부지런하자. 새벽에 일어나서 마을길도 쓸고, 잡초도 뽑고, 들에 가서 열심히 농사도 짓고 이런 국민이 된다면 나쁜 짓은 안 할 거 아니냐.
문. 사업추진 할 때 제일 어려웠던 점이나 시행착오는 없었는지?
답. 그래서 문성동은 아시다시피 소득하고 연계된 사업이 계속 되어서 지금까지도 소득이 상당히 높습니다. 환경계에서는 손 안댈 정도로 또 잘 되어있고. 또 잘 되어 있으니까 손님들이 많이 오잖아요. 체면도 있고 하니까 저절로 되는 거 같아요, 지금은. 이제 문성동을 계기로 8월 5일 대통령께 보고를 하면서 앞으로 추진 발전 방향에 대해서 내가 피력을 했습니다. 뭐냐면 아까처럼 환경도 되었고, 소득도 연계가 되었고, 이런데 어머님들이 십시일반으로 아침밥을 할 때 쌀을 한 술씩만 덜어내는 거에요. 그래서 저축을 시켜요 절미저축. 이게 모아져서 개인으로는 얼마 안 되지만 일 년 모아노면 동네에서 몇 가마니씩 되요. 이걸 팔아서 요새 마을금고의 전신입니다. 마을금고 자금으로 출자를 해서 문성동에도 있고 기계 마을금고도 있습니다만 이게 커지기 시작해서 36개 부락이 모여서 기계마을금고, 완전히 은행입니다. 규모도 크고, 포항 같은 데는 자금이 1조가 되는 데도 있고, 수천만 원 되는 데도 있고 몇 억 되는 데도 있습니다. 그와 같이 마을금고, 농촌 경제 아닙니까. 은행에 가면 담보해라, 보증서라. 농민들 어렵죠. 자기들 출자해서 만들어 놓은 거니까 또 신용 대출도 가능한 것이고. 또 돈을 가지러 농협 밖에 없는데 이것이 경쟁이 되잖아요. 경쟁이 되니까 이율도 싸고, 신용확대도 되고, 주민들 생활에 큰 도움이 되죠. 그 다음에 청소년 애들이 아버지 엄마가 하는 동네 발전 그런 걸 보면서 그게 산 공부거든요. 우리도 뭐 좀 하자. 알아야 된다. 조그마한 독서실을 운영해요. 마을문고 운영해서 외지에 뜻있는 분들한테 우리 문고도서관을 해놓았으니 책 좀 보내주세요. 하면 받아가지고 보내고. 또 어린이들 사이치 활동을 통해서 꽃동산을 만들어요. 마을 기념관 주위에 꽃도 심고 나무도 조경하고 하는 것이 젊은 애들이 합니다. 전체가 교육자여야 되죠. 선진국의 모델인데 하나만 잘 해가지고 되는 게 아니고. 그 다음에 농촌이 잘 되니까 도시도 잘 되어야 돼. 그래서 도시 새마을 운동. 그건 농촌하고 다르죠. 거긴 환경이 다 되어있고. 도로가 다 되어 있고, 인도가 있는데. 근데 하는 건 뭐냐, 거리에 떨어져 있는 쓰레기 뭐 인부들도 있죠, 청소부들도 있지마는 그 쓰레기를 줍는다든지, 길 안내를 친절하게 한다든지, 필요한 간판을 단다든지. 또 공장지대는 이와 같이 마을금고 하듯이 상호 부조, 금고를 만들어서 종업원들한테 자기 페이스의 1%씩 낸다든가, 내는 건 적죠. 한 달에 돈 만원씩 떼고, 나머지 돈은 회사가 대라. 출자해서 만들면 자기 돈 그대로 있거든 남 주는 것도 아니고, 돈 거래가 은행처럼 커지면 거기 종사하는 종업원들이 시골 아이들이 옛날에는 많았지만 오빠 장가간다, 시집간다 할 때 큰돈이 되잖아요. 어디 가서 빌릴 데도 힘들고. 그 자체 자기들이 열어 놓은 금고에서, 시집가는데 빌려줘라. 돈 천만 원 든다. 그럼 빌려주고. 또 황소 한 마리 사세요 하고 딸이 아버지한테 시골 와서 노후가 큰 자신이니까. 그렇게 할 수도 있고 이런 게 발전한다고 내가 보고를 했는데 사실 그대로 되었어요. 사실 중앙 정부 내무부에 새마을과가 생기고 이럴 때 이 분들이 내가 영일군에 있을 때 산 경험을 배우려고 여기 와서 보름씩 있고, 갔다가 내려오기도 하고. 그래서 내가 아이디어라 하는 걸 만들어서 파생되어서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다 줬어요. 자연보호도 그때 나왔습니다. 자연보호도 시골에 가면 자연보호 영사라든가 국립공원이라든가 이런 데 가면 요즘도 쓰레기 버리는 데가 많죠? 이거 못하도록 간판도 써 붙이고, 이게 발전 되어서 자연보호 헌장까지 국가가 앞장서서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가지고 상당히 새마을 운동이 우리 민족 발전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자타가 공인을 합니다. 하고 이걸 관변단체가 새마을 협의회가,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때는 이건 지원도 안 해주고 봉사단체인데 누가 되었든 간에 앞으로 이런 것은 국가 발전을 위해서 좀 잘.
문. 사업을 추진하면서 관변단체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답. 새마을운동은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게 없어서는 안 되죠. 자꾸 발전을 시켜야지. 옛날식으로 해서는 안 되겠지만. 전부 자기 좋은 대로 하는 거야. 표에 의식에서. 김대중 정부 같은 사람들은 새마을 운동을 활용하면 되잖아요. 내가 있을 땐 그 전의 대통령이 했기 때문에 싫다, 그래서 한 것이 바르게살기. 바르게살기는 일부분이에요, 새마을 운동 전체 속에서 내가 볼 때는, 해 놓은 것도 없어요. 감투만 두르고 나와서 정부 세금을 준단 말이에요. 새마을 운동 관변 단체다. 이것은 자기 표가 있는 놈이 한 놈도 없다. 이렇게 막연하게 정해가지고 지원이 하나도 없어요. 형식만 되어있고. 새마을 지도자가 동네마다 있죠. 누가 새마을 지도자인지도 몰라요. 옛날엔 어떻게 했느냐. 처음에는 시작할 때 관변단체. 누가 동네에서 제일 똑똑하나. 누가 잘 봉사할 것인가. 안 하려고 하면 억지로 끌어내가지고 교육도 시키고 이래가지고 지도자를 양성을 했는데 요즘엔 민간단체로 넘어갔잖아요. 새마을 연수도 같은 맥락이고. 넘어갔으니까 자율적으로 하는 게 제일 민주국가에서는 효과가 있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그래야지 튼튼한 바탕 위에서 기초 위에서 집을 지어야 백 채고 이백 채고 안 무너지지, 그렇잖아요. 이건 딱 갈라서 적이다, 하면 지원 없애버리는 거야. 쓸데없는 데 돈 주고. 지금 데모하는 사람들 봐요. 북 핵 찬양하고 하는 데 돈을 주잖아. 주니까 그 사람들이 돈 쓸데가 어디 있어요. 촛불 사는 데 쓰고, 엄한 데 다 쓰지. 돈 없으면 그거 못 해요. 나는 이게 참 답답하다는 얘기라. 우리는 죽으면 그만이지만 앞으로 우리 민족이 대대로 귀여운 손자 손녀들 세대에 선진국이 되려면 남의 잘못한 것 잘 한 것도 역사에 없애서는 안 되지. 가지고 반성을 하고 숙연한 마음으로 그때 이런 걸 잘 했으면 우리 민족이 빨리 성장을 했을 텐데. 이걸 느낄 수 있도록 해 주는 게 산교육이고 한데 교육 지금 하는 거 봐요. 국가시험을 쳐가지고 세금을 걷어가지고 대학에 자기 맘대로 많이 하면 24번 응시할 수 있답니다. 그거 만들어서 뭐해요. 아이들 골탕 먹이고, 돈 없고, 아이 머리 나쁜 건 생각도 안하고, 또 사교육은 자꾸 올라가고, 대학원 나와도 영어 하나 옳게 통하는 것도 없고. 이러니 덴마크처럼 대학은 엘리트들이 가도록 하고, 또 머리 좋은 놈은 유학도 국비로 시키고, 그 다음에 기술 배워서 자기 능력에 맞도록 국민 각자가 살아나가면 효율적인 뭐가 될 건데. 내가 서울대학 가고 싶으면 가는 거 시험 치는 거야 원서 내서. 떨어지면 그만이고. 여기 꼽았다, 저기 꼽았다, 아이에게 기회주의 가르치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 걸 좀 바꾸고 그래서 좀 편안한 국민 생활이 되도록 제도를 하자고 생각을 해야지. 이 세 사람 나오는 거 물어봐요. 문재인은 가는 데마다 다 해준다고 하고. 그래서 누가 되든지 새마을 운동은 지속. 영구 지속. 발전 방향을 바꾸는 방향이 있더라도 했으면 좋겠다. 그게 초창기에 내가 새마을 운동에 몸담은 한 사람으로서 필생의 소원입니다. 여기 지도자들은 내가 뭐 했으니 인정해줘. 하는 분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긍지 하나, 자존심, 신념, 내가 했던 그 길이 맞다. 대통령이 인정 해 줬다. 그래서 이게 탄생이 되었다. 나는 벼슬이 작아서 말단 실무 공무원으로서 했지만 내가 한 것은 군수한테 다 줬어 내 상사한테 명예를. 근데 이 분은 훈장 받고 했지. 했지만 죽어버렸단 말이야. 그게 안타깝고. 또 잘 나가면 대통령이 다 한 거고 그렇지만 그 뿌리를 찾는데 나름대로 내가 신문 스크랩도 하고 뭐도 하고 했는데 아까 만든 그 책에 함축 되어 들어있습니다. 청도다 뭐다 하는 게 여러분들 그때 새마을 부서에 노력을 했으니까, 그건 아닙니다. 뭔 부락이에요. 뭔 부락은 동네마다 군마다 다 있습니다. 뭔 부락이고. 그걸 좀 보고 왔다고 해서 그대로 했나. 새마을 가꾸기 운동은 그거하고는 아무런 관련 없어요. 새마을 가꾸기는 1971년 8월 5일 태동이 됐다 하는 것만 말씀 드립니다. 새마을 기념일은 71년 4월 22일. 지금도 법으로 정해져서 4월 22일이 새마을 날이다.
문. 새마을 이전과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요?
답. 만일 우리나라에 새마을 운동이라 하는 것이 없었으면 조국 근대화가 박정희 대통령이 신념처럼 외치던 자립. 그땐 식량도 부족했잖아요. 여러분들이 말은 들어 봤을 거야. 춘궁기, 초근목피, 소나무 껍질을 벗겨가지고 죽을 끓여먹고 살았다고 하는, 실감이 안날 거예요. 우리 집 막내가 그럽니다. 아버지 6.25때 밥 굶고 주먹밥 드셨다면서요, 라면 끓여먹지 뭐하러 그 맛없는 거 먹습니까. 참 답답하다 라면이 어디 있어. 아버지 세대는 라면이 없었다. 주먹밥이라 하는 것은 반찬이 없기 때문에 소금물 묻힌 걸 손에 아낙네들이 뭉쳐가지고 밥을 동그랗게 눌러야 밥이 안 퍼질 거 아니야. 겉이 짭조름하거든. 요새 같으면 김치하고 주먹밥도 맛있지. 그것과 마찬가지로 세대 간에 이해를 못하고 자기들은 하늘에서 그냥 떨어진 것 같이 생각하고 아버지 세대를 우습게 여기고, 아버지가 좀 초라하다고 해서, 우리 이웃에 사는 아저씨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길래 그건 인간이 아니다, 못났든 잘났든 자기를 낳아 주시고 키워줬다고 하면 이 세상에 안 태어났으면 모르지만 난 이상 고마운 걸 알아야 되고, 그걸 알아야 효도하란 얘기가 아니고 밖에 나가서도 내가 전철 타면 머리가 하얗다 보니까 학생이 일어서거든. 나는 아직 젊은데. 학생이 앉아서 공부를 하고 했으면 좋겠다. 나는 전철에 공짜로 타는 것도 영광이고, 우리 세대를 근대화 했던 세대라고 인정해 주는 나라에 고맙고, 또 손잡이 잡고 가는 게 나한텐 운동이고, 마음으로만 표시하고 그리 해라. 내 이런 얘길 했어요. 그러니까 학생이 낯이 벌개가지고, 앉아 있거라 네가 편안하게 앉아있어야 내 마음이 편하다. 그럼 난 저쪽으로 가련다. 난 그런 사람이야. 다들 딸로 보나 아들로 보나 내 자식 같고 우리가 그렇게 사는 게 되어야 되는데 새마을 운동이 있기 전과 후가 달라진 것은 지금 교육이 없어졌잖아요. 첫째는 교육인데 옛날에는 연수원에 임무라고 할까, 효과라고 할까. 대단할 겁니다. 새마을 교육을 어떻게 했냐면 처음에는 공무원을 했어요. 공무원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서 다 똑같은 건 아니거든. 농촌에 사는 공무원과 도시에 사는 공무원이 다르잖아요. 이걸 교육을 통해서 새마을이 뭔지 알아야 리드를 한단 말이야. 그때는 공무원들이 국가가 앞장서서 무조건 밀고 갈 때니까 그런 정책을 따르기 위해서 교육을 했고, 그다음에 새마을 교육을 한 건 우리가 건의를 했어요, 이건 국민이 해야 된다. 그래서 방계 조직부터 시골에 오면 농협, 파출소, 경찰도 새마을 교육을 갔다 와야 된다. 금융조합도 그렇고, 새마을 지도자 협의회에서도 다 교육 갔다 와야 된다. 군대식으로 아침에 일어나서 구보도 하고, 또 너희 부락은 어떤지 토론도 하고, 비교 견학도 한번 해서 견문도 넓어지고, 그래서 목표는 하나, 잘 살아보자, 하면 된다, 이게 새마을 기치였는데, 이 교육도 중단되었잖아. 왜 그랬느냐, 전두환 정권 때 되어 버린 거야. 그래서 동생이 용인 대학 나왔나 유도 하고 운동 잘 하고 그렇지. 그런 사람들이 거기 앉아서 하니까 되나. 우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