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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참여하게 된 동기가 어떻게 되세요?
답. 제가 20살 전에 유년기 때 사회 측 운동에 참여를 하고 그렇게 하다보니까 60년대 농협 합병 운동이 있었어요. 그때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또 농촌지도소라고 하는 그런 파트에서 농촌운동의 농대 구락부라고 하는, 지금으로 말하면 농촌 지도자지요. 거기에 참여를 했고, 젊은 나이에 선배들하고 같이 그걸 뛰었다는데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서 70년도에 그로인해서 부락에서 선배들이, 동민들이 새마을이라고 하는 어떤 지도자로서의, 젊은 네가 해봐라 해서 추천을 받아서 참여하게 됐는데, 사실상 나이는 젊지만 의욕은 있었다. 그래서 한번쯤은 그 길을 가서 내 젊음을 한번 봉사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다면 어떤가 하고서 큰마음을 가지고 임한 건 사실이에요.

문. 당시 새마을운동에 대해서 마을과 지역, 정부의 분위기는 어떠했나요?
답. 마을 분위기나 정부라고 하는 것 보다는 그때당시는 관 주도예요. 정부 주도로다가 시작한 것이 새마을운동입니다. 그것이 관 주도이긴 하지만, 공무원들이 각 부락에 적극적인 참여 유도를 해서 일을 시작한 게 바로 지역입니다. 중앙에서 지원을, 관주도로 해서 하는 것은 사실인데, 그때 당시에는 관주도로 하기 때문에 무조건 지원해 주는 것은 아니었어요. 말 그대로 근면, 자조, 협동 이라는 게 있듯이 열심히 스스로 하고 또 협동해서 그걸 이끌어 낼 수 있는 처음에 이미지를 제고한 거예요. 그래서 걸러서 얘길 하면 이제 지역에 오창면이면 오창면에, 몇 개 부락을 선정을 해서 우수성 있는 부락을 선정해서 지원을 많이 하게 된 거죠. 그래서 거기서 자율적인, 주민이 참여하는, 그런 계통을 유도를 했다. 그리고 그런 부락을 자생적으로 키웠다. 그래서 거기에서 얻어진 성공적인 사례, 이것을 확산 시켜서 전 지역이나 도나 전국에 확산 시키는 것이 바로 새마을운동의 근간이 아닌가.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문. 관에서 이것을 추진하자고 했을 때 그걸 해야 하는 마을사람들은 새마을운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했나요?
답. 처음에는 사실상 부정적이죠. 이때는 어려울 때니까. 제가 생각하기로는 60년대 무엇을 했느냐 하면은 치산치수라고 하는 나무심기, 또 지금은 수조합인데 방죽이라고 하는 거, 이것을 60년대에 주민을 동원해서 뭘 했습니까? 배급을 주던 것을 밀가루로 품삯을 주는 그런 현실을 만들었는데. 그때 당시에는 주민들이 시멘트나 이것을 그냥 무상으로 지원해 주는 거 아니에요. 그러나 사실상은 처음에는 타의적, 자의적인 그런 객관적인 것이 있었다. 그런데 사실상 치면 그게 제일 어려운 점이예요. 그렇게 하다 보니까 차츰차츰 하다 보니까 생각이 바뀌어 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서 빨리 교감을 갖는 부락은 우수 부락이라고 하는 열심히 하는 부락은 많은 지원을 받아가지고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그런 상태였다.

문. 처음 추진했던 사업은 무엇이었나요?
답. 많지요. 사실상은 첫째는 부락의 진입로요. 부락에 들어오는 진입로가 매우 중요하다. 옛날에는 우마차, 리어카 밖에 없었어요. 그 길도 다니기가 힘들어가지고 맨 처음에 부락 안 길. 진입로를 먼저 땅을 시사를 받아가지고 시작을 했고. 거기에 바로 연결을 해서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슬레이트집을 흙벽돌 담장을 조립식 담장으로. 또 하다보니까 하수구. 부락에 도랑을 내야 되기 때문에 하수구라는 것은 뭐냐 하면 시멘트로다가 도시마냥 암거를 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거. 그러다보니까 무얼 합니까?
농로 개설 해야지요. 또 여러 가지. 육로사업도 해야지, 하천 정비사업도 하지. 교량사업도 하지. 엄청난 그때 당시는 일이 많았다. 그렇게 하고 중요한건 그걸로 인해서 자꾸만 업그레이드 하면 욕심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전기사업도 하고. 그렇게 해서 사실상은 충청북도 최초로 전기를 끌어오는 부락이 저희 부락입니다. 그것이 괴산에서 거기까지 전기를 해서 거기까지 이루어 낸 시절이었다.

문. 저축생활은 어떤 사업인가요?
답. 저축생활이요? 그때 당시에 중요한 게 뭐냐 면요. 녹색3대 협력사업이라고 했어요. 녹색 사업이라고 했어요. 그게 무슨 사업이냐면 식량증산하고 저축운동하고 주거환경 사업입니다.
그래서 식량 증산해서 하려면 무얼 해야 하냐면 퇴비 증산도 해야 되지요. 식량, 토지, 그러니까 비료가 생산이 적기 때문에 자급자족을 해요, 퇴비도. 그래서 산이나 들에 푸를 퇴비를 생산하는 그런 사업도 해야 되고. 그다음에 절미저축. 저축운동을 그 다음에 최고로 했어요. 그래서 삼대, 녹색 삼대운동이라고 해서 현미운동이라고 했던 겁니다. 그래서 절미저축 그것을 해서 잘 사는 부락의 한 포인트가 됐다 라는 것 하고. 그 다음에 주거환경사업. 그 주거환경이라고 해서 옛날에 부뚜막이라고 하는 것 있죠? 그런 것을 다 주부들이 편하게 쓸 수 있는 환경을 그때 바꾸는 그런 단초가 되었다. 그렇게 말씀 드릴 수가 있어요.

문. 사업을 추진하시면서 어떤 어려운 점이 있었나요?
답. 첫째는 시대가 어려운 때라 지금처럼 기술력이나 중장비가 좋을 때가 아니거든요. 옛날에 그때만 해도 아무런, 무에서 유를 창출해내는 시기다. 그래서 전체를 인력으로 해야 돼요. 삽이나 지게, 리어카. 모든 골재나 모든 걸. 시멘트 붓는 것까지 모두 사람들이 하다 보니까 참 이루 말할 수 없는 환경이 열악한 거예요. 그래서 예를 들어 인력동원을 하려다 보면 매일 그러한 것을 반복. 봄에 일 하기 전에 농촌일 시작하기 전에 1-2개월 어떤 사업을 목표로 하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때 당시에는 매일 그것을 동원하다 보면 제대로 될 리가 없단 말이에요. 제일 심화된 것이 바로 인력동원의 그런 문제가 있고.
두 번째는 전국의 지도자들이 훌륭한 분도 많겠지만 기술력이나 모든 점이 부족한 점도 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그런 것을 하다보면 그런 것도 어려웠던 단면도 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어요.

문. 그런 문제가 있었을 때 어떻게 극복 하셨나요?
답. 사실상은 미쳐야지요. 낮에는 일을 합니다. 낮에 싸워야지요. 진짜 싸웁니다. 젊은 나이에 형 같은 분들, 아버지 같은 분들, 할아버지 같은 분들하고 참으로 억지를 쓰지요. 그렇게 하려다 보면 그러면 일을 하고 와서 저녁에는 무얼 해야 합니까. 낮에 불합리 했던 일들을 갖다가 해소 시키려면 호 방문을 해야 되요. 오늘은 이 분들한테 가서 낮에 이러 이렇게 하려다 보니까 잘못한 점도 많다. 용서도 빌고. 또 사업의 중요성. 이것을 설명하면서 이해를 구하는 거예요. 동네에서 협조를 안 하면 하는 일이, 나에서부터 다른 사람들이 힘든 일이니까. 같이 동참해서 조금 어렵더라도 해 주십시오 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다니는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처음에는 어른들이 불만을 하고 참 저기를 하시다가 계속 쫓아다니면서 설명도 드리고 협조를 구하고. 낮에 과했던 것은 잘못을 구하고, 양해를 구하고. 그렇게 가다보니까 이해도 많았다.
또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 이예요. 제가 미치다보니까 날마다 그 일하러 다니다 보니까, 가정에서 도와주지 않고 그것을 이해해 주지 않으면 절대 그 길을 갈 수 없다 라는 것. 그러니까 굉장히 마음 적으로 지금도 죄인 같은 삶을 살고 있다.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문. 어떤 시행착오를 겪으셨나요?
답. 시행착오는 당연하지요. 왜 그러냐면 기술력도 없지, 인력동원도 어려운데, 오늘 어디어디까지 해야 된다는 목표가 있을 것이다. 근데 기술력도 부족하지만 인원동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오늘 하려고 한 것이 이틀, 삼일, 또 한달 걸릴게 두 달, 석 달 걸린다. 그러니 그것들이 시행착오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럼 옛날에는 뭐가 있습니까. 기술력부족, 인력부족, 그리고 자재도 부족. 시멘트만 가지고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면 시멘트는 뭐예요? 골재. 모래나 자갈 갖다가 지금처럼 차량 동원이 안 되니까 사람이 지게, 아니면 리어카. 아니면 우마차일 뿐이에요. 경운기조차도 사실상은 없을 때니까. 겨우 한 부락에 한 대, 두 대 있을까 말까 하는 그런데. 그거 가지고 하다 보니까 계획된 시간을 단축을 시켜야 되는데 오히려 멀어져만 간다.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한계는 항상 시행착오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그러한 것이 심하던 때다 그렇게 볼 수밖에 없어요.

문. 일을 많이 해오셨는데 어떤 점이 아쉬움이 남나요?
답. 아쉽다기 보다는 그때당시는 젊음을 불사를 때이기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지금같이 좋은 세상이라면 돌이켜 볼 수 있는 시간이 많아요. 그런데 그때는 돌이켜 볼 시간이 없는 때예요. 열심히 일을 하면 되는 걸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때 당시는 최선을 다했다라고 하는 생각이지 크게 아쉬울 때가 아니다. 지금처럼 환경이 좋고, 넉넉한 혜택이 따라가면 내가 다 하지 못한 게 굉장히 많았을 텐데 그때 그 시기로서는 최선을 다했다. 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게 후회되는 것이나 그런 것은 없어요. 다만 시절이 그 시절이기 때문에 지금 같았으면 하는 생각을 지금 와서는 조금 해봅니다.

문. 일 하시면서 가장 보람됐던 일은 어떤 때인가요?
답. 보람이라고 하는 것은 어려운 때이기 때문에, 정부에서 경제개발5개년 그리고 식량에 대한 자급자족의 시기이기 때문에 주로 우리나라가 쌀하고 밀하고 보리였습니다. 그때 당시는 들녘에다가 수경 사업을 했어요. 논을 갈아서 그것이 뭐고 보리 갈아라, 밀 갈아라. 그것이 전부였어요.
그래서 저희 부락에서는 오창면에 53개리가 됐어요, 부락이. 리가. 구역별로다가. 그런데 아마 끝에서 세 번째가 빈곤한, 세금 내는 걸로 봐서 그렇게 어려운 고향인데. 마침 그때 연초, 또 잠업, 뽕나무를 심고 그것을 하다보고 또 절미저축을 해서 그 모든 것을 생산 하는 것 하고 판매하는 것하고 구매하는 것을 거기에 맞춰서 갔어요. 농협하고. 그러다보니까 일 년에 수지가 나왔잖아요? 그 심사 결과가 청원군하고 농협에서 공동으로 주최하는 저축 우수마을, 부자마을로 선정이 됐다. 그래서 부자마을이라는 대상을 받고 또 시상금까지 받아서 그 열심히 한 보람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뿌듯하게 생각합니다. 지금 상장도 이따가 보여드릴게요.

문. 홍석철 비서실장이 내방하셨다는 게 그 일 때문에 일어난 건가요?
답. 그렇지요. 최우수부락이라고 하는 어떤 단초가 됐어요. 와서 브리핑을 하는데. 저희 마을이 우수 부락이기 때문에 그때 당시만 해도 충청북도에서 군별로다가 1개 부락씩 선정이 돼있어요. 그래서 청원군에서 우리하고 보은하고 몇 개 마을이 됐지만 저희 부락으로 선정이 돼서 우수 마을로 지정이 돼서 홍석철 비서실장님이 내방한 적이 있어요. 74년도. 오셨다가 그해 타계를 하셨지만. 그렇게 내방을 하셨다.

문. 지도자로서의 자부심과 애로사항은 어떤 것이 있었나요?
답. 사실상은 지도자이기 전에 인간입니다. 그런데 작은 사람이, 민초라고 하지요. 시골 사람치고. 작은 사람이 영광되게 그 자리에, 지도자라고 하는 이름아래 껴들었다는 자체만으로도 마음속에 흐뭇한 그러한 마음을 가졌고요. 그 나이에 국가, 사회, 지역을 위해서 마음을 쏟은 열정을 했다는 자체가 그것이 보람이고 뜻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미치지 않으면 그것은 할 수가 없다 라는 것은, 교육에도 새마을 교육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느꼈고. 또 그때 당시에는 가정을 버리지 않고 나를 버리지 않고, 가정을 버리지 않으면 과연 할 수 없는 것이다. 첫째는 가정의 식구들. 부인, 내 식구나 자식들. 또 위로 할아버지, 할머니, 홀로 계신 어머니가 계셨는데. 지금은 다 타계를 하셨지만 항상 마음속에는 제일같이 죄송하고 송구스럽고 미안하고. 그래서 옛 말에 효불 효라고 하는 효를 효라고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라고 하는 말이 있듯이 자식이 부모한테 효를 해야 하는데, 효라고 하는 자체를 옛날 어른들이 말씀하시기를 자식이 효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을 효도하게 만드는 것이다 라고 했듯이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니까 지금도 식구한테, 처한테 평생 이 나이에 저런 사람마냥 미안하다 고맙다 이러한 것은 아니고, 마음속에 항상 미안하고 고마운 생각을 가지고 삽니다.

문. 새마을 지도자 일을 하시다가 가족들에게 소홀하게 돼서 안타까웠던 일화가 있으신지요?
답. 제가 그 당시에 안 좋았다, 좋았다 라고 하는 건 없었어요. 하다 보면 사람과 사람사이에 이기적인 게 도래되게 되어있어요. 거기에서 미움이랄까 그보다는 상반되게 놓이는데 그런 거 하고. 가정에 소홀하기, 소홀했다기보다는 가정에서 그때 당시에 자식 하나를 잃었어요. 그래서 70년도 말쯤 서울대학병원에 입원까지 했는데. 종강에 구제하지 못하고 하늘나라에 보냈다. 그래서 그 길로 사실상은 오창 고향을 떠나서 청주로 정착을, 나머지 학생들을 자식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나왔고. 농사는 제가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계속 지금도 시내에 살면서도 농사는 놓지 않아요. 땅의 소중함을 제가 알기 때문에. 그런 것이 에피소드 말고는 크게 없어요.

문. 농사 지으면서 새마을지도자 일을 하시려면 힘들지 않으셨어요?
답. 그래서 마음, 항상 마음의 준비가 필요 하다 라고 하는 것인데. 보통 사람은 핑계를 많이 대지요. 그래서 어떨 때 보면 내가 이래서는 되지 않는다. 라기 때문에 남이 잠 잘 때 나는 자지 않아야 해요. 남이 쉴 때는 내가 쉬어서는 안 된다는 거. 그래서 그런 틈을 이용해서 지금도 농사를 짓고 있어요, 손수. 그래서 그렇게 지금 해야 되는 것이다라는 거기 때문에 그것을 다른 사람이 다 잠자고 놀 때 놀고 그런다라고 하면은 그 일을 병행할 수 없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문. 스스로에게 새마을지도자를 하셨던 것을 평가한다면?
답. 저는 평가라기보다 최선의 노력을 다 했던, 내 생각에. 초창기에 70년대에 일했던 분들이 다 열정 있던 분 들이예요. 그러니까 혼이 깃든 분들이라고. 그래서 새마을을 통해서 하다보니까 무얼 느끼냐면, 말 그대로 근면, 자조, 협동. 지도자로써 가야 된다면 그 사명감을 가져야 되고 또 최선을 다해서 그 의지가 있어야 되고 신념을 갖지 않으면 그것이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크게 저기는 없고. 그러한 면이 되지만 스스로 그것을 의미가 있다 라고 하면은 여기까지 오면서 그래도 그 새마을로 인해서 내가 세상 사는데 기여하는 내 자신을 흩트려서 이렇게 볼 수 있는 계기가 돼서 그것이 항상 마음에 날 지탱한 계기가 되었나 하는 시간들입니다.

문. 그 당시 농촌 길을 넓히고 수로나 집을 개량한다고 했을 때 정부의 정책이나 공무원들의 지원은 어떻게 해주었나요?
답. 사실상은 노동력, 인력은 부락에서 감당을 하고. 시멘트와 골재는 도에서 기여를 받았어요. 기와를 찍어가지고 말려서 조달을 했어요. 그러니까 그 기와나 그런 자재는 정부에서 대줬어요, 그때 당시는. 그 인력만 동원한 그런 것이 됐다.
정부의 산하 공무원이니까. 감독을 공무원들이 와서 해야 되니까. 같이 공무원들하고 우리하고, 주민들하고 같이 일상생활 하는 거예요. 와서 전체를 관리하고 운영하고. 그래서 항상 같이 계획도 세우고, 설계도 하고, 이렇게 변신 하는 것은 공무원들하고 주민하고 우리하고 같이 이렇게 믹스가 돼서 모두 이루어 진 것이다.

문. 새마을 운동을 하고 난 이후에 마을은 어떻게 달라졌나요?
답. 그때당시에 정책, 나라에서 하는 일이 뭐냐 하면 마을 안길을 넓히고 농로를 넓히는 것은 부락에서 했지만, 그것은 부락민들이 땅을 시사를 해가지고, 그때 땅값을 안 받았어요. 땅을 시사를 해가지고 넓혀서 해놨습니다. 그때 당시는 진입로나 마을길 넓히는 것을 거기에 끝나지 않고, 앞으로 농업에 대한, 농기계 앞으로 그러한 것을 모토로 해야 된다고 하는 정책상 유도도 되고 또 그렇게 가야만 인력동원에 바람직한 것이 있다 라고 하는 것이 그때 당시에 정부시책이나 공무원들에게도 뜻과 우리 주민들의 뜻하고 같이 맞아 떨어지지 않았나. 그렇게 보는 거예요.

문. 새마을 운동의 전과 후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겠어요?
답. 마을이 어떻게 변했느냐 하면 60년대 사실상은 배고프고 굶주린 세대였어요. 그리고 산이 민둥산이라고 그러지요. 그때 당시에 아카시아 나무 심고, 은수원(나무종류)도 심고 이러한 등등 니키다 심고, 그렇게 했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푸른 산 그런 것은 없었다. 그렇게 어려운 시절인데. 실제로는 새마을 소득증대라고 하는 증산, 정부에서 통일벼를 놔가지고 자급자족하는 하나의 발판 구축을 하고.
또 농경정책이니까 지금은 도시정책이지만 농경정책을 주로 했기 때문에 농촌에다가 많은 투자를 해줬고, 많은 도움을 줬기 때문에 새마을의 영향은 대단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연초, 뽕나무, 잠업을 정부에서 대단위로 하게끔 투자를 해줬잖아요. 보수도 해주고. 새마을하고 같이 겹치면서. 그러니까 60년대하고 70년대 하고는 상상도 초월할 수 없는 경제력이 있다 이거야. 정부에서 5개년경제발전, 또 70년대 넘어가서 산업화, 중공업, 이런 걸 하면서 급속도로 성장이 돼서 우리가 상상을 초월할 수 없는 그런 발판이 됐다.
그래서 지금 그때 생각을 하면 60년대를 생각하면은 70년대 와서는 이부자 못지않게 잘 산다 그러한 생각을 갖게 하는 모토가 됐다. 그것이 새마을 운동의 희망과 그전에 열심히 일하고 노력을 하면 꿈과 희망을 이룰 수 있다는 그러한 것을 가르쳐준 하나의 단초가 됐다고 말씀 드릴수가 있어요.

문. 새마을지도자 일을 하고 계시는 후배들과 국민들에게 한마디 하신다면?
답. 제가 40년을 새마을 지도자를 하고 있습니다만, 지금은 새마을 지도자들이 열정과 혼이 적어요. 그것이 안타깝다라고 하는 것을 말씀드리고. 새마을운동은 사실상으로 치면 잘 살기 운동인 것은 사실입니다. 경제가 발전되다 보니까 그 뒤에 뭐가 필요한 것 같냐면, 새마을운동은 의식개혁 운동이고 정신개조 운동입니다. 그런데 새마을로 인해서 잘 살 은거 보다는, 그때 그것을 집약을 시켜서 정신 운동을 시작을 해서 국민이 열심히 노력하는 단초가 됐기 때문에, 아무리 정책이 잘 됐다고 해도 국민을 통해 국민이 같이 따라 줬기 때문에 같이 마무리가 잘 살게 됐다.
그런데 급속도로 그것이 변화가 되니까 지역이나 개인이나, 이기적이고 기회주의 적인 모토로 많이 갔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것은 옛날 60년대 그 배고프고 굶주렸던 그것을 70년대 새마을을 왜 했는가. 후손들에게 배불리고 잘 사는 그런 걸 해주기 위해서 했는데 그때를 한번 상고할 수 없는가. 그걸 묻고 싶은 심정 이예요.
그리고 새마을 지도자들한테 후배들이나 지금 같이 하지만. 항상 겸손해라. 모든 일에 내가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고 모두 겸손해야 한다는 것 하고. 관심을 가져야 된다. 관심이 있는 자는 주인이 될 수가 있지만, 관심이 없는 자는 나그네일 뿐이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현실의 지도자들이 아직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것은 그 열정과 혼이 있었기에 40년을 이어온 것 아니냐.
그래서 아쉬운 것은 단체가 너무 많이 하다보니까 한편으로는 새마을이라는 게 조금은 퇴색되는 기분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것이 지탱한 것은 그래도 열정과 혼이 함께 이어온 그런 정신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새마을지도자들이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진정으로 임해준다고 하면은, 국민들한테 또 사회인들한테 버림받지 않고서 져버리지 않는다. 이렇게 말씀을 드려보고 싶습니다.

문. 요즘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따뜻한 격려의 말씀을 전해주신다면?
답. 지금은 그것이 안 되는 이유가 하나예요. 왜 그러냐면 그 시대를 모르기 때문에. 그 시대상을 전혀 모르고 있다. 지금 6.25가 남침이냐 북침이냐 하는 그런 젊은 세대들도 있는데. 새마을운동이 어떻게 해서 잘살기 운동이냐. 새마을이 무얼 했느냐 이런 것이. 국가적 차원에서 한 가지 비중을 둔다고 한다면 옳고 그른 것, 좋은 점은 그것이 옳게 잘 이루어 졌다고 하는 그런 것을 해줘야 하는데 무조건 새마을은 관변단체라고 하는 배제 속에서 흘렀다.
그래서 80년 이후 90년 때가 제일 그렇습니다. 이미 그전에 새마을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김장담가주기 운동이나 불우이웃 돕기를 시작을 했어요. 그런데 지금 그것이 우리나라 전 직장, 사회단체들이 다 같이 병행하고 있다. 참으로 고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새마을을 시작했지만 그런 사회인들이 전부 동참 했다고 하는 것은, 새마을운동이 시작을 했다고 해서 새마을운동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인들이 전부 참여한다고 하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라고 하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고.
지금은 젊은이들이 그때만 해도 대학교 교수들, 대학생들하고 같이 숨을 쉬고 같이 일을 했어요. 제가 지도자 하면서 대학생들이 우리 집에 와서 한 달 씩 숙식을 하면서 체험을 같이 했습니다. 대학교 교수들이 논문을 썼고. 지금도 지나간 대학교수, 학생들이 학창시절의 그 이야기를 만나서 하더라고요, 그때 내가 이러이러 했는데 새마을 배지를 달아보니까 언제부터 하셨습니까. 그러면 자기가 학생시절에 시골에 가서 그런 봉사를 했던 기억을 해서 말씀드립니다. 라고 하는데.
첫째는 역사적인 모든 가치를 젊은이들이 인지를 해야 되는데 그것을 못하고 있다는데서 안타깝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글로벌 시대니까 새마을이 세계화 되고 있어요. 왜 120개 국가 이상들이 우리나라 새마을을 교육 받기 위해 이 나라에 옵니까. 그 사람들이 왜 미쳤다고. 얼마나 대한민국의 경제성장률이 단 3-40년 만에 경제 대국. 5위에 들어가는 경제대국이 됐다는 것은 젊은 분들이 지금 인지를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 역사성,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발전 했는지 역사성을 정치에 연연하지 말고, 우리 국민이 우리 사회인들이 살아온 것을 좀 깊게 해줬으면 하는 그런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