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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답. 새마을운동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 제가 농촌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새마을 운동하기 이전에 그 지역에서 자전거를 타고 농촌 개척을 했습니다. 농촌에서 자라시는 분들이 전부 삽 들고 걸어 다닐 때 저는 그 당시에 자전거를 하나 사서 자전거 옆에 삽을 꽂고 자전거를 타고 다녔습니다. 한 시간이 농촌에서는 중요하니까 그렇게 다녔습니다. 처음에 제가 타고 다니니까 ‘어, 저 사람 저거 타고 다니네.’ 그것이 결론적으로 1년 동안 25대로 늘었습니다. 한 시간 걸릴 거리를 2~30분 자전거 타고 다녔습니다. 우리는 새마을운동을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제가 서대문에 1960년도에 와서 동사무소에 찾아가 새마을지도자를 하겠다고 하고 총 지도자 임명을 받은 것이 1975년도에 했습니다. 이것이 제 족보인데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지난번에 원로 지도자라고 해서 초청해서 굉장히 새마을운동에 참여한 것이 보람이 있었다는 것을 굉장히 많이 느꼈습니다.
문. 당시 새마을운동에 대한 마을과 지역, 정부의 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답. 도시 생활이라는 것이 저 사람 무얼 하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허나 지역에서 유지들은 젊은이가 무슨 봉사활동을 하는 구나해서 그 당시에 제가 강화도 출신이라 ‘강화도령’이라 불렸는데 ‘강화도령’이라도 열심히 해달라는 부탁을 여러 번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주민들이 많이 도와주셔서 출발을 잘 했습니다.
문. 주로 무슨 사업을 추진했습니까?
답. 꼼꼼히 여러 가지 생각을 했는데 제가 적성에 맞는 것은 지역을 위해서 폐품 수집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 당시에 제가 70년도에 새마을 총 지도자가 되어서 동장님과 의논했습니다. ‘동장님 제가 이런 것을 하고 싶은데 하겠습니다.’라고 했더니 동장님이 아주 잘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 부양3동 대지가 150평정도 됩니다. 옛날 건물이어서 앞에가 한옥이고 뒤에가 100평정도 여유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동장의 허락을 받고 폐품 모으기를 시작 했습니다. 당시 동경본부 김정순 회장이 연수원에 10만원을 주셨습니다. 그 10만 원을 저한테 보내주셔서 천막을 구입해서 거기에 ‘대한부인회 동경본부 회장 김정순’글자를 새겨서 동사무소 100평 부지에 천막을 쳤습니다. 그 때부터 폐품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에 10만 원을 보냈다는 원장님의 서찰입니다. 안에서 이런 식의 폐품 정리를 했습니다. 제가 이것을 시작할 때 엄청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구니를 메고 다니는 사람들이 처음에 할 적에 동사무소에서 구청에 보고되고 반상회 때 마다 홍보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도시라는 곳이 냉정합니다. 그 때부터 구청에서 홍보하고 반상회 때 마다 홍보를 1년 동안 했습니다. 어떤 겨울에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네 것들을 가져간다고 저희의 수레 타이어를 다섯 번 정도 칼로 찢는 그런 과정도 겪었습니다. 어떤 때는 동사무소 뒤에 폐품을 모아 두면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이 맘대로 가져갔습니다.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동에서 인정받은 지도자이기 때문에 저보다 못한 사람은 가져가라고 편안하게 마음먹고 계속 시작하다보니 1년, 1년 반 정도 걸렸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수레를 끌고 전부 순회를 돌았습니다. 처음에 도시 생활은 문을 잘 안 열어주었습니다. 한 2년 정도 다니니 문 열어주고 다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현재 치안본부장인 강민창씨가 우리 동네 사람입니다. 그 사모님이 문 열어놓으면서 다 가져 가라고 했습니다. 지금 제 나이가 82세입니다만 그 당시에 제가 물질적으로 욕심을 냈더라면 저 전성장이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직 새마을운동을 정직하게 해야 한다는 신념 아래서 제가 처음에 들어가니까 그 분들이 중간 중간에 중요한 물건들을 다 끼어놨는데 그 물건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물건에 욕심을 내면 인생은 끝나는 날입니다. 그래서 그걸 전부 다 제쳐두고 필요한 것만 얼마 챙깁니다. 마을금고에서 발행하는 통장에다가 저울에 달아서 천원이면 천원 만원이면 만원 전부 통장에다 기재를 해주고 전표에다가 마을금고에 입금을 시켰습니다. 그걸 4년 8개월이 걸렸는데 1년 반 동안은 그렇게 고생했고 2년을 거치면서 그 때부터는 폐품 수집을 하면서 농촌문고에 보내야겠다 싶어 거기서 나오는 책들을 모아가지고 농촌문고에 보냈습니다. 김준 원장님도 지금 여기 사진에 있습니다. 이렇게 끌고 나와서 모아가지고 일주일 마다 아들 삼형제가 매주 토요일부터 일요일 날은 봉사를 합니다. 이것은 얼마인지 적어서 마을금고에 입금시킨 전표 사진입니다. 그렇게 농촌문고에 책 보내기를 해가지고 25년간 ‘농어촌 책 보내기’ 헌신이라고 서울 매일신문에도 나왔습니다. 그리고 울진 원남초등학교에 보내서 경북 울진군 원남초등학교에서 보내온 감사의 사진입니다. 현재도 이런 근거가 다 있습니다. 그 외의 것들을 전부 책을 모아서 소포로 보냈습니다. 오늘날까지 이렇게 했습니다. 또 폐품을 모으다 보면 의류가 많이 나옵니다. 우리 부암3동 사람들은 처음에 말씀 들인 대로 아주 부촌입니다. 어려운 사람들은 옷 입다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버리지만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입던 옷이라도 깨끗이 다려서 놓습니다. 그러면 그걸 동사무소 3층에 종류별로 놓습니다. 모아가지고 그 당시에 우리 북아연3동이 3,856세대였는데 그 중에도 미운 사람이 있고 뵈기 싫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착한 분부터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세상에 그런 옷이 없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많이 가져갔었습니다. 그 다음에 동네 분들 몇 분 나눠드리고 나머지는 고아원에 보냅니다. 세탁기를 하나 사서 세탁을 하고 깨끗이 말려서 보내면 거기서 다시 제대로 해서 애들에게 옷을 해 입혔습니다.
문. 일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무엇입니까?
답. 제가 서대문구 의회 의원으로 당선이 되면서 여기 신무에도 나있습니다만 제가 방위역 활동 봉사를 23년간 했습니다. 97년 3월 28일 날 신문에 방역을 솔선수범했다는 기사도 접했습니다. 저는 우리 지역이 26개통으로 구성 되어있습니다만 일부는 차로 들고 가고, 리어카가 들어가는 길이 있고 나머지는 계단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차가 다니는 길에는 가능한 동사무소 행정 차량을 이용했고 나머지는 자전거로 다녔습니다. 자전거길은 자전거로 다니고 이런 계단 길은 방역기를 메고 올라갔습니다. 제가 23년 동안 방역 활동을 하면서 굉장히 보람 있었던 일은 여름에 그걸 밀고 계단을 올라가면 연막소독기하고 약 30kg 나갑니다. 주민들이 집집마다 문을 열어 놓고 화장실도 다 열어 놓고 음료수를 하나씩 다 줬습니다. 봉사활동 끝나고 나면 제가 농구화를 신었는데 농구화에 물이 흥건했습니다. 그래도 보람이 있었습니다. 이일을 하다보니까 굉장히 독성이 있어가지고 적십자 병원에 한 일주일동안 했습니다. 제가 지금도 술, 담배를 안 합니다만 아침에 저는 4시 30이면 일어납니다. 4시 30에 일어났는데 옆에 보니까 목구멍에서 피가 나왔습니다. 이상하다 느꼈고 제가 의무병 출신이기 때문에 지혈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찬장에서 소금을 한 움큼 쥐어서 넣었습니다. 그러니까 소금하고 피하고 섞여서 피가 삭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응급차 불러서 병원에 입원해서 일주일동안 병원에서 출혈이 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요즘도 가서 연막 소독기 한 번씩 뿌려주고 옵니다. 23년 동안 방역 봉사를 했고 제가 혼자 한 것은 아니었고 제가 1991년도 6월에 지방의원이 당선되어서 나만 해가지고는 안 되겠다 그래서 담당 보건소 소장한테 이야기해서 26개동에 골고루 다 해서 연막 소독기 다 사주고 예산에 다 해서 지금 서대문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문. 전국준비위원과 새마을지도자 방에서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답. 우리가 1970년도 4월 22일 날 박정희 대통령님이 새마을운동을 제창하셨습니다. 그 후 대한민국이 새마을운동이 활성화되어 잘 돌아가는 시점에서 1979년도 10월 26일 날 그 당시에는 우리 지도자들은 남들 보지 않게 솔직히 많이 울었습니다. 우리가 그래도 잘살아 보세 새마을노래 부르고 저는 오늘날까지 새마을노래 밖에 잘 모릅니다.
새마을운동이 전국에 확산되다가 10.26 사태 이후에 그 분이 작고하시니까 다 끝났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1980년도 3월 달에 김준 원장께서 서대문구 지도자인 저하고 연락을 하셨습니다. 지금 저기 광주에 있는 윤성필 지도자하고 김준 원장은 굉장히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당시 이래서는 안 되겠다 서로 연락을 해서 3월 달에 새마을연수원에서 모였습니다. 새마을운동은 1979년도 10.26사태 이후에 80년도 까지 쉬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새마을운동이 완전히 그냥 열중쉬어 상태였습니다. 솔직히 얼마나 비통했습니까. 그래서 그 당시에 이래서는 안 되겠다 다시 모이자해서 어느 지역의 누구누구, 서울 지역의 누구누구, 전국에서 22사람들이 서로 모이자해서 그렇게 해서 22사람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22사람이 모여서 현재 조직위원회 명단이 여기 있습니다만 22사람 중에 지금은 세월이 가서 지금 7분이 작고를 했습니다. 현재는 지금 15명이 살았는데 15명 중에도 우리 모임에 잘 안 나오시는 분이 있습니다.
제가 초창기부터 조직준비위원회를 하면서 대구의 백멱석 회장님이 그 당시에 나이가 제일 많았습니다. 그 분이 회장을 하시고 제가 서울에 사니까 제가 총무를 봤고 정찬동 지도자가 감사를 했고 우리가 쭉 해오다가 세월이 이렇게 흘렀습니다. 조직준비 위원들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 모이자 했습니다.
그 때 새마을문화신문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지금 22사람 중에 노란 것 칠해 놓은 사람은 다 죽은 사람입니다. 지금 15명 남았습니다. 그중에 제가 서울에 살기 때문에 처음부터 관장을 했기 때문에 잘 알기 때문에 제가 지난번 울산에서 새마을 전진대회를 할 적에 우리 지도자님들이 8분이 오셨었습니다. 그 때 전 회장이 총무도 오래했으니까 그냥 하라 그래서 제가 심부름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70년대부터 새마을운동을 했습니다만 아직까지 어떤 감투나 이런 것을 써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저는 동 회장도 안했었습니다. 그런 것 안한다고 했었습니다. 저는 오직 새마을운동에 참여했었던 사람이기 때문에 일만 하지 그런 것은 안 합니다 했는데 그러다 일하다보니 지방 의원이 되었고 할 수 없이 1994년에 대통령 표창을 하나 받았습니다. 조직준비위원으로 활동하는데 이 당시에 국보위 시절이었습니다. 전국에서 모이다 보니까 국보위시절에 김준 원장님, 전직 교수님들이 오셔서 꼭 해야 된다고 굉장히 많은 자문을 했었습니다. 이것이 현재 1980년도 7월 5일부터 6일까지 새마을중앙연수원에서 1박2일 동안 우리가 맹세한 날입니다. 오늘날 까지 허문도 씨도 참여했었고 여기가 윤상철 회장이 외치면서 포도주를 가지고 혈맹을 맺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죽을 때까지 해야 된다고 했었습니다. 저희는 이 사진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여러 차례 거쳐서 1980년도 7월 25일, 26일 새마을연수원에서 간담회를 가졌고 이런 설명회까지 했었습니다. 이때는 굉장히 서로가 부둥켜안고 많이 울었습니다. 그래가지고 새마을운동이 이렇게 오늘까지 이루어 왔습니다. 1980년도 8월 5일부터 6일에 남아있던 조직들은 새마을지도자 전국 순회를 새마을지도자 방에서 전용오 지도자 원장님하고 연수원 교수님들 몇 분들하고 그 당시부터 전국 시, 도 단위 교육을 했습니다. 현재 그 근거가 다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참여했던 그런 사항들이 지금 시, 도 단위 교육한 근거가 여기 다 있습니다. 우리가 해서 어느 날 어떤 날은 어디고, 제일 먼저 서울시의 각 종로구 지도자들 홍보 요원 교육을 연수원에서 제일 먼저 서울에서 시작했습니다. 협회장들도 꼭 해야 되겠다고 했었습니다. 이 분들도 지금 7~80에 작고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새마을지도자 방에서 각 지회별로 간담회 공문을 보냈습니다. 우리가 꼭 참여했고 제가 갔고, 전용오 지도자님하고 교수님들이 다 갔습니다. 그래서 16개 시, 도 간담회를 6개월 동안 다 마쳤습니다. 지도자님들 결과가 새마을운동을 다시 하자, 그 때 힘을 얻어서 새마을중앙협의회를 구성하게 된 동기입니다.
그리고 1980년도 9월 10일 날 세종문화회관 별관에서 전국을 대표하는 300명이 모여서 전국 회의를 했습니다. 그 당시에 초대 회장에 황정철 회장, 작년에 작고했습니다. 그리고 부녀회장에는 박정회 회장을 선임해서 9월 10일 날 전국조직을 끝내놓으니까 이제 우리는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우리 조직위원은 이걸로 임무를 다 했으니까 앞으로 지역에서 열심히 하자는 식으로 그 날 저녁에 12시까지 해산식을 하고 각 지역으로 돌아가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조직준비위원 22사람이 이렇게 안했으면 현재는 물론 다시 활성화 되었지만 그래도 굉장히 나이 먹은 현 시점에서 생각할 적에 평생에 자문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오늘날 까지 지도자님들이 단결해서 새마을운동이 국제화, 세계화로 뻗어나가는 시점에서 굉장히 뿌듯하다는 것을 말씀 드립니다.
문. 사업추진상 제일 어려웠던 점은 무엇입니까?
답. 지금 우리가 새마을운동을 다시 조직하는 과정에서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자기들 중간에 뭐 해달라는 사람도 있었고 청탁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을 위한 사람이 아니고 조직준비원 22사람이 한 곳에 뭉쳐서 협의해서 여러 분들이 회장을 선임하는 것이지 우리 개인끼리 누구를 추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문제도 많았습니다. 지금 저는 감투에 연연히 없습니다만 조직이라는 것은 굉장히 그런 문제도 있다는 것을 말씀 드립니다. 그러나 저희는 모든지 공정한 입장에서 처리하는 것이지 어느 개인에 대한 욕심은 없습니다. 지금 현재 조직준비들 모이면 그 때 아무개를 물리쳤던 것이 잘해서 오늘날까지 활성화되었다는 것을 얘기합니다.
제가 아까 처음에 말씀 드렸습니다만 1년 반 동안 폐품 수집하면서 첫발 디디는 과정에서 건달들하고 싸웠다는 것, 수레를 5대를 바꿨습니다. 타이어를 새 것 끼면 다시 찢곤 해서 그것이 굉장히 어려웠는데 하지만 나중에 그 친구들하고 다시 만나서 ‘내가 미안하다’고 하고 제가 그 친구들한테 당신들 밥통을 뺏어서 미안하다고 했고 그 분들이 아저씨 좀 오세요해서 고맙게 생각하고 그 분들 아직까지 지역에서 같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보람 있다 생각하고 그래도 사람이 너무 악인이 되면 안 됩니다. 선하게 살았기 때문에 항상 베풀고 나는 못 먹어도 남은 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까지 보람 있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문. 아쉬운 점은 무엇입니까?
답. 아쉬웠던 점은 제가 다른 아버지처럼 돈을 벌어다 주지 못한것, 새마을운동하면서 아무래도 봉사는 돈벌이가 안 되잖아요. 다른 자식들 보다 아버지를 잘못 만나서 우리 자식들을 잘 못 먹였다는 것 그래도 잘 자라줬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예가 있습니다. 치안본부장 하신 강민창 씨가 우리 동네에 삽니다. 그 사모님이 저를 어떤 때는 돈을 2만, 3만 원 씩 애들 주라고 주십니다. 그런데 저는 그 돈으로 책을 샀습니다. 책을 사서 이 책은 아무개 사모님이 돈을 주셔서 사서 보낸 책이니까 독후감을 그 주소에다가 보내라고 했습니다. 어떤 날은 사모님이 전화가 왔습니다. 학생들한테 편지가 오는데 돈 준 것으로 이것 한 것 아니냐고 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그 사모님이 두 달, 한 달에 우리 애들한테 돈을 안주고 떡을 해줬습니다. 그래도 사모님이 고맙게 떡을 상자에 해서 주셨습니다. 사모님이 저를 배려를 해주셔서 그래도 그나마 애들이 배불리 먹였던 것이 마음에 보람 있다고 느낍니다.
문. 지도자로서의 자부심은 어떤 점이며 애로사항은 무엇이었습니까?
답. 제가 새마을지도자를 오래 했기 때문에 1991년도 6월 달에 지방의원제도가 신설 되었을 때 지역 주민들이 추천을 해주셔서 제가 1991년도 6월 달에 지방의원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초등학교 졸업이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의정활동하면서 삼 선 의원을 하면서 대학원까지 지금 총 현재 한 군데 졸업했고 여섯 군데 수료를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동안 28년 동안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우리 자식, 부인한테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금년도 8월 6일 날 세상을 떴습니다만 제 부인에게 ‘여보 내가 당신한테 고생도 많이 시켰는데 나 그래도 당신한테 많이 갚았다.’그랬더니 부인이 뭐냐고 했습니다. ‘내가 당신한테 다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당신은 촌에서 나한테 시집왔기 때문에 당신이 노력해서 지방의원을 만들어 줬기 때문에 그래도 당신은 어디가면 아주머니인데 남편 지방의원 만들어준 덕분에 사모님 소리 듣는다.’그것으로 빚을 갚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얘기가 지금 추억으로 남고 지금 먼 나라에 가서 아마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저도 따라가려고 합니다.
문.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 수 있습니까?
답. 저는 신사복은 잘 입지 않습니다. 저는 어딜 가나 주례 슬 때만 정장을 입습니다만 새마을지도자로서 박정희 대통령께서 1970년 4월 20일 날 제창했고 중간에 서거를 하셨습니다만 그래도 박정희 대통령 덕분에 새마을운동을 해서 지방의원이 되었고 오늘날까지 서대문 사회에서 존경받는 인간으로서 오늘까지 살기 때문에 굉장히 보람 있다고 생각하고 자랑스럽습니다.
문. 새마을운동 이전과 이후는 어떻게 변화했습니까?
답. 현재 새마을운동이 70년 대 제창이 안 되었더라면 이 나라가 이렇게 발전이 안 되었을 거라고 자부합니다. 만약 제창이 안 되었다면 우리나라는 70년대 후진국으로 아직까지 지속이 됐고 국제화 사회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부합니다.
문. 후배들이나 국민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답. 저는 죽는 날까지 새마을운동을 할 것이고 또 그 세상에 가서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자라는 세대들이 꼭 국가적인 측면에서 새마을운동을 지금까지는 우리나라 새마을운동이었지만 앞으로는 국제화, 세계화로 좀 넓게, 우리나라에서만 좁은 생각을 하지 말고 선진화 국가에 가서 우리 새마을운동이 활성화 되어있는 곳에 가서 구경도 좀 하고 그런 기사를 자주 접해서 많은 분들이 보고 또 시범을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부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