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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참여하시게 된 동기는?
답. 73년도에 지도자를 맡아가지고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73년도에는 마을에 교량이 없어서 애들이 학교에 가는데 매일 걸어 다니고 했는데, 마을에 교량을 만드는 게 새마을사업의 시초였습니다. 주민들이 1차적으로 다리를 놓자고 해서 주민총회를 통해 주민들 너도 나도 다 시멘트를 기부해 주어서 45일 만에 완공을 시켰습니다. 그때부터 새마을이 완전하게 불이 붙어가지고 너도 나도 다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74년도에는 마을 안길을 조금 넓히고, 다리를 만들어 놨으니까 다리와 연결되는 270m 도로도 만들고, 지붕개량도 했습니다. 그런 사업을 하고 난 뒤에는 이래 가지고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에 소득사업을 하자고 했습니다. 옛날에 사라호 태풍에 폐촌부지가 있었는데 그 자갈밭을 일구려고 동의를 얻었는데, 처음에는 애로사항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자갈밭을 일궈서 뭐하겠냐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지만, 돌과 자갈을 걸러내고 객토를 해서 지금은 부지가 약 50만평 정도 됩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대한 마을에 분위기는?
답. 마을에서는 불평불만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저녁에 가서 우리 마을은 못살고 있으니 우리도 잘 살아야 되지 않겠나 하면서 설득을 시켰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일하는데 와서 난동을 부려서 달래가면서 일을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는 하나 둘 힘이 모이니까 혼자 남은 사람은 외톨이가 되니 결국에는 와서 사과를 하고 협조를 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폐촌부지 일굴 때는 너도 나도 손발이 부르트도록 리어카로 밀면서 객토를 했습니다. 동민들이 전부 너나 할 것 없이 나무심기에 동참을 해 가지고 소득사업을 시켰습니다. 다른 마을에는 길도 많이 넓히고 지붕개량도 하고 했지만 우리는 그것보다도 소득을 위주로 먹고 살기 위해서 사업을 했습니다. 사실 청도군에서 우리 마을이 제일 빈궁마을로 빈촌마을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산 자유 숲 쪽에 텔레비전 부품 하는 곳에 가서 부품을 가져왔는데, 당시 작업장 50평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 가지고 하면서 그때 1인당 6~7만 원 정도로 1년에 360만 원정도 수입이 들어왔습니다. 마을 사람들 전부다 동참하면서부터 부흥이 좀 됐고, 10년 이 넘다 보니까 생산이 되고 해서 마을이 좋아졌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답. 앞에서 일하는 지도자가 자기가 일을 하지 않으면서 일을 시키면 절대 안 됩니다. 저는 손발이 터지도록 제가 먼저 일을 했습니다. 그러니 주민들도 앞서 일하는 지도자가 하니까 따라준 것입니다. 불평불만이 있어도 제 손발을 보고 위로도 해 주고 수고 많다는 말도 해 주었는데, 거기에 힘을 얻어 사업 추진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 청도군에서는 우리 마을이 제일 잘 되어 있습니다. 상하수도도 잘 되어 있고, 배수처리장도 있고, 도로도 안길은 전부 5m로 다 높였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되어 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반대하는 분들은 어떻게 설득하셨나요?
답. 진해에 가서 막걸리 받아다가 ‘사실 우리 마을이 잘살게 하려고 하는데 당신들 혼자만 불평하면 안 된다, 협조를 해라’고 사정사정을 하니까 동참하겠다며 따라주었습니다. 그런데 동참했다가도 어떤 이는 반대를 해서 다시 설득을 하고 계속 설득을 하니 나중에는 전부 따라주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시행착오가 있었다면?
답. 오동나무하고 포플러 나무가 많이 있어서 그것을 식재 하였는데 하나도 소득을 못 보았습니다. 나무는 10년, 20년 이상 커야 되는데 오동나무하고 버드나무는 손해가 많이 났습니다. 나무는 심어놓으면 장기간 관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바로 소득이 되지 않습니다. 오동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실패율이 많았습니다. 안 되겠다 싶었는데, 마산에 외주공장이 들어와서 한집에 보통 당시 돈으로 80만 원에서 90만 원씩 받으니 생활이 넉넉해지고 아이들 학교도 보내고 했습니다. 우리 마을이 당시 480여명인데 초등학교 다니는 애들이 82명이었습니다.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런 아이들도 부모들이 자연적으로 소득이 늘어나니까 신발도 사주고 그러면서 생활이 나아졌습니다. 그런데 그 어린 아이들을 공부시켰더니 전부 객지로 나가버렸습니다.
문. 당시 경제동향보고에 대한 내용은?
답. 78년 9월 7일에 우리가 경제동향보고를 했는데, 다른 마을은 전부 환경개선을 위주로 새마을사업을 했지만 우리 마을은 소득을 위주로 한 마을로 경제동향보고를 했습니다. 처음에 심어놓은 나무가 10년이 지나니까 과일나무에 과일이 열렸고, 외주공장에서 생산해 가지고 돈을 벌었기 때문에 소득 마을로 경제동향보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특수사례로 마을 앞 2층으로 된 회관 84평과 50평 공장은 우리 마을에서 자력으로 지었다는 보고도 했습니다.
경제동향보고를 다하고 난 뒤에 박정희 대통령하고 식사를 같이 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제 손을 만져보더니, 사실 그때는 장갑도 별로 없어서 마을 안길을 넓힐 때 시멘트를 전부 맨손으로 하니까 손이 많이 터서 반창고도 바르고 피도 흘렀습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이 악수를 하면서 손이 왜 이리 껄끄럽냐고 하면서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손을 번쩍 들면서 ‘지금까지 이런 지도자들은 처음 보았다, 경제동향보고를 하면서 이런 손은 처음이다’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손을 잡아보니 전부 부드러웠는데 저는 피가 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진정한 일꾼이라고 했습니다. 식사하고 난 뒤에 차를 한잔하면서 ‘젊은 사람이 힘껏 하고 봉사를 하는데 수고했다’고 하면서 어깨를 두드려 주셨는데, 울컥했습니다. 제가 지금 70살인데 지금까지 돈 받는 것은 하나도 하지 않았습니다. 박 대통령과도 죽을 때까지 봉사를 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약속은 지켜야 할 것 같기 때문에 지금도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실제 지금 주민자치위원장을 하고 있지만 보수를 한 푼도 받지 않고 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애로사항과 보람된 일이 있다면?
답. 당시는 돈이 없어서 자재 사는 것이 제일 곤란했습니다. 마을주민들의 인력으로는 충분히 할 수 있었는데, 당시에는 밥 먹는 것도 곤란한 처지였을 정도로 돈이 없었기 때문에 자재를 살려고 할 때 애로사항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객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찬조를 받아가지고 추진을 했습니다. 그렇게 고생 고생해서 완전하게 길을 포장해 놓고 완성된 모습을 봤을 때 그 기분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아쉬운 점은?
답. 지도자들이 봉사를 하면서 잘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 전과 후에 바뀐 점이 있다면?
답. 70년대는 빈곤했기 때문에 소득의 증대로 해서 환경 개선에 많이 취중을 했는데, 지금은 환경이 정비가 다 되었고, 소득도 조금 올랐지만, 사람들의 정신상태가 그때에 비해서 조금 해이해진 듯합니다. 요즘은 배고픈 것도 없고, 자기 재산이 있으니까 새마을사업을 등한시하는 점이 좀 있습니다.
예전에는 골목도 쓸고, 집도 초가집이었는데, 지금은 전부 양옥집이고 변화가 많이 되었고 발전도 많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즘은 집에 세탁기가 전부 있지만, 그때는 사실 먹는 것도 그렇지만 환경도 꽤 어려운 처지에 있었습니다.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30년 세월이 흐르니 시대가 바뀌고 그 정신을 받아서 젊은 사람들이 많이 움직임여주니까 지금은 좀 환경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 후에 주민들의 생각에 변화가 있다면?
답. 그때는 앞서 일한 사람이 따라 오라고 하면 몇 명만 빼고 전부 자기들 충동에 의해서 참석했는데, 요즘에는 좀 먹고 살고 하니까 사정사정해도 안 해도 된다고 말하는 등, 정신이 조금 퇴보하는 편입니다. 그때는 살려고 발버둥 쳐서 하기 때문에 했는데, 요즘은 먹고 살만 하니까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문. 당시 정부나 공무원들의 지원은?
답. 우리 마을은 당시 외국인홍보마을로 다른 마을보다는 지원이 많았습니다. 다른 마을보다는 앞서 있었고, 주민들도 다 잘해 주었습니다. 당시에는 돈이 없어서 안길 넓히는데 전부 정부에서 보조를 받았는데, 집을 지을 때는 융자를 받았습니다. 78년도 경제동향보고 할 때 융자를 받아서 20년 무상으로 돈을 다 갚았습니다.
문. 새마을운동 지도자로서 자신을 평가한다면?
답. 저도 70살이 다 되어서 작년에 지도자를 넘겨주었는데, 보람이라고 할 것이라면 주민들을 위해서 일했다는 것이 뿌듯합니다. 고생은 다른 사람이 하고 훈장은 저 혼자 받아서 양심의 가책도 있습니다. 다 같이 일을 했는데 저 혼자 훈장을 받아서 미안합니다.
문. 후배들이나 국민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은?
답. 제가 36년 동안 지도자를 하면서 느낀 것은 앞서 일한 사람들은 정직하고 모든 것에 솔선수범하면서 희생정신을 가져야 됩니다. 희생정신이 있어야 앞으로 발전되고 그래야 밑에 있는 사람들이 따라줍니다. 지도자가 희생도 안하면서 남들에게 시키면 절대 사업이라든가 모든 것이 일이 잘 안 됩니다. 자기가 괴롭더라도 앞서서 맡았으면 끝까지 솔선수범해서 앞서서 하면 자연적으로 따라옵니다. 요즘은 젊은 사람들이 하기 싫으면 잘 안 하려고 합니다.
아무튼 교육을 많이 시켜서 앞으로도 무궁한 발전이 있어야 합니다. 옛날에는 이것하자고 하면 마을사람들 100명이면 80명은 찬성하고 그중에 10~20명만 들고 일어났지만, 요즘은 보통 자기에게 소득이 안 오면 안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옛날과는 천지차이입니다. 옛날에는 그래도 부모들 말도 잘 듣고, 일하라고 하면 잘 했는데, 요즘 애들은 고등교육을 많이 받아서 그러는지 아버지가 뭐라고 하면 대듭니다. 옛날 사람들은 뭐라고 하거나 아버지가 하라고 하면 아무 말 없이 했는데, 요즘은 시대도 많이 변천되어 가지고 자기 아버지 말도 안 듣는데, 앞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일을 시키면 잘 안 듣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앞에서 일한 사람들은 정직하고 근면하고 성실하게 해서 모범을 보여야 만이 주민들이 따라주지 지도자가 가만히 앉아서 시키기만 하면 절대 따라주지 않습니다. 그런 아쉬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