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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연수원 새마을교육이 어떻게 시작됐나요?
답. 새마을운동은 사실상 1970년에 시작이 됐지만 이 새마을 교육은 72년 1월부터 시작이 됐습니다. 그것은 1970년에 4월에 시작된 새마을운동이 박대통령의 제창에 의해서 주로 행정 주도로 이루어졌거든요. 근데 새마을운동은 일반주빈이 산발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그 마을에서 그 마을을 이끌 지도자가 필요로 합니다. 그 지도자는 일반 이장이나 동장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그 반 행정의 역할을 하는 사람보다는 순수한 지도자가 나와서 이 운동을 이끌어야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도력을 배양하기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 그렇게 해서 박대통령께서 1971년 말경에 농협중앙회에다 이 교육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연수원을 만들라고 해서 그 연수원이 독농과 연수원이라는 이름으로 경기도 고양군 당시 농협대학에 내에다가 독농과 연수원을 1월 14일 설치해서 그달 1월 30일에 140명 즉 한 군(郡)에 독농가 한명씩 뽑아서 교육을 한 것이 새마을운동의 효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문. 그 당시에는 교육이 절실했겠네요.
답. 그렇죠. 그러니까 새마을운동이 지도자의 지도역량에 따라서 마을이 앞서가는 마을이 있고 뒤지는 마을이 있거든요. 그래서 핵심지도자를 정형화 시킨다는 것이 새마을교육의 목표였지요. 근데 이 지도력은 그냥 막연히 되는 것이 아니라 새마을교육을 통해서 충격을 일단 주고 그 충격이라는 것은 현실을 똑바로 알 수 있도록 자극을 주고 그 충격에 의해서 자극을 받은 연수생이 아 우리가 이래선 안 되겠구나. 뭔가 우리가 반성을 하고 분발을 해야되겠다. 그래서 그 결의를 하고 그 결의를 교육을 받은 후에 마을로 돌아가서 주민을 데리고 실천하는, 즉 다시 말씀들이면 자극, 반성, 결의, 실천, 이런 단계로 새마을 교육이 이루어 진거죠. 보통 특정 종교를 지정은 안하겠는데 한국의 종교 중에 어떤 종교는 대학이 있기 때문에 그 종교가 번창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새마을운동도 새마을교육이 뒷받침하지 않았다면 즉 마을의 지도자를 향성하지 않았다고 하면 새마을운동이 70년대 열화와 같이 전국으로 확산할 수 있는 그런 계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문. 박정희 대통령도 굉장히 애착이 많았겠네요.
답. 그렇죠. 72년 1월 14일 날 연수원이 개원이 되었는데 제1기 교육은 그해 1월 30일날 입교를 했거든요. 그래서 2주간 합숙교육을 받고 수료를 했는데, 3기 교육을 할 땐가, 그때 박대통령이 직접 방문해서, 그들이 잠자는 잠자리, 즉 생활관을 직접 가서 누어보기도 하고 그들이 강의를 받는 의자가 맨 앞에 의자나 맨 뒤에 의자나 수평하게 되어있는 것을 맨 뒤에 앉아서 직접 앉아보시고 뒤로 오면서 점차적으로 의자를 높여주면 뒤에 앉은 사람도 바로 유용할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해서 대통령께서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이 교육은 정신혁명의 도장역할을 하는 그런 연수원으로 발전을 시키자 이런 말씀을 하셨죠.
문. 아무래도 기존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면 새마을운동이 성공할 수가 없었겠죠.
답. 그렇죠. 그러니까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어야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어야 운명이 바뀐다는 유명한 얘기가 있듯이,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거기까지만 하고 단절된다고 하면 올바른 가치관이 실현되는 인간이다. 이렇게 볼 수가 없죠. 그러니까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그리고 바르게 행동까지 이어지는 올바른 가치관을 함양 할 수 있는 그런 교육이 바로 새마을 교육인데, 이것은 초기에는 농촌지역 사회를 위한 지역 사회 개발운동에 구심적인 역할을 했는가 하면 우리가 보릿고개를 극복하고 경제적으로 잘 살 수 있는 먹거리가 해결된 이후에는 이 농촌을 떠나서 전국의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일종에 사회 개발의 역할을 했다. 왜냐면 올바른 시민의식을 갖게 하면 그러한 교육 내용으로 교육을 했거든요. 올바른 시민의식이라는게 아까 말한 생각을 바르게 하고 말을 바르게 하고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 실천하는 행동인이 될 수 있도록 그렇게 했죠.
문. 전 국민의 교육을 담당하는 그런 역할을 했네요. 그러면 나중에 어느 정도까지 확대가 되었나요.
답. 처음에 농촌 지도자를 교육을 시켰는데 그것도 남자위주의 교육을 2주간했습니다. 근데 이 사람들이 교육을 받을 때는 반드시 분임토의라는 것을 밤에 하게 되죠. 그 분임토의에서 도출된 하나의 의견이 뭐냐면, 정부에다가 건의하기를 농촌 마을에는 우리 남자들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도 많이 차지하는데 여성 지도자도 이 교육에 많이 참여 시켜서 우리 같은 맘으로 수료를 하게 되면 남자 지도자와 여자 지도자가 한마을을 이끄는데 아주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새마을운동 마을에서 더 활성화가 된다. 이래가지고 바로 부녀새마을지도자 교육을 이어갑니다. 72년이죠. 근데 이것도 교육을 시키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우리농촌지도자들이 아무리 교육을 받아도 지역에 있는 읍면장들이 새마을운동을 모른척하면 이거 안되니까. 앞으로 우리 남녀 지도자 교육을 하는데 읍면장도 함께 참가시켜서 같이 교육시키면 좋겠다. 그래서 읍면 공무원으로 확대가 됩니다. 읍면장들이 교육을 받고 돌아가면서 하는 얘기가 우리만 받으면 되느냐. 위에 시장군수도 있는데 시장군수가 새마을운동을 모른다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그래 시장군수 교육도 확대되고, 시장군수는 다시 도. 또 그 교육을 받은 사람이 중앙 부처의 국장급이상 그러다가 74년 7월에는 장차관급 교육까지 확대가 돼서 장차관급 교육은 장차관급만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변호사, 판검사, 의사, 약사, 문화, 예술인, 사회 전반에 지도급 인사들이 장차관급 반에 같이 와 교육을 받았는데, 이것이 나중에 장차관급 반이다 이러면 맞지 않으니까. 사회지도자 반이라는 이름으로 교육을 했으니까. 농촌 남자 새마을지도자반, 부녀 새마을지도자반, 사회 지도자반 이 삼 개 과정이 따로 따로 교육을 하는 게 아니라 수원 연수원에서 함께 교육을 하면 그게 대상에 따라서 교육효과의 상승효과가 올라갑니다. 그래서 예컨대 이런 얘기가 있죠. 반드시 줄을 서야되요. 줄을 서는데 연수복을 입을 때는 자기 교번하고 이름만 적지, 어느 군, 무슨 내무부, 건설부, 무슨 국장이다 차관이다 이런 명찰 다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누가 누군지 모르고 모든 신분과 사회적 지위를 놓고 연수복으로 갈아입고 연수를 받는 거예요. 식당에 딱 섰는데 앞에 선 사람보고 뒤에 농촌 지도자가 쿡 치면서 당신 어디서 왔어요 그랬단 말이야, 사실 쿡 찔림을 받은 사람이 농림부 장관이였어요. 당시 그래서 두 사람이 식사를 하면서 농촌 실정을 얘기하고 그 사람은 농림부에서 농정을 펼치는데 애로 사항을 얘기하고 그러다가 식사 후에는 쉬는 시간에 그늘나무 밑으로 가서 벤치로 가서 얘기를 나눕니다. 이것이요. 지도층과 농민이 함께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거기서 새로운 농정의 지표도 찾을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되는 거예요. 만약에 농민이 종합청사에 가서 농림부 장관 만나러 왔다고 그러면 처음에 정문에서 제재를 받고 통과를 해도 다시 비서실에서 걸러요. 근데 연수원이라는 공간에서 새마을교육을 받으면서 지도층과 국민이 함께 그 뜻을 교환 할 수 있다는 거 그런 장점이 있죠.
문. 서로 자극이 많이 됐겠네요.
답. 그래서 제가 남자 새마을 농촌지도자, 부녀지도자, 사회지도자 여기 까지 말씀을 드리는데 그 후에 예를 들어서 사회지도자 반에 대한의사협회 거기의 간부가 교육을 받고 나와 가지고 야, 우리 교육을 참 진지하게 잘 받았는데 우리의 후배들인 대학을 나오는 인턴들이 1년에 천 몇백 명씩 그 당시에 배출되었는데, 이분들이 의술만 가지고 인술을 펼치는 게 아니라 진정한 인술을 펼치기 위해선 새로운 가치관을 가져야겠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후배인 인턴들도 여기 교육에 참여하도록 자원입대를 시키자. 그래서 인턴 과정이 생깁니다. 또 대학교수들은 우리 교수들만 교육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땐 학도 호국단이었거든요. 70년대에는 학도 호국단 간부들도 여기 대학생 간부반이라는 과정을 하나 만들어가지고 전국의 대학에서 간부들이 와서 교육을 받으면 학교에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것이다. 그래서 대학생 간부반.
또 사법고시를 합격한 사람들이 판검사들이 교육을 받고 나가가지고 자기 후배들인 사법고시 합격한 사람들이 사법연수원에 입교를 해서 바로 교육을 받는 것이 아니라 교외 교육이라는 형태로 바로 수원에 있는 연수원에 입교를 시켜가지고 교육을 받고 정식 이년과정에 사법 연수교육 받는 다든지, 이런 등등으로 농촌지도자부터 시작한 새마을 교육이 이렇게 대상이 학생으로까지 번집니다. 결국은 이 새마을 교육이 국민 교육으로 번져 나가고 교육을 받은 국민들이 소속된 집단에서 올바른 생활 시민의식을 가지고 생활을 하게 되니까 바로 국민운동으로 승화한 계기가 새마을운동에 있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문. 농민이나 같이 교육을 받은 거, 한반이 돼서 같이 했는지 그런 경우가 있었나요?
답. 입교를 하면 과목에 따라서 프로그램에 따라서 대강당에서 합반을 하는 경우가 잇고 분반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농촌 새마을지도자들한테는 농사지도를 위한 농업기술 교육을 할 때는 사회지도자 받을 필요가 없잖아요. 그때 분반을 해요. 또 여성에 대한 육아 교육이라든지, 어린이 놀이터 운영하는 문제라든지, 그럴 때는 남자 지도자가 받을 필요가 없거든요. 그래 부녀 지도자 반에 받게. 이래 분발을 했다가, 다시 성공 사례를 듣는다. 역경을 이겨낸 기업인, 역경을 뚫고 농촌 마을을 잘사는 마을로 생활환경이나 소득을 높이는데 기여한 그러한 성공사례를 가진 리스트 쭉 있었잖아요. 그런 사람들 얘기는 같이 들어요. 그러면 그것이 직분은 다르다 해도 그런 정신력을 가지고 기업을 운영하고 행정을 이끌고 농촌을 이끌고 모두에게 적용되는 심적인 자극을 줄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될 때는 합반을 하고 그리고 또 이제 프로그램에 따라서는 대화의 시간이 있는데 그때는 사회지도층, 농민, 부녀지도자 산발적으로 서로 이렇게 하니까 서로 의견교환이 되고 그러니까 합반이 되고
문. 특징이라고 하면?
답. 특징이라면 두 가진데 성공사례로 자극을 주는 거. 또 하나는 분임토의를 통해서 하나의 결의에 앞당기는 저 사람은 저렇게 성공적으로 일을 추진했는데 나는 그동안 무엇을 어떻게 했던가. 하는 반성이 전제가 된 나머지 결의를 하게 됩니다. 내가 돌아가면 우리 기업을 식당이 간부식당과 사원식당이 따로 있었는데, 인제 안 되겠다. 사원식당과 간부식당의 벽을 허물어야겠다. 이런 실천 그런 것들이 바로 여기에서
문. 성공 사례가 청와대에 월례보고에 그런데 올라갔나요?
답. 그것이 나중에, 처음에 성공사례의 시조는 충북 청원에 잇는 하사용 씨입니다. 그분이 농민 소득증대 특별 사업 경진대회를 과거의 서울 시민회관, 지금은 그거 헐리고 새로 세종문화회관이 건립이 됐죠. 시민회관에서 경진대회를 할 때, 그때 하사용씨가 이 엿장수를 하면서 하천 부지를 확보를 해가지고 채소농사를 져가지고 성공하게 된 그런 사례를 거 청중 앞에서 발표를 했거든요. 그러니까 당시 박정희 대통령께서 참석을 하셨는데 단 아래로 내려 와가지고 하사용씨 성공사례를 경청하시면서 눈시울을 적셨다고해요. 그것이 계기가 되가지고 새마을교육에는 하사용씨와 같은 정말 역경을 뚫고 농촌마을을 잘사는 마을로 이끄는 그런 사람들의 사례를 발표를 하게해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열의를 갖도록 해야겠다. 그래서 그 후에 성공사례 발표자를 많이 발굴해가지고 새마을교육에서 그것이 특징적인 요인에 하나고 그리고 그걸 듣고 그냥 말면 교육의 의미가 없거든요. 저 사람은 저런 역경도 견디었는데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이 분임토의라는 소집단 토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특징의 두 가지이죠.
문. 그전에 분임토의 같은 경우 나중엔 공장 분임조 활동, 품질관리 등 굉장히 파급효과가 분임토의가 마을까지 내려간 거죠. 파급효과가 굉장히 컸네요.
답. 파급효과가 어디까지 미쳤냐면 민주적 의사결정기법을 익힌 사람들이 마을에 돌아가서 만약에 지붕 개량사업을 하는데 교육을 받은 새마을지도자 단독으로 앞장서서 그냥 강제적으로 끌면 참여를 안 하잖아요. 교육을 받은 지도자가 돌아가서 마을회관이라든지, 또는 당산나무 밑에 그늘에 주민을 불러다 모아놓고 우리가 마을의 환경을 고치기 위해서 지붕개량 담장개량을 해야겠는데 방법은 이러이러 하고 우리가 노력동원을 하고 자제는 어떻게 충당하고 이런 방법으로 해야겠는데 여러분 어떻습니까? 그러면 처음에 반대자도 있을 거야, 거기서 민주적인 의사를 수렴을 해가지고 이끌면 지도자 혼자 널뛰고 장구 치는 게 아니라 주민들이 결의에 참여했던 사람들이니까. 반드시 그게 참여하게 되는 거죠. 그랬던 민주적 의사결정이 풀뿌리 민주주의의 하나의 밑거름이 됐다니까요. 그러니까 지방자치의 풀뿌리는 바로 새마을교육의 분임토의가 점차적으로 농촌마을에서부터 확산된 결과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학자들이 그렇게 보고 있어요.
문. 분임토의와 성공사례가 성공의 큰 요인이었다.
답. 근데 이제 비판도 있었어요. 새마을교육이 인지적인 교육이 아니고 정의적인 교육이냐? 가슴을 뜨겁게 하는 것은 빨리 식는다. 머리를 차갑게 하는 그런 인지적인 교육이 병행되어야 그 뜨거운 열의가 오래 지속되지 식지 않지, 가슴 뜨거운 성공사례 이렇게 해서 되겠느냐? 이런 말이 있었는데 그러나 새마을 교육에선 성공사례 분임토의와 같은 정의적인 면에 호소하는 그런 기법이 적중했다. 이렇게 볼 수 있는데 제가 직접 하버드에서도 새마을교육을 하나의 지역사회 개발의 모델로 새마을운동을 꼽았다고 보면 그 모델을 성공시킨 뒷받침이 특수한 형태의 사회교육으로 새마을교육을 꼽았다고 얘기 합디다.
문. 초기에 교육을 준비할 때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답. 초기에는 새마을 교육 스타일이 농협대학의 기숙사 스타일과 비슷했어요. 김준원장께서 농협대학 교수로 제직하시면서 이 교육을 하나의 형태를 잡았는데 그 뿐만 아니고 김준 교수님은 전라북도 순창에 있는 가맛골에 농민학원을 차려놓고 전북대학의 교수를 하다가 거기로 가가지고 광주시내에 껌팔이, 구두닦이들을 모아가지고 산지개발을 하면서 자급자족 그런 생활을 한 적이 있거든요. 그걸 모태로 해서 인제 농협대학에서 교육하는 스타일ㅇ르 점차적으로 보완 발전시킨 형태가 새마을교육 스타일이에요. 혹자는 가난한 농부 학교 교육스타일이 아니냐. 그러는데 그건 아니고 오히려 독농가 연수원에서 교육을 할 때 가난한 농민학교 김용기 장로님을 초빙강사로 초대해서 강의를 두 시간씩 맡겨서 한 적은 있죠. 저도 가난한 농민학교 외래교수로 출강도 하고 마찬가지죠.
문. 가난한 농민학교는 어떤 학교였나요?
답. 그분은 종교적인 차원에서 그분도 뜻이 아주 숭고했죠. 농촌을 잘살게 하기 위해서는 농민 지도자들의 의식을 바꾸어야겠다. 그래서 하남에서부터 시작한 것이 원주에 제2가난한 농민학교 그리고 절약하고 열심히 일하고 그런 문제는 새마을 정신의 근면, 자도, 협동과 일치가 되죠.
-새마을교육은 분기별로 하면 주요 테마가 어떻게 변하는지 시작부터 80년대 까지.
교육이 72년에 시작 됐을 때는 농촌개발, 그러니까 지역 개발을 위해서 처음에는 바로 잘살기 운동으로 직결되는 소득증대 바로 들어간 게 아닙니다. 처음에는 농촌의 환경부터 고쳐야 되겠다. 그래서 교육도 70년대 초반에는 환경 개선 사업으로 치중이 됐죠. 그러니까 지붕개량 담장개량 또 농로개선 그런 것들. 그러다가 종자 갱신년으로 들어가면서 농촌의 소득 그 농촌의 소득 그리고 개별적인 영농활동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협동할 수 있는 묘자리를 공동으로 한다든지 이렇게 해서 소득을 넓히는 문제. 그러다 70년대 중반 들어서면서 농촌개발에만 새마을교육이 집중된 것이 아니라 도시 새마을 운동으로 번지면서 도시민에 대한 올바른 시민의식을 가진 같이 시민의식 개혁으로 같이 병행하죠. 그러니까 70년대 초에 농촌개발에 대한 지도자 양성을 거기서 딱 끝났 것이 아니라 그거 계속하면서 도시민에 대한 의식 개발을 위한 교육이 같이 병행이 되고 그다음에 80년대 들와서는 역시 농촌 교육윽 계속하면서 시민 교육을 거기 병행해서 같이한 그런 셈이죠.
문. 나중엔 전국에 워낙 교육인원이 많아서 다 수용하기 힘들었겠네요.
답. 네 처음에 정규연수생이 많았죠. 그런데 다 직능별로 했죠. 그러니까 수원에 있는 새마을 지도자연수원만 다 수용할 수 없으니까. 삼청동에 있는 교원들이 수원으로 왔는데 인제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교육을 받았는데 삼청동에 교원 연수원이 생겼죠. 거기도 새마을교육. 또 수원에 있는 지방 행정연수원도 새마을교육프로그램. 또 시도 공무원교육 프로그램도 새마을교육. 그리고 안양의 김일주씨가 하던 직장 새마을연수원 거기 직장인들. 부산의 상공인들 위한 공장 새마을 연수원. 또 대구의 새마을 연수원이라는 데가 있어서 거기는 거기 나름대로 그러니까 전국이 새마을교육의 한 붐이었죠. 또 최신공무원 교육원 같은데 또 새마을 교육 프로그램을 하는데 모든 교육 요원들이 수원 새마을지도자 연수원. 우리 연수원에가 가서 일단 교육을 받고 그 프로그램을 전파를 시키는 그런 역할을 해서 새마을교육 열기가 고조됐을 때는 그런 연수원들이 많아서 분산에서 수용할 수 있는 이점도 있었죠. 나중에 연수원이 피크에서 점차 내려오면서 그런 연수원이 다 정리가 되고 지금은 분당에 있는 새마을주앙연수원 과거에는 새마을본부에도 본부연수원이 있었고 전라도 장성에도 남부에도 연수원이 있었고. 그리고 지금 분당에 있는 연수원을 새마을지도자 연수원이던 것을 성남연수원 그리고 명칭이 쭉 바뀌다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 이렇게 바뀐거죠.
문. 아까 말씀해주신 로고 어떻게 만들게 되신 건지 얘기 좀 해주시죠.
답. 1972년 1월 14일 날 연수원이 생겼는데 첫 연수생은 1월 30일날 140명이 전국시군에서 한명씩 착출한 독농가가 오기로 되어있는데 당시 김준씨가 농협대학의 교수직을 유지하면서 독농원 연수원장이 됐죠. 그래서 그때 저하고 같이 불교에서 기독교에서는 또 뭐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그런 형태로 연수생들의 심성을 고요히 하면서 새로운 결의를 다질 수 있는 새로운 교육프로그램을 만들려고 불교 조계종 총무원, 강원용 목사, 천도교 지금저 인상동에 있는 천도교 본부 있잖아요. 최득신 교령. 이런 분들이 있었어요. 그런데를 김준원장님하고 같이 돌면서 이제 입교생이 곧 들어오는데 바쁘다 이거예요. 준비하는 것이 그러니까 박선생이 배지를 한번 도안해 보아라. 그래서 제가 도안을 했는데 그게 지금 그거예요. 그때 독농가연수원에서 행정을 담당했던 분이 미대 어떤 교수한테 채택을 전제로 해가지고 의뢰를 했죠. 근데 그분이 만든 것은 반딧불 형태로 형설지공을 이라는 그런 뜻으로 만든 것을 제가 봤어요. 근데 제 꺼하고 두 개가 내무부에 올라갔는데 제 것이 채택이 됐죠. 그것이 새마을 상징의 표상이 아니고 당시는 독농가 연수원 배지를 위한 도안이었죠. 그런데 나중에 이것이 독농과 연수원에서 새마을지도자연수원으로 그러다 이 배지가 새마을 배지로 그냥 채택이 돼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거죠.
문. 안에는 어떤 정신 같은 것이 포함하고 있나요?
답. 안에 둥근 원은 마을을 뜻했고 바탕색이 노란색이거든요 풍요를 황금 들판을 연상해서 풍요를 뜻했고 그다음에 새싹, 푸른 새싹은 근면, 자조, 협동의 핵을 중심으로 번져나가는 마을의 지도자를 양성한다는 그런 뜻으로 제작이 된거죠.
문. 제대로 된 거네요. 그 당시에는 이렇게 길이 남으리고는 생각 안했죠. 요즘도 보면 감회가 새롭죠.
답. 네, 그래서 제가 지금 사진하자나요. 전국의 마을 읍이나 또는 동사무소나 이런데 걸린 새마을 기를 사진 작품을 남기려고 그래요. 포트폴리오를 남기려고 그래요.
문. 마지막으로 새마을운동이 지금도 새마을운동이 왜 필요한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야하는지
답. 그런데 이제 원래 이 나라가 제대로 갈려면 나라가 괜찮으면 우리 사회가 제대로 되려면 새마을 교육 같은 형태의 교육이 빨리 없어져야 된다고 전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단 전제가 있어요. 시민이 또는 국민이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행동을 할 때는 이건 필요가 없었어요. 그러나 오늘 같이 쓰레기가 관광지 함부로 버려지고, 질서가 문란하고 그리고 가치관이 혼탁한 이런 사회가 앞으로 계속된다면 새마을 교육은 계속되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가치관을 갖도록 하기 위해선 하나의 의식을 개혁하는 교육으로서 새마을 교육은 계승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단 시대 상황에 맞는 그런 프로그램을 계발 적용을 해야지 과거에 새마을 교육에 핵심이 성공사례와 분임 토의만 고집해선 안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형태의 프로그램. 그것은 반드시 우리가 처한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를 분명히 제시를 하고 이 시대에서 우리가 올바르게 생활 할 수 있게 우리가 어떤 자세로 나가야겠다. 그런 분명한 줄거리 속에서 새마을교육의 내용과 방법은 사회 발전에 따라서, 국민의 의식의 변화에 따라서 계속 보완 발전시켜나가야 이 새마을교육이 앞으로도 계속 우리 국민들, 우리 국가를 위해서 필요한 교육이 될 것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