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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답. 저는 원래 대학에 다닐 때부터 농촌계몽 운동을 했었습니다. 평소에 농촌이 어떻게 깨어날 수 있는가? 이것에 대해 많은 관심이 있던 차에 돌아가신 김준 원장이라고 하는 분이 우리 연수원에 원장으로 계셨습니다. 그분이 같이 우리 연수원에 와서 농촌을 잘살게 하는 운동을 해 볼 수 있겠느냐 하셔서 새마을정신교육의 요람이라고 하는 수원 새마을지도자연수원에 가서 제가 교육 담당을 하게 됐습니다.
문. 당시 새마을운동에 대한 마을과 지역, 정부의 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답. 그때 당시에는 어떻게 보면 새마을에 미치겠다는, 미쳐보고자 하는 그런 사람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미쳐보자고 하는 신념이 어떻게 시작 되었느냐 하면 교육을 통해서입니다. 새마을정신교육을 1970년부터 해 왔습니다. 이 새마을정신교육을 통해서 교육을 받고 간 일선의 지도자들이 가슴에 뜨거운 불덩어리를 안고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그 사명감, 그리고 하면 된다는 신념, 그것을 하고야 만다는 의지, 이것들이 교육을 통해서 가슴에서 타오른 것입니다. 그 타오르는 열정을 자기 마을에 가서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 열정이 실질적으로 통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새마을정신, 그런 사명과 신념과 의지를 갖춘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것이 참으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 그때에 새마을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거의 미쳐있었습니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해야만 이 나라가 잘살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의지와 신념과 사명이 항상 불타있었습니다. 그것들이 모여서 하나의 핵을 이루어서 그게 마을에 가서 폭발되는 것입니다. 대단했습니다. 그 열정이 우리 대한민국을 오늘날에 이르는 대한민국으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 열정들이 모여서, 대단했습니다.
문. 주로 무슨 사업을 추진했습니까?
답. 그때 처음 저희 수원 새마을지도자연수원에 입교하는 대상자 선정 과정에서 참 신중했습니다. 아무나 데려다 교육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해 보겠다는 의지를 가진 지도자들을 저희가 우선 초청을 했습니다. 이를테면 어느 지역, 특정 지역에 한해서 집중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전국에서, 그런 의지들을 가진 지도자들을 전국적으로 발탁을 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가뜩이나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온 데 다가 그때 당시 교육을 며칠 했느냐면 12박 13일, 10박 11일 그렇게 했습니다. 연수원에서 심지어 15일까지 교육을 했습니다. 15일 동안 교육을 받으면서 ‘이것은 내가 해야 해, 이 마을을 잘살게 하는 운동은 내가 주축이 돼야 해.’ 이것을 확고하게 가슴에다 심어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을에 가서 핵분열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것을 전국적으로 각 전라도면 전라도, 경상도면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할 것 없이 마을에 가서 그것을 발산해서 그 사람들이 마을을 위해서 우선 우리 힘으로 무엇인가 해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선의 시군구 행정기관에서도 그렇게 하려고 하는 지도자들에게만 지원을 했습니다. 아무나 지원을 한 것이 아니라 열심히 해보겠다는 마을, 우리도 하면 된다고 하는 의지들이 모인 마을, 그 마을들을 집중적으로 지원한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마을에서 볼 때 ‘아, 저 마을은 저렇게 잘살게 되는구나, 소득도 올리고 환경 사업도 저렇게 잘 되어가는구나.’ 하게 되고 그러니 다른 마을들도 ‘우리도 한번 해보자.’하며 그것이 경쟁심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문. 사업 추진상 제일 어려웠던 점은 무엇입니까?
답.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우선 제일 큰 어려움이 일선의 교육을 받고 간 사람들이 첫 번째 벽에 부딪친 게 뭐냐면 소위 보수주의 사상,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마을의 유지들이 가장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비교적 서민, 대중적인 사람들은 우리의 힘으로 한번 해 보자고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마을 유지들은 ‘그것 하면 뭐해, 그것 해서 뭐가 잘 돼.’ 하는 비아냥거림이랄까, 어떻게 보면 냉소랄까? 이런 것들을 주로 유지들이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기존에 잘살았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가장 큰 장벽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저희가 그때 당시에 교육을 끝내고 나면 현지 마을에 가서 하는 현지 지도라는 게 있었습니다. 그 마을의 우리 교육을 받고 간 지도자들에게 어떤 애로 사항이 있는가, 그 애로 사항을 현지에 가서 직접 듣고 저희 중앙 교육에 반영을 시켰습니다. 또는 일선의 시장, 군수나 고위 공직자, 지방 기관의 공직자를 만나서 ‘이런 장애 요소가 있다, 그것을 여기 있는 사람들이 뒤에서 조금씩만 지원해주고 같이 힘을 거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모두 삼위일체의 정신으로 그 지도자가 어떤 소득 사업이나 환경 개선 사업을 할 수 있는 여건을 우회적으로 같이 감싸주는 그런 역할을 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또 다시 불러서 교육을 시키고 모셔다가 지도 사업이 어떻게 되고 있는가를 다시 얘기 들으면서 또 문제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다시 현지 행정기관이나 마을에 반영을 시켰습니다. 이것을 반복적으로 우리가 시행해 왔던 것입니다.
그런 데서 하나하나 어떤 것이 이루어지는 그 보람을 만들어내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어렵게 지낸 사람들, 일을 했던 사람들이 이루어진 것을 보고 ‘아, 어느 마을이나 일이 어려운 게 많구나, 그러나 이렇게 해결하는 방법이 있구나.’ 이것을 스스로 깨닫도록 했습니다. 그것을 행정기관과 우리 교육기관이 서로 의기투합하여 옆에서, 사이드에서 지원을 해주고 도와주는 그런 역할을 같이 해나갔던 겁니다.
문. 생각만큼 잘 진행되지 못했던 새마을운동은 무엇인가요?
답. 많죠. 마을의 지도자가 이 사업을 해야 되겠다고 할 때에도 소위 보수적 사고를 지닌 사람들의 반대, 그리고 행정기관의 비협조가 있었습니다. 전국적으로 보면, 행정기관이 다 협조를 잘했던 것은 아닙니다. 저희가 행정기관의 현지 마을을 지도하면서 보니까, 저는 전국을 다 돌아다녔습니다. 대한민국에 우리 지도자들이 한다는 마을, 그때 당시 교수가 한 20명도 채 안됐는데 그분들이 한 교육 주기가 끝나면 전부 다 일선 농촌으로 갑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몇 개의 시골, 한 10여 개씩 돌아다니면서 그런 애로 사항을 청취하고 행정기관과의 교량 역할을 해주는데, 그 안 된 사업들에 대해 저희가 보고서를 써서 행정기관에 협조를 의뢰합니다. 이 마을이 이런 것 때문에 잘 안 되고 있다, 이 마을은 이런 것이 문제다, 그러니 행정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것 등에 대해 협조를 요청합니다.
그리고 그 마을의 유지들을 교육을 통해서 지원하는 현지 지도 교육, 마을 지도 교육이란 것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해야 하는 경우에 현지에 가서 지도 교육을 하면서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데 그것이 100% 다 잘 됐던 것은 아닙니다. 아마 대체로, 제가 제 논문에서도 썼습니다만, 그렇게 해서 성공을 거둔 마을이 전체적으로 한 50% 내지 60%입니다. 그러나 그 50% 내지 60%가 하나의 불꽃 촉진제가 되었습니다. 다른 마을에도 ‘아 우리도 해야 돼, 우리도 해야 돼.’ 하는 그런 깨우침을 불러일으키게 한 것입니다. 그것이 자극적 효과, 촉진제 역할을 했던 겁니다.
참으로 어려운 것이 많았습니다. 초기에 예를 들면 초가집을 개량한다든지, 마을 우물을 판다든지, 마을을 건너는 농로를 건설한다든지, 마을 앞 도로를 개설한다든지 그런 사업들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저희는 이 소득 사업을 하면 소득을 올릴 수 있다고 하는데 누가 반대해서 못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당초에 했던 대로, 지도자나 현지 마을의 우리 새마을가족들이 생각했던 대로 그대로 다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이루어졌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새마을이 그런 가운데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보람 있는 것이고 정말 뜻 있는 국민운동이 됐던 것입니다. 그렇게 이루어지니까 우리도 잘살 수 있다, 우리도 하면 된다는 정신을 우리 국민들에게 심어준 하나의 정말로 귀한 정신운동이 됐던 겁니다.
문. 어떤 점이 아쉬웠습니까?
답. 문제는 이렇습니다. 새마을운동이 1970년대 그러니까 고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이 살아계실 때는 새마을정신이 정말 충만했습니다. 이 국민운동, 새마을운동에 있어서 국가 통치권자의 철학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저희는 정말 처절히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그때 당시에 박정희 대통령께서 어떻게 하면 이 나라를 잘살게 할 수 있을까, 우리 민족을 어떻게 하면 잘살게 할 수 있을까, 우리도 하면 될까 이런 생각 속에서 출발하여 그분의 강한 의지로 출범했던 새마을운동이었습니다. 그분이 1979년 돌아가시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 철학들, 국가 통치권자의 철학이 각 시군구의 행정기관의 시장, 군수들이나 시도지사들, 이 사람들 가슴 속에도 전도가 됐던 것입니다. 그 철학이 먹혀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시고, 서거하시고 나서 상황이 그렇게 달라졌습니다.
저는 외국의 에스캅 (ESCAP) 소속으로 중국이나 동남아 일대에 강의를 지금도 나가고 있습니다. 거기서도 항상 제가 국가의 지도자, 국가의 최고 지도자들에게 그래서 통치권자의 철학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지금 동남아 22개국에서 새마을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에서 성공하려면 국가의 통치권자가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우리도 하면 잘살 수 있다, 우리도 하면 된다는 철학이 마음에 콱 박혀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철학이 없는 국민운동은 국민운동으로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새마을운동도 그렇습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새마을운동이 활활 탔습니다. 그런데 서거하시고 나서부터 국가 통치권자가 그런 철학을 안 가지고 있으니까 새마을운동이 그때부터 시들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최근까지도 새마을운동에 몸담아 있었습니다만, 그것을 저희는 아주 통렬하게 느껴 왔던 겁니다. 그것이 참으로 아쉬운 문제라고 봐야 하겠습니다.
문. 일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무엇입니까?
답. 저는 항상 우공 영감 얘기를 합니다. 저는 연수원에서 강의할 때도, 원장 하기 전에 교수로서 강의할 때도, 원장 할 때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얘기가 우공 영감의 일화입니다. 아는 분은 거의 대부분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우공 영감의 이야기는 전국의 많은 지도자들이 얘기를 듣고 갔습니다. 어느 바보 같은 영감, 소같이 미련한 영감의 못사는 마을 앞에 쪼그마한 바다가 하나 있었습니다. 근데 그 마을은 농민, 마을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농토가 부족하다 보니까 그 바다를 메워서 논을 만드는 것이 소망, 소원이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우공 같은 미련한 영감, 소 같이 미련한 영감이 ‘시작하자. 이제부터라도 시작하자, 나부터 시작하자.’라고 하는데 그것이 우리 새마을정신하고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공 같은 영감이 그 바다 뒤에 있는 산의 흙을 퍼다 바지에 짊어지고 그 바다를 메워 나갔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수 년, 그 바다에서 터줏대감 역할을 하는 바다 물귀신이 ‘야, 이 미련한 우공 영감아. 그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이 바다가 바뀌어 옥토가 되겠나. 이루지도 못할 것 일찌감치 포기하게나.’라고 합니다. 우공 영감이 바지에다 흙을 짊어지고 버리고 뒤 돌아서면서 그 바다의 물귀신, 터줏대감이 조롱하는 소리를 듣고 하는 말이 ‘야, 이 바보 같은 물귀신아. 너는 이 늙어 가는 우공만 보이고 이 뜻을 이어가서 계승할 나의 후손들, 내 주변에 있는 주민들의 뜻을 너는 모르지? 그러니 너는 이 좁은 바다에서 이 물귀신이나 하지.’하고 돌아서면서 가서 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우공 영감의 뜻을 이어받아서 마을 주민들, 후손들이 그 바다를 메워 나갔습니다. 그렇게 옥토를 만들어 가는 겁니다.
이런 정신으로 일했던 우리 지도자들이 전국 곳곳에 무수히 틀어 박혀있었습니다. 이 바보 같은 영감들이 있었기에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가 바뀐 것입니다. 그 우공 같은 영감들이 없었다면, 그 바보 같은 지도자들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경제 개발 5개년, 1차 계획, 2차 계획,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도 하면 된다는 의지를 심어준 것이 중요합니다. 그게 새마을정신입니다. 그것을 그때 당시 우리 새마을지도자들이 협의했던 겁니다. 그게 새마을정신입니다.
문. 지도자로서 자랑스러운 점과 아쉬운 점은 무엇입니까?
답. 지도자로서, 새마을운동을 했던 사람으로서 가장 보람 있었던 것은 우리도 해야 한다는 사명, 하면 된다는 신념, 하고야 말겠다는 의지, 이것이 오늘날 우리 새마을운동의 기적, 대한민국의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기본 밑바탕이 된 것입니다. 중앙 연수원에 혹시 가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중앙 연수원 대강당 앞에 지금도 있습니다. 제가 거기에 표구를 커다랗게 써 붙여 놨습니다. 지금도 있습니다. 해야 한다는 사명, 그리고 하면 된다는 신념, 그리고 하고야 말겠다는 의지. 그것이 새마을운동의 보람인데 마을 지도자들이 목표했던 사업을 10년, 20년 사업으로 이루고 나서 현지 마을에 가서 완성할 때 제가 전국을 정말 많이 다녔는데, 거기에 가서 그 뜻이 이뤄진 사업을 보고 그들과 더불어 밤을 새가면서 울던 그 보람을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 어렵게, 어렵게 해냈던 사업입니다. 그런 마을지도자들, 그 바보 같은 지도자들이 이루어 냈던 기적의 성공, 그런 사례들을 가서 듣고 같이 눈물 흘리고 가슴을 같이 어루만지면서 나눴던 그 성공, 성취감 그것은 정말 보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마을이 다 잘되는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했던 지도자들의 마을은 성공해서 잘살게 됐는데 이를테면 ‘그것 해봐야.’ 하는 식으로 방관적 자세를 지녔던 지도자들의 마을은 지금도 못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 당시에도 못살았고요. 그래서 성공한 마을과 성공하지 못했던 마을의 격차, 삶의 질 차이가 확연히 갈라지게 된 겁니다. 왜 그랬던가를 생각하고 박정희 대통령하고 좀 더 새마을운동을 했더라면, 그것을 마저 하고 물러났어야 하는 것이 아쉬움입니다.
문.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 수 있습니까?
답. 저는 참으로 열정적입니다. 정말 열정적인 지도자입니다. 열정적으로, 뜨겁게 새마을운동을 했습니다. 저는 뜨거운 가슴으로 새마을운동을 했던 사람입니다. 새마을운동은 뜨거운 가슴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운동입니다. 뜨거운 가슴을 갖지 않은 사람은 새마을운동에서 성공하지 못합니다. 우리 일선 지도자들이 성공했던 것도 뜨거운 가슴을 가졌기 때문에 성공한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 한국의 발전상을 이룬 초석입니다. 1차 경제 개발 계획, 2차 경제 개발 계획,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새마을운동의 자립정신, 우리 힘으로 스스로 해보겠다는 자립정신, 자주 정신, 근면 정신, 협동 정신, 이것이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우리 새마을운동의 기본 정신인 근면, 자주, 협동 정신의 가장 기본적인 어떠한 하나의 줄거리는 우리 새마을운동을 좀 더 국민들이 이해해줬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국민들의 이해를 구하기 위해서는 새마을에 몸담았던 지도자들, 또 새마을에 종사하는 관계자들의 몸에 그런 정신이 배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보니 일부 국민들이 우리 새마을을 보는 시각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시대의 흐름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저는 이 새마을운동의 기본 정신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살릴 수 있습니다. 저는 얼마든지 살릴 수 있다고 봅니다. 전 그렇게 할 자신이 있습니다. 저에게 그런 역할을 주신다면 그것을 해내야 합니다. 시대가 변했으니까 어렵다? 그렇게 하면 아무것도 이루어질 것이 없지요.
문. 지도자로서 본인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입니까?
답. 제 성격은 조금 급한 편입니다. 그런데 새마을운동을 하다 보니 급한 게 더 좋습니다. 우리 일선 지도자들의 새마을의 애로 사항, 마을의 어떤 사업, 환경 개선 사업이나 소득 사업이나 어떤 숙원 사업에 대한 애로 사항을 저는 시장, 군수나 일선의 지도자, 관련 공직 기관, 관계 기관의 공직자들이나 위의 지도층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얘기합니다. 이것이 더 빠르더라고요. 이것이 좋은 점도 있었습니다. 성격이 급한 것이 나쁘기도 하지만 새마을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너무 느긋하면 안 됩니다. 항상 쫓기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한 가지, 제가 그것이 단점이자 장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새마을의 근본 취지, 그러한 정신, 옛날 새마을의 근면, 자조, 협동 정신의 줄거리였던 해야 한다는 사명, 할 수 있다는 신념, 해야만 한다는 각오, 의지, 이것에 관련된 교육을 지금이라도 해야 합니다. 저는 그 교육이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것이 새마을정신, 새마을운동, 국민정신의 기조가 돼야 하고 근간이 돼야 합니다. 그것을 어떻게든지 만들어내야 합니다.
문. 당시 정부의 정책이나 공무원들의 지원은 어떠했습니까?
답. 당시 시장, 군수의 역할이 크더라고요. 지금은 구라고 합니다만, 그때 당시의 시장, 군수. 대통령이 관심을 가지니까 시도지사, 시장, 군수가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 관심을 가진 시장, 군수들이 진심으로 고민하는 것을 참 많이 봤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군을 잘살게 할까? 우리 군을 잘살게 하기 위해 저 마을들, 저 마을들을 어떻게 잘살게 해줄까?’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렇게 하는 시장, 군수들은 정말 주인 정신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시장 군수가 있는가 하면 적당히 시장, 군수직을 수행하고, 적당히 하는 척만 하는 시장 군수들도 많았습니다. 그것으로 마을의 빈부의 차가 엄청나게 벌어지는 것입니다. 원래 새마을운동을 하기 전에는 못사는 어촌이나 벽촌 같은 데는 정말 못살았습니다. 그런데 새마을운동을 하고 나서 벽촌이나 어촌이 더 잘살게 된 것입니다. 그 마을에 옥토가 많다고 해서 다 잘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옥토가 하나도 없다 하더라도 다른 데서 ‘어떻게 소득사업을 해서 성공을 할까?’ 이렇게 고민했던 마을들은 잘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전답이 많고 옥토가 많다 하더라도 ‘이 정도면 됐지.’ 하는 마을들은 그 잘사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새마을운동의 잘되고 못되는 하나의 갈림길이 되는 것입니다.
문. 새마을운동 이전과 이후는 어떻게 변화했습니까?
답. 우리나라 역사를 반 만 년의 역사라고 하지 않습니까? 반 만 년의 역사에서 우리도 잘살 수 있다고 하는 확실한 증표를 보여준 것이 새마을운동입니다. 새마을운동을 하기 전까지는 온 국민이나 민족이 반신반의했던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잘살 수 있겠나, 거기서 포기했던 겁니다. 그냥 자포자기했던 겁니다. ‘안 돼, 해봐야 안 돼.’ 그렇게 자포자기했던 국민들에게 새마을운동이야 말로 ‘하면 되더라, 하니까 되더라, 그러니 또다시 일어서서 해야 한다’는 정신을 불러일으킨 것이 새마을운동의 성과입니다. 다른 말이 필요 없습니다. 어떤 형이상학적인 것, 이런 것이 필요 없습니다. 하니까 되더라는 것이 새마을운동입니다. 그리고 새마을운동을 통해서 우리가 보여줬지 않느냐, 그것이 새마을운동입니다. 반 만 년의 역사를 바꿔 놓은 것이 새마을정신입니다. 근면, 자조, 협동 정신이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못살면 못사는 대로, 천하면 천한 대로 살아왔던 민족을 ‘아 아니야, 아니야. 이렇게 하니까 됐어. 그러니까 해야 해.’하는 민족으로, 그렇게 새마을운동이 우리나라, 우리 민족의 운명을 바꿔 놓은 것입니다. 그 차이를 어떻게 말로 할 수 없습니다. 확연하죠. ‘하니까 되더라, 하자.’ 이것을 심어 준 것입니다.
그때 당시 새마을노래 중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정말 헐벗고 굶주린 민족이었습니다. 우리 반 만 년의 역사는 정말 가난하고 헐벗고 서러운 역사였습니다. 그 서러운 민족이 왜 이렇게 보람과 긍지를 가지게 되었느냐 하면 새마을운동을 통해서, 소득 사업을 통해 우선적으로 외적 요건인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됐습니다. 그 다음에 먹고 살 수 있다 보니까 우리가 사는 시설도 문화 시설로 좀 바꿔야 되겠다고 한 것입니다. 비로소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그게 가능할 것 아닙니까?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문화 시설, 문화 복지가 안 됩니다. 그러니까 먹고 사는 문제가 새마을의 소득 사업을 통해서 확연히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환경 개선 사업도 이뤄집니다. 그리고 문화 사업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새마을운동의 이전과 이후의 분명한 차이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먹고 사는 문제, 문화 시설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새로운 병이 들어왔습니다. 참 모질고 무서운 병이 들어왔습니다. 그 병이 뭐냐 하면 정말 나밖에 모르는 사회, 남을 배려하지 않는 사회입니다. 사람은 혼자 못 살아 갑니다. 사람 인 (人 ) 자를 한문으로 보세요. 사람 인(人 ) 자는 서로 기대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 인 (人 ) 자입니다. 기대어 사는 것이 사람이 사는 사회인데, 사람 인 (人 ) 자에서 기둥 하나를 뽑아보세요. 그럼 이게 바로 서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이 사회가 자기밖에 모르는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정치한다는 인간들, 겉으로는 번지르르하게 국민을 위한다고 하는 인간들도 자기밖에 모릅니다. 재벌들 보세요. 자기밖에 모르잖습니까? 그래서 자기 친자식들에게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양도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도둑질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뭐냐면 소위 근본이 안 되어 병이 드는 그런 정신적 병입니다. 육체적인 병은 지금 많이 발전해서 장수, 백세시대, 구구팔팔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는데 정신병이 들고 있단 말입니다. 이 정신병을 이 나라에서 몰아내야 합니다. 정신병을 몰아내지 않으면 이 나라는 진정 잘사는 사회가 아닙니다. 그 정신병 환자들 몰아내기 운동, 이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나라가 지금부터 해야 할 제2의 새마을운동입니다. 정신병 환자들 몰아내기 운동, 저는 이것을 주장합니다.
문. 후배들이나 국민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답. 지금 이 사회가 큰 병에 들었습니다. 이 사회가 잘못된 것은 길거리를 다니거나 교통질서를 지키거나 질서 의식이나 아니면 공공 의식 같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이래서는 안 됩니다. 대한민국의 근본 교육이 잘못된 것이 인성교육이 실종된 것입니다. 그러면 인성 교육이 실종된 상태에서 새마을정신에서 인성을 어떻게 가져다가 결부를 시킬 것이냐? 새마을정신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은 그때 당시에는 솔선수범해서 길거리의 휴지 줍기 같은 것, 하천의 오물 버리는 것 등을 전부 다 솔선해서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반 시민들도 ‘우리도 이렇게 해서는 안 되지, 우리도 저렇게 본받아야지.’ 했는데 요즘에는 길거리 다니면서 못된 짓 하는 것을 아주 스스럼없이 하고들 있습니다. 이것 참 잘못됐습니다. 차를 타면, 저도 오면서 버스를 타고 왔습니다마는 타고 오면서 봐도 젊은 학생들이 우리 같이 나이 든 사람들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성 교육과 관련된 것입니다.
근본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모든 나무나 사람이나 생명체나 근본이 바로 서야 그 줄기가 바로 섭니다. 뿌리 교육을 시켜야 하는데 뿌리 교육을 안 시키다 보니 나무가 제멋대로 옆으로 넘어지거나 쓰러지거나 나자빠지거나 합니다. 뿌리가 바로 서면 줄기도 바로 섭니다. 뿌리를 바로 내릴 수 있는 터전 마련을 저는 새마을운동을 통해서 한번 해보자는 것입니다. 왜? 학교 교육에서 해줘야 하는데 하지 않고 지금 모든 것이 입시 위주의 교육만 되고 말았습니다. 뿌리 교육에 중심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일본을 나쁜 놈이라고 얘기할 것이 아니라 일본은 지금도 뿌리 교육에 최대의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근본을 바로 세웁니다. 일본의 예절은 대단합니다. 그것은 뿌리 교육을 제대로 했기 때문입니다. 한국도 뿌리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정말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