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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청정 생산기술을 보급을 해야 되는데 예를 들면 폐기물이 나오면 환경부에서 처리를 하는 거죠. 폐기물이 아니라 생산단계부터 해롭지 않게 생산하게 하는 거는 산업자원부 소관으로 법이 돼있어요. 산업자원부가 어떤 물건하나를 만드는데 유해하지 않게 하는 지도를 해야 하는데 공부원이 다할 수가 없으니까. 각 연구단체에서 제안을 하지 우리는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저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다 용역을 주면 정부 돈 받아가지고, 그 프로그램을 진행을 하는 겁니다. 저희는 교육을 시키는 겁니다. 각 공단에 있는 환경담당 간부들.

문. 아까 말씀 한 것과 같이, 새마을 금고가 조직이 그 당시 상황 좀 설명해주시죠.
답. 1963년도는 재건 국민운동이 시작 된지 3년째 된 해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재건국민운동은 1961년에 5.16군사 혁명 이후에 지금으로 말하자면 새마을운동과 같은 일을 시작했던 겁니다. 농촌을 잘살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썼는데 그중에 향토 개발 사업이라는 제목을 내걸고서, 뭐 산간지도 개간을 시키고 여러 가지 사업을 했는데, 그런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밑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게 되겠죠. 저축 권장 운동이 있었습니다. 저축은 제건 이전에도, 우리 대대로 올라가면, 선조 때로 부락에서 조금씩 기금은 모았습니다. 부락단위 그 기금을 가지고 운영해서 남는 돈을 가지고 앞 겨울에 다리가 떠내려가면 다리도 다시 놓고, 꽃상을 꾸미기도 하고 꽃가마를 만들기도 하고, 이런 과정이 동네 기금으로 하는 건데 그것이 그 이전에는 굉장히 소극적으로 했겠죠. 기장을 하더라도 노트에다 했을 정도고, 1963년도에 마을금고를 시작할 당시에는 이미 부락에 있던 저축조직을 활성화 시키고 근대화 시키는 단계입니다. 예를 들면 복식 보기를 사용할 정도로 운영을 체계화 시키고 공식적으로 이사장도 뽑고 이사, 감사를 뽑고 그래서 근대적인 협동조합의 체계를 가추기 시작 것이 1963년도입니다. 이미 해오던 저축운동이 근대화 되었다고, 보시면 아마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의외로 저축할 돈은 많지 않아서 좀도리 저축을 하고 했습니다만 자기네들끼리 돈을 모아서 돌려쓰고 했으니까 은행의 문턱이 높던 시절이라. 그것이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래서 63년도에 시작한 마을금고가, 그땐 법적으로 제도가 전혀 없는 상태에 임의 조직입니다. 임의 단체 그것이 1971년도에 1만100개까지 늘어납니다. 전국에 그래서 전 부락단위에서 저축운동이 자리를 잡게 되겠죠. 그러고 나서 새마을운동이 시작됩니다.

문.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역점 상황이 있었나요?
답. 새마을운동을 처음 이반할 당시에 내무부 쪽에서는 새마을금고를 따로 기획 하려고 했드랬습니다. 저희하고 협의를 하다가, 한 마을에 이미 마을금고가 있는데, 또 하나의 금고를 만들면 지도자간의 주민간의 마찰이 필연적으로, 새마을운동을 이반할 당시에, 새마을 금고를 별도로 만들려고 했드랬습니다. 근데 새마을 금고를 따로 만들 경우에 이미 있는 동네금고하고 필연적으로 마찰이 예상이 돼서 내무부에서는 새마을 금고를 따로 만들지 아니하고 이미 잡고 있는 마을금고를 통해서, 새마을운동을 좀 활성화시키기로 그렇게 했습니다. 초창기 새마을운동 29개 표준사업을 기획할 적에 그중에 하나 마을금고를 채택을 해서 표준 사업으로 채택이 되었습니다.

문. 초기엔 주민들 자체의 자금력이나 그런 게 필요했겠네요.
답. 마을금고의 어떤 점이 돋보였냐하면 그 당시 마을금고를 재건국민운동이라는 데서 지도를 했는데 그 재건국민운동이 내무부 인가 사단법인입니다. 따라서 매분기마다 재건국민운동의 사업보고가 들어갈 때, 마을금고 보고를 이미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주민들이 단합하고, 단합한 결과로 자금이 모이고 그 자금을 가지고 개인 생활향상도 쓰지만 남는 돈으로 동네 발전을 위해서 환경개선을 위해서 이미 쓰고 있었습니다. 그 점을 새마을운동하고 같은 맥락으로 봤던 것 같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은 새마을 금고에 어떤 역할을 했나요.
답. 새마을운동은 워낙 법 국민적인, 국가적이 운동이었고, 마을금고는 자율적인 국지적인 역할이었는데 새마을운동에서 차지하는 마을금고의 역할이라면 이렇게 정리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새마을운동도, 새마을금고도 단위가 부락 단위였구요. 또 직장에는 직장단위고요, 직장 새마을이 있었고 직장 마을금고가 있고 지금도 KBS에도 있습니다. 직장에 또 마을단위에 마을금고가 있었고 마을에 새마을운동 단위가 되고, 그게 둘이 일치합니다. 조직 기반이 일치하는 점이 똑같고, 결국은 동네 잘살게 하려고 한다는 운동이라는 점이라는 취지가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둘을 연계하는데 무리가 없이 호흡이 잘 맞았던 것 같습니다.

문. 70년대 어느 정도의 돈이 모이고 어느 정도로 운영할 수가 있습니까?
답. 70년대 초에는 11,000개 마을금고들이 뭐 자산은 그 당시가 261억, 얼마 안됐습니다. 마을 단위로 보면 200만원도 안됐습니다. 그렇게 작았었는데 새마을운동이 일어나면서 어떤 변화가 있었느냐면, 정부에서 새마을운동을 추진하려다보니까 주민의 단합이 필요했고 기금이 필요했고 어떤 매니지먼트가 필요했죠. 근데 그거를 다 갖추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그래서 기금을 바로 쓸 순 없었죠. 남의 저축한 돈이니까 새마을운동에 바로 투입은 못하는데 마을금고가 운영하다보면 1년에 이익금이 생깁니다. 연말에 백이라는 이익금이 생기면 그중에 30%는 적립금으로 떼어 놓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를 저축한 것에 비례해서 배당을 하는데 그 떼어 놓은 적립금이 지금은 2조가 됐습니다. 한 마을 금고 당 10~13억 정도 될 겁니다. 그걸 가지고 예를 들면 오리동 같은 데는 도서관도 만들고, 노인회관도 만들고, 전국에서 많이 하고 있는 장학금을 줄 수도 있고 지역개발을 위해 많은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새마을운동에서 볼 때는 조직도 같고 취지도 같은데다가 거기서 기금으로 나오는 것이 실제로 새마을을 추진하다보면 직간접적으로 쓰여 졌던 저죠. 그러니까 적극적으로 육성을 했던 겁니다.

문. 결국은 마을을 위해서 재투자 된 거네요.
답. 마을 복지를 위해서, 지금도 가장 이상적인 마을금고의 형태는 어떤 거냐 하면 주민 개인의 경제생활도 도움을 주지만 거기서 남는 기금을 모았다가 그걸로 마을을 잘살게 하는 마을을 살기 좋은 데로 하게 하는 게 가장 큰 취지입니다. 그러니까 저축하고 대출하는 것은 은행하고 같은데, 은행하고 크게 다른 게 적립금을 모아서 부락을 위해 쓴다는 점입니다.

문. 마을금고가 독자적으로 발전하다가 새마을금고와 만나는 과정은 어땠나요?
답. 인제 새마을, 아까 말씀 드렸듯이 새마을운동의 20개 표준 사업으로 채택이 되면서, 새마을운동하고 직접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러면 새마을운동에서 도왔던 것은 시군단위에 새마을 교육비가 있습니다. 지도자 교육비가 있습니다. 그 교육비를 가지고 마을 단위에 지도자를 뽑아서 수유리에 있는 연수원이 있었는데, 그 연수원 왔다가는 교육비를 행정에서 도와줬고요. 마을금고에서는 역시 그들이 하는 일 자체가 주민이고 기금이고 이런 것들이 새마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세력들이 됐겠죠. 인재 재투자와 기금 재투자,

질문. 마을금고가 있었는데 새마을 금고가 바뀌었잖아요. 당시 상황은?
답. 우선 용어의 혼란이 오는데 1964년도에 시작을 하면서 1983년1월에 새마을 금고법이 따로 시작이 됩니다. 그러니까 법으로 봐서는 63년에 시작할 때는 임의 단체고 마을금고고 이름이. 72년도에 신용협동조합법이 생기면서 그 법으로 조항을 받는데 그때도 법에 마을금고입니다. 이름이. 그런데 신협법에서 나와서 마을금고는 금융조직이라기 보다는 주민조직이다 해서 내무부를 주관으로 하는 새마을 금고법이 82년 말에 만들어져서 83년 1월 1일부터 시행이 됩니다. 그때부터 용어는 새마을금고가 돼서 지금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만납니다. 새마을금고하고 만나는 건 마을금고 시절에 만나죠. 1970년대에 근데 그 때 법적 명칭이 마을금고임에도 불구하고 사회통념상 다들 새마을열풍이 전국을 열풍처럼 덮을 때니까. 마을문고도 사실은 마을문고라는 이름이 새마을 문고라는 이름으로 바뀐 시점도 그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공식적인 변경이라기보다는 그 당시에 마을에 대한 개념은 하나의 새마을에 대한 개념으로 마을도 새마을이고 직장도 새마을이고, 그렇게 됐는데 이름은 중간에 오버랩이 되고, 했는데 정식으로 새마을금고로 된 것은 83년 1월 1일부터 새마을 금고 법이 생기면서 그렇게 됐습니다.

문. 새마을 금고로 명칭이 왜 바뀌었나요?
답. 72년에 협동조합법에 마을금고가 들어가면서 마을금고라고 법에 명칭이 됐는데, 그 당시 주무 관청은 재무부였습니다. 그럼 아무래도 재무부는 금융을 다루는 기관입니다. 그러니까 마을금고의 금융기관의 개념으로 이걸 다뤘는데. 마을금고의 속성상 전문적인 금융을 한다기 보다는 주민들의 협동체입니다. 사실상. 그래서 아마 그 같은 마을금고를 보는 시각이 금융기관으로 볼꺼냐, 주민협동조직으로 볼꺼냐 하는 그 마찰 속에서 주민협동조직으로 보는 게 합당하다고 해가지고, 새마을금고법이 내무부를 주무관서로 해서 만들어 진 겁니다. 지금도 한간에 보면 마을금고가 은행창구와 비슷하게, 창구가 있고 하니까 그냥 금융기관으로 보시는데, 농협이 금융활동을 하지만 은행이 아니라 농민 조직인 것처럼, 마을금고가 저축대출을 하지만 은행이 아니고 주민협동조직입니다. 그게 가장 큰 특징인죠.

문. 개별적인 활동을 하나요?
답. 각각 법인입니다. 하나하나가 은행은 지점인데 마을금고는 각각 법인입니다. KBS 독립 법인입니다. 거기 이사장도 있고 감사도 있고 각각 있습니다. 본부는 연합회입니다. 전경련 마냥

문. 연합회는 강제력이 있나요?
답. 있습니다. 법에 뭐라고 돼있냐면 3가지 역할을 하는데 지도, 감독기능하고 공동 이익기능하고, 그 다음에 지도기능, 감독 기능, 공동이익 기능 3가지가 있습니다. 뭐냐면 농촌에서 사실 마을금고를 조직을 만들어서 운영을 하려면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겠죠. 경영 지식도 필요하고, 근데 그걸 농민들이 스스로 습득하거나 그걸 갖춘 사람들이 하긴 어렵겠지요. 그러니까 농촌을 지키는 지도자들을 데려다가 그걸 양성시키고 하는 게, 지도 기능입니다. 그리고 평상시에도 나가서 잘못된 것을, 고쳐주고 바로 잡아주는게 지도 기능이고, 은행에는 이게 없습니다. 두 번째 감독기능, 동네마을에 자체 감사를 뽑는다고 하지만 감사의 기량도 부족할 수 있겠죠, 그래서 연합회가 금융감독원하고 똑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까 한 마을금고에 대한 금융감독 기능은 마을금고 연합회에다가 법률적으로 주어놨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한 마을금고에 한 새마을금고에 돈이 모자르고 한쪽에 돈이 남는다면 둘다 손해입니다. 남는 쪽 것을 연합회가 가져다가 모자르는 쪽에 대출을 해주면 서로 도움이 되겠죠. 한국은행 역할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마을금고도 전산시스템을 은행하고 똑같이 하고 있는데 그걸 개별적으로 다 만들려면 어마어마한 돈이 듭니다. 그러니까 본부에다 공통시설을 놓고서 전국이 같이 쓰면 좋겠죠. 이게 공동 이익 증진을 위한 활동들입니다. 그래서 연합회가 통상 사회통념상 있는 협회하고 다른 점은 법률상 구체적인 지도기능, 감독기능, 공동 이익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 70년대 기억나는 사례 있나요?
답. 참 70년대에는 가슴 뿌듯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농촌에서 저축할 돈이 없어서 아까 말씀드렸듯이 좀도리 저축이라고 해서 그걸로도 했고 그담에 겨울철에는 딱히 할 일들이 없지 않습니까. 가마니 치는 거 아십니까? 쌀가마니 그걸 같이 쳐서 팔아서 그걸로 저축을 하고, 그렇게 모아진 돈을 가지고 대출을 해주고 그 대출한 돈이 굉장히 유용하게 쓰여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일 오랫동안 정부 고관들을 가슴 아프게 한 사례가 하나 있었는데 어떤 집이 농촌에서는 부러운 것이 옆집이 돼지 사다가 키우는 것이 굉장히 부럽습니다. 못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런데 그 마을에 마을금고가 생겨서 자기도 대출을 받아다가 돼지를 한 마리 키우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돼지가 잘되면 동내사람들이 배당을 제대로 받아가지요. 저축한 사람들이 근데 만약에 죽거나 잘못되면 상환을 못하니까 저축한 사람이 피해를 받습니다. 개인이 사다 놓 돼지는 속으로 생각할 때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프니까 잘 안되길 바랄 수도 있습니다. 개인이 사다가 키우는 돼지는. 근데 마을금고는 마을금고에서 대출 받아서 갖다가 키운 돼지는 잘되길 바랍니다. 왜 자기 배당으로 돌아오니까. 그래서 그런 일들이 도시에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직장 안에서도 직장동료가 금고에 대출을 받아다가 시내에다가 양품점을 내놓고 와이프보고 와이셔츠를 팔라고 했을 경우에 직장동료가 기왕에 와이셔츠 사는 거, 기왕에 넥타이 사는 거, 거기 가서 사줘서 입지 않겠습니까? 그 다음 날 복도에서 만나면 어떻겠습니까. 굉장히 가까워집니다. 직장에선 특히 거기 사채 있지 않습니까? 돈이 아쉬울 때 옆에 동료한테 돈 좀 꿔다가 쓰구선 제 날짜에 못 갚으면 그 동료를 보기도 민망하고 그 동료가 달라고 하면 서로사이도 찡찡 해지고 안 좋습니다. 떳떳하게 저축한 돈 갔다가 대출 받아쓰고 그 걸로 잘되면 갚고 직장에서 사채가 없어졌어요. 그래서 신일 선풍기이라는 회사가 있는데 거기에서 금고가 아주 잘했습니다. 그 당시에 정부고관들도 견학을 가고 그랬는데 거기 일화가 이런 게 있었습니다. 종래에는 선풍기를 조립하다가 볼트 너트가 떨어지면 밟아버렸습니다. 그런데 직장 새마을금고가 생기고 나서 그걸 밟지 않고, 주서서 후후 불어다 다시 끼우는 풍토가 생긴 거죠. 왜 직장에 저축한 돈이 남으니까, 그걸 가지고 주식을 샀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우리사주죠. 그러니까 그 직장이 잘되고 금고가 같이 잘되는 게 같이 맞물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직장이 조금이라도 이익이 많이 나면 금고가 배당이 더 오겠죠. 그래서 애사심이 생긴다고 그래서 직장 금고도 굉장히 많이 펼쳐져 있습니다. 지금 대그룹들 다하고 있습니다. 삼성그룹, 엘지그룹, 현대그룹, MBC도 하고 있고, KBS도 하고 있고, 국회에도 있습니다. 국회에도 직장금고 만들어 놓고 그랬는데, 그 당시 새마을의 개념은 거주의 새마을하고 직장의 새마을이 동등한 개념 아니었습니까? 마을금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들이 저녁에 늦게 들어갔다 아침에 나오면 눈뜨고 있는 시간은 직장에 더 많이 있거든요. 그것도 하나의 마을입니다. 그 단위에도 마을금고가 잘 육성이 됐죠.

문. 농촌금고 중에서 돈을 제일 많이 모은 게 얼마나 됐나요?
답. 제일 많이 된던 곳은 제일 먼저 1억을 돌파한데가 경북영천에 대창금고라는 데가 있었고, 최근에는 1000억 넘는 데가 많이 생겼는데 조금 안타까운 것은 IMF이후에, IMF이야기를 드릴 수밖에 없는데 IMF 당시 전국에 새마을금고가 2천 800개가량 있었습니다. 그 금융위기가 나니까 누구든지 새마을 금고가 제일 먼저 문을 닫을 거라고 했습니다. 근데 지금까지 새마을 금고만은 공적 자금을 10원도 안 받고 견딘 유일한 기관이 됐습니다. 이건 금융기관에서 정말로 케이스 스터디 할 중요한 사례입니다. 새마을금고하고 유사한 협동조직들 있은데 전부 공적 자금 받았습니다. 그런데 새마을금고는 그렇게 시원찮아 보이고 그런데도 어떻게 그 IMF파고를 10원도 공적자금 안 받고 견디면서 건실하게 운영이 되고 있습니다.
그 과정을 저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동네에서 지도자를 뽑을 때에 그 지도자가 다른 단체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 지도자는 누가 되도 직접 관계가 없습니다. 근데 새마을금고지도자는 아무나 되선 안 됩니다. 왜 자기 돈을 관리할 사람 아닙니까? 바꿔 말씀 드리면 가장 신뢰 받는 사람을 뽑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첫 번째 과정이었고 두 번째 IMF가 딱 터져서 금고의 예금은 10%로밖에 1년에 이자를 안줬는데 밖에서 18%, 21%막 줬는데도 돈이 빠져나가지 않아요. 그만큼 주민 조직이 굳건하게 다져졌던 겁니다. 마을금고 돈 다 빼가지고 밖에다 저축하면 돈 배는 받아요. 이자. 돈이 별로 움직이질 않는 거예요. 왜 여기서 남는 돈이 결국은 나한테 다 올 이 자체가 내 금고입니다. 이 금고에서 이익이 많이 나도 내꺼, 적립금이 돼서 유용한 사업을 해도 내가 이용을 할꺼에요. 그래서 동네가 내 금고라는 개념이 있다 보니까 강력한 협동 체제가 이미 구축이 된 겁니다. 그러니까 움직이질 않았고. 그래서 지금까지도 자랑 중에 하나가 그 어려운 금융 위기를 공적자금 안 받고 견딜 수 있던 게 금융논리로만은 설명할 수 없는 마을 금고만에 장점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문. 이자율에 따라서 왔다갔다 안하고 나한테 돌아온다고.
답. 또 하나는 연합회가 감독권을 가지고 있는데, 사실은 감사 나온다고 하면 누구든지 싫어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시적으로 볼 적에 연합회 감독이 살아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새마을금고는 87년에 새마을금고 법으로 출발할 때 지금으로 말하면 예금 보호제도를 국내에서 최초로 시작했습니다. 뭔 소리냐면 한 동네 새마을금고가 문제가 생겨서 파산이 되면 저축한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걱정 마시오. 우리 연합회가 물어줄 게 하는 기금을 만들었어요. 83년도에. 은행은 IMF때 만들이 않았습니까. 기금. 근데 83년도에 어떻게 만들었냐면 저축하는 데서 금고가 저축을 받으면 그 중에 일정한 액을 연합회로 올립니다. 보험을 든 거죠. 말하자면. 그 돈들이 IMF날 당시에 680억인가 한 700억 가까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 동안에도 사고가 나면 저희가 물어줬습니다. 가끔 보면 신문에 불쾌하고도, 나오는데 전혀 관계없죠. 연합회에서 그 돈을 물어주니까. 그래서 그걸 바탕으로 해서 IMF우리 자체가 이미 시작한 기금가지고 넘긴 겁니다. 별도의 정부 돈 안 받고 정말 대단한 일을 한거죠.

문. 지금 현황은 어떤가요?
답. 1500개 정도의 새마을금고가 남아있습니다. 많이 있을 때는 1977년도에 4만2천436개까지 있었는데, 그 당시에 정부와 저희의 방침은 전 마을에다가 다 만들고 직장에 만개가량 만들고, 이렇게 하면 마을 숫자가 6만개 정도 왰습니다. 플라스 직장 만개 총 7만개를 만들려고 했는데, 이게 돈 만지는 일이다보니까. 미쳐 교육이 뒤따라가지 않으니까. 사고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사고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78년, 79년도 들어서면서부터 간간히 사고가 터지기 시작해서 아 이러면 안되겠구나 싶어서 그 때부턴 금고를 무분별히 늘리지 않고, 상당한 교육과 감독 뒷받침 아래 금고 숫자가 줄어 왔습니다. 그러다 IMF이후에 정말로 대출해 줬는데 못 받아서 문제가 생겨서 도저히 감당이 안 되면 저희가 돈을 물어주고 옆 동네와 통합을 시켰습니다. 이거는 대단한 일입니다. 이웃동네에서 한쪽금고는 파산을 하고 한쪽 금고는 잘된다고 했을 적에 은행 같으면 이거를 파산으로 끝냅니다. 근데 우리는 같은 지역에서 이러면 되겠느냐? 그쪽 회원들 우리한테 옮겨라 문제 생기는 건 연합회가 도와주니까. 그래서 이것을 통폐합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조직 숫자는 줄어들었음에도 회원수자는 늘어나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 회원들이 떠나지 않고 그 옆에 금고로 같이 합류를 한 겁니다. 1500개의 금고수라고 하지만 점포수는 3000개가입니다. 그것도 주구서 깨는 게 좋으냐? 물어줄꺼 물어주고 함께 하는 게 좋으냐? 저희는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왜 주민 협동조직입니다. 이거는

문. 일종에 상부상조.
답. 그러니까 외국의 협동조합은 못사는 사람들이 모여서 잘사는 사람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지금도 그게 협동조합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데 마을금고에선 처음부터 그걸 거부했습니다. 어떻게 거부를 했느냐? 직장에서 노동조합만이 직장금고를 만들어서 마을금고 설립인가 신청이 들어오면 제가 반려를 시켰습니다. 노사가 같이 들어와라. 왜 한 동네에서 못사는 사람들끼리만 마을금고 만들고 잘 사는 사람을 제외시켜버리면 그 동네가 상부상조가 되겠습니까. 잘사는 사람도 들어오고 못사는 사람도 들어와서, 잘사는 사람들은 주로 저축을 하겠죠, 못사는 사람은 같다 쓰겠죠. 그러면서 서로 상부상조하는 게 마을금고의 취지지. 못사는 사람들 끼리 뭉쳐가지고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 해가지고 잘사는 사람에게 대응하는 거는, 이거는 서구식 협동조합이다. 우리는 서구식 협동조합이 아니다. 이거죠.

문. 그러면 개인적으로 그때는 왜 반대를 했나요?
답. 새마을운동을 시작할 당시에는 중앙기구가 없었습니다. 10년 전에 재건 국민운동 시작할 때는 재건국운동본부가 먼저 만들어졌거든요. 재건국민운동 본부를 통해서 재건 국민운동을 했는데 새마을운동 내용하고 상당히 비슷합니다. 거기 보면 농로개설, 지붕개량 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재건운동 국민본부가 당시 정부 여당이었던 공화당하고 마찰을 빚습니다. 전 국민을 묶어서 국민운동을 하는 단체가 이것을 권력이라고 생각을 한 것이죠. 말하자면. 그 권력이 그것이 정당 권력하고 상충해버립니다. 그러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3년 만에 재건국민운동본부를 해체시켜버립니다. 법을 없애버려 가지고. 그거를 1970년도에 새마을운동 시작하면서 박대통령께선 그 생각을 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새마을운동 처음 시작할 때는 새마을 본부가 없었습니다. 새마을 본부는 박대통령 돌아가시고 난 후에 생겼습니다. 물론 장단점은 있겠죠.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박대통령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을 합니다. 다만 나중에 박 대통령이 서거하시고 난 이후엔 새마을운동을 추진할 수 있는 구심점이 없어졌죠. 그 이후에 새마을본부는 나름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은 하는데 시작당시에는 모든 기관이 새마을의 주체가 되라. 문교부에도 새마을담당 부서가 있고, 내무부엔 관사 부서 하나만 뒀습니다. 과 단위 부서하나만 두고, 물론 새마을 담당과 부국장급도 두고 했습니다만, 새마을 조직이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것이 박대통령 서거할 때까진 그렇게 하다가 서거하시고 나서 인제 새마을본부가 생겼죠. 그 이후에 새마을 본부에서 박대통령의 빈자리도 채워야 되겠고 지금까지 발전해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개인적으로 찬성합니까?
답. 그 당시가 1980년대 초입니다. 그 당시에 새마을 본부로 새마을 금고가 합류되는 것을 반대한 이유는 이런 거였습니다. 새마을운동은 범국민적인 운동이었으니까. 어차피 모든 주민 잘살기 운동은 거기로 통합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직간접적으로 지휘를 받아서 통합이 아니라 같이 동참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의미에선 마을금고도 동참한 일원이죠. 그런데 우리나라 국민운동이 전 국민이 참여한 운동이 가장 체계적으로 시작을 한 게 제가 볼 때 재건 국민운동입니다. 1972년에 시작한 재건국민운동을 한 그 기록을 보니까 9백 몇 십까지 사업이 있습니다. 사업 종류가 조국 근대화를 시키기 위해서 농촌을 발전시키고 향토를 개발하기 위해서 한 일들이 아까 말씀 들였듯이 저축부터 시작해서 환경개선까지 해가지고 지금은 찾아 볼 수없는 문명퇴치 사업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한글 모르는 국민들이 3만이 넘는다고 해서 저녁에 야학으로 문맹퇴치도 있었고,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서 잘 기르자는 가족계획사업도 거기에 있었고 또 마을문고 사업도 했습니다. 금도하고 여러 가지를 했는데, 국민운동으로써 그 많은 사업을 하다가 재건국민운동으로 하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전부 전문화 독립이 됩니다. 가족계획도 전문화 돼서 사단법인이 되고, 보사부로 산하단체가 되고, 마을문고도 문교부 산하단체가 되고, 마을금고도 별도로 되고, 그러면 60년대 초에는 모든 국민운동이 통합 국민운동으로 오다가 70년대 되면서 이게 세분화, 전문화 되서 독립이 됐는데 80년대 와서 다시 뭉친다는 얘기나 마찬가지죠. 통합을 한다면. 그래서 사회발전흐름에 역행한다. 그냥 놔두는 것이 더 전문화되고 발전이 된다 하는 이유로 제가 반대를 했습니다. 각각 놓는 것이 더 좋다. 다만 각각 놔도 새마을운동이 지양하는 취지를 어긋나지 않지 않느냐. 근면저축으로 주민들 저축시키고 남는 돈으로 지역복지 하니까 그냥 밖에 둬라 이게 제 취지였습니다.

문. 개인적으로 박대통령과 기억은
답. 72년도에 재건운동 향토개발 사업을 담당을 했습니다. 그래서 따로 만나 뵌 적은 없었는데 재건국민운동이라는 게 마을금고를 박대통령께서 얼마나 좋아 하셨냐면 재건국민운동을 75년도에 해산이 됩니다. 그 당시 전국 새마을금고 숫자가 3만5천 가량 되는데 전부 영세한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흥부자식마냥 영세한 자식 3만5천개를 놓고서 아버지 재건국민운동이 죽어 버렸습니다. 이거 다 죽게 생겼습니다. 말하자면 씨앗 뿌려 놓구선 싹난 배추를 놔두고 비닐하우스를 벗겨버린 거와 똑같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제가 내무부에 들어갔습니다. 가 가지고 이거 어떻게 할꺼냐. 이제 막 싹 튀어놨는데. 지금 손 떼면 다 말라 죽는다.지금 통합민주당 원내 대표 하시나요? 최인기 당시 새마을기획 과장께서 제 얘기를 관심 있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몇 년만 도와주면 돕는다는 게 교육시켜주고, 운영비 약간 도와주는 겁니다. 우리 본부에 금고에는 아닙니다. 몇 년 만 더 도와주셔서 이것들이 막 싹이 놨으니까 비닐 벗겨도 견딜 만큼만 도와시면 전부 자립할 수 있습니다. 아깝지 않습니까. 여태껏 해온 것이. 그랬더니 최인기 당시 과장께서 대통령께 보고를 드리자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1주일간 최인기 과장님 휘하에 간부들하고 같이 대통령 각하께 할 보고서를 만들었죠. 지금까지 이렇게 해서 이런 성과가 있는데 앞으로 이렇게 될 것 같습니다. 라는 보고서입니다. 그 당시에는 슬라이드로 워드도 업고 컴퓨터도 없으니까 슬라이드로 만들어서 1976년 6월 25일 새마을담당 국무회의가 있었습니다. 그때 박경원 내무담당님께서 그 자료를 직접 보고를 했죠. 그때 대통령께서 하신 말씀이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마을금고는 비단 저축과 대출의 문제가 아니다. 그게 잘되면 주민들이 단합을 하고, 그 단합된 힘 가지고 새마을을 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적극 육성해라. 참 좋은 것이다. 대통령각하께선 마을금고 보고를 많이 받으셨어요. 이미. 그래가지고 굉장히 새마을대회 전국 새마을 대회 때마다 빠지지 않고 마을금고를 육성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면 새마을운동이라는 틀 안에 여러 가지 운동이 있는데 유독 새마을금고를 왜 강조하셨습니까? 보고를 받아 보니까. 그게 되면 주민들이 단합을 하고 그 기금을 가지고 새마을이 추진하려던 각종 물량사업도 다 추진을 하고 간간히 보고 드렸듯이 새마을 저축과 대출 과정에서 그 눈물 겨운 얘기들 예를 들어 청계천 주변에서 리어카 끄는 아저씨가 있습니다. 그분이 하루 일당이 좋아서 돈이 많이 생기면 제일 먼저 뭐할 것 같습니까. 일찌감치 퇴근하셔가지고 소주에다가 포장마차에 들어가 한잔하시겠죠. 그 돈을 모으자는 것이 저희 취지였습니다. 그 소주를 먹고 그렇게 해버리면 누가 돈을 버냐면 소주회사가 돈을 벌고 그 양반은 내일부터 또 민둥산 황무지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하지 말자. 그 돈을 모으자, 그 돈을 모아서 마치 민둥산 아래 저수지 막는 것처럼, 비가 와가지고 민둥산 아래 홍수가 와서 싹 씻겨 나가면 그 다음날부터 또 땅 갈라지지 않습니까. 그 물 못 내려가게 막자. 우리 동네 저수지 만들자. 마을금고 만들자. 그 돈 모아서 땅이 축축해지면 거기서 싹도 나고 그 다음 가뭄도 홍수도 없을 것 아니냐. 그러면 당신도 거기서 리어카가 아니라 용달차 살 수 있을 거 아니냐 저희의 교육이 70년대 교육이 이거였습니다. 그것이 각하께도 보고가 되고 그래서 각하께서도 상당히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다.

문. 인제 새마을운동이 마을금고 자체가 앞으론 어떻게 가야 될지.
답. 저는 평생 마을금고에 몸담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마을금고에 대한 애착이나 자부심이 누구에게 뒤지기 싫습니다. 분명히 좋은 운동입니다. 취지는 금융기관 흉내 내선 안됩니다. 마을금고에 들어오는 저축이 큰돈들이 지역 요새 지역이 개발된다고 하면 뭉태기 돈들 1억,10억 큰돈들 생깁니다. 그 돈이 마을금고에 들어오는 것은 꼭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 돈은 투자할 돈입니다. 0.1프로의 금리를 쫓아 움직일 돈입니다. 그런데 마을금고에 고금리를 받으러 들어왔다고 하면, 그 돈은 대출 해줄 때 고금리가 되겠죠. 누가 대출 받아갑니까? 마을금고 회원, 가난한 회원들입니다. 그러니까 마을금고로 들어오는 돈이 싼 이자로 들어와야 회원들한테 싼 이자로 대출할 수 있습니다. 큰돈이 들어오면 고금리로 들어 올 수밖에 없습니다. 큰돈을 저금리로 들오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근데 푼돈 만원, 2만원 몇 천원은 금리 안 따지고도 저축합니다. 그래서 적은 돈들이 정말 들어와야 합니다. 금리를 크게 기대하지 않는 돈들이 들어와야, 그 돈이 마을금고에 기금이 되야 싼 이자로 대출을 해줄 수 있고 그래야 영세민들이 그 돈을 받아다가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첫째는 마을금고에 싼 이자로 들어와야 한다. 그것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뭐냐면 2.3년 전에 인천에서 어떤 어머니가 애들 셋, 15층 아파트에서 이불 덥고 자기도 떨어져서 죽었습니다. 여름 방학이 됐는데 3학년짜리 수영강습 할 3천 5백 원이 없어서 큰 놈들 두 놈을 먼저 덥고 마지막 애를 않고서 떨어져서 4명이 죽었습니다. 3천 5백 원이 없어서. 그 동네에 마을금고에 세대수가 만 가구라고 치면 만 가구에 놀고 있는 돈이 얼마입니까? 서랍에 있는 동전 아빠주머니에 안 쓰는 거 만원은 안 되겠습니까. 만원 왜 만원만 되겠습니까. 만원 치면 얼마입니까? 1억이 놀고 있습니다. 1억이 놀고 있는데 옆에 이웃은 3천 5백 원이 없어서 지금 죽었습니다. 옛날에 마을금고 할 때 담장을 하나두고 서로 협조하지 않습니까? 지금은 담이 아니지 않습니까? 20cm 벽 사이에 이웃이 누군지 모릅니다. 우리 국민들 북한도 다져왔겠죠. 해외도 다녀왔죠. 20cm 벽 넘어 이웃에 가 본적 있습니까? 이것을 살리자고 하는 것이 취지였는데 그 취지로 돌아가자는 게 저희 생각입니다. 마을금고 은행 아닙니다. 저축하고 대출해주는 거 은행 안 받습니다. 안 받는 다기보단 받을 프로세스가 없습니다. 지금 공과금도 안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왜 수고비가 안 나오니까. 마을금고는 받습니다. 잔돈도 그 노는 돈 모으면 그 돈 가지고 우리가 어려운 사람들 잘 살아보자는 자금조성과정에 취지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많이 기금이 생겨가지고 배당으로 돈 저축 많이 한 사람에게 배당이 많이 가겠죠. 그거 반대합니다. 한동네에서 돈 이 많은 사람은 저축을 했고 돈 없는 사람은 대출을 받아다가 이자를 냈습니다. 1년 내내. 그럼 돈 없는 사람이 낸 이자를 돈 있는 사람이 배당 받아가겠죠. 그렇게 빈익빈 부익부 되겠네요. 그렇게 하지 말고, 돈 있는 사람에게 이자를 안 줄 수 없습니다. 안주면 안 들어오니까. 은행만큼의 이자는 할 수 없는데 그 이상에 이자를 줄 수 있을 때는 대출이자 낸 사람에게 되돌려 주는 제도가 이용고배당이라고, 새마을금고 법에 있습니다. 그 법 추진을 제가 했습니다. 이용고배당을 그대로 넣어 왔습니다. 그러면 그건 뭘 뜻하냐? 마을금고를 많이 이용한 사람에게도 돌려주자. 그러면 가난한 사람에게도 세 번째 그러고도 남는 돈 몽땅 갈라먹지 말고, 부락 기금으로 떼어 놨다가, 예를 들어서 정부가 해줄 일인데 아직 정부의 손길이 우리 마을까지 못비치고 개인이 하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운 돈, 그걸 누가 합니까. 그걸 새마을금고가 합니다. 그 적립금가지고, 그 적립금이 아까 말씀 드렸듯이 전국에 2조원 가량이 모여졌고, 평균 1500개로 나누면 10 몇억 씩 되는 셈인데. 그걸 몽땅 갖다가 쓸 순 없겠죠. 그 적립금은 니 돈도 아니고 내 돈도 아니고 니 돈도 되고 내 돈도 되는 공동 기금입니다. 그걸 가지고 부락에서 소망하는 것을 해결하는 거죠. 그것이 새마을운동이 지향하는 거 아닙니까. 새마을운동에선 조직도 우리와 같고, 정신도 우리와 같은데 한 가지 없는 것이 돈을 만드는 기능이 없습니다. 그걸 저희가 담당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새마을운동과 새마을금고가 같이 가야할 연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조직 기반이 같다. 조직 취지가 같다. 거기엔 없는 기금 조성이 여기에있다. 그래서 같이 가는 겁니다. 그래서 저희는 바라는 것이 새마을 금고를 통해서 개인들이 잘살게 되고, 그 지역이 살기 좋은 마을이 되는 겁니다. 예를 들으면 요새는 호화스러운 얘깁니다만 너무 살찌는 게 걱정이지 않습니까? 거 살 빼는 것도 돈 들잖아요. 그래서 새마을금고 위에 강당에다가 헬스클럽 만든 데가 많습니다. 회원들만 와서, 새마을금고 저축하는 사람들만 와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이 와서 이용하는 겁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헬스 다닐려도 몇 만원 들지 않습니까? 그게 지역에 기여하는 거죠. 장학기금 주고 이런 건 말도 못하구요. 1998년이 IMF첫 후 해 아닙니까? 그해 저희가 뭐했냐면 사랑의 좀도리 운동이라는 것을 했습니다. KBS하고도 같이하고 SBS 같이했는데, 그전에는 저축할 돈이 없어서, 저축할 재원을 위해서 좀도리 저축을 했는데, 98년도 이후에는 야, 길거리 나 앉은 사람이 저렇게 많은데, 길거리에 나앉은 삶이 저렇게 많은데, 굶주리는 사람이 저렇게 많은데, 우리 전국 새마을금고가 옛날에 하던 그 저축운동 하자. 전기저축 그걸 가지고 저들을 돕자. 이래가지고 전국에서 11월에서 2월까지 절미운동을 합니다. 그걸 사랑의 좀도리라고 하는데 그게 1년에 얼마를 모으냐면 구세군 자선냄비가 18억 모을 적 때 저희가 25억 모았으니까 약 50%를 더 모았습니다. 지금 몇 년째입니까? 저희가 98년도 10년째 하고 있습니다. 잘 모르는 분들이 많더라구요. 1년에서 20억에서 30억 정도의 그걸 모아서 지금 사랑의 열매 쪽에도, 공동모금회에도 주고, 탈북자에게도 주고 좋은 용도로 쌀을 갖다가 공급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가 가능하냐면 다 국민들입니다. 그들도, 내는 사람들도. 새마을 금고라는 조직이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은행에선 안하는 일을 왜 매년 거기서 합니까? 우리는 법 1조에 보면 저축과 대출만이 고유의 업무가 아니라 회원들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향상하고 지역사회 개발이라는 게 들어있습니다. 우리 지역사회를 잘살게 만드는 게 고유의 업무로 들어 있습니다. 은행에 없는 거죠, 그 역할이 비 은행부분의 그 역할이 마을금고의 정신이 되고 문화가 되서 그걸 바탕으로 하는 것이 사랑의 좀도리 운동이고 그렇게 크게 큰 성과를 얻고 있습니다.

문. 마지막으로 새마을운동 같은 게 필요하다고 보시는지?
답. 새마을 운동에서 대해서는 시작단계부터 현장을 봐왔습니다. 정책 이발하시는 분도 같이 만나보면서 그 기관을 다니면서 또 우리 마을금고를 거기로 연결시키는 일을 하다보니까, 그 누구보다도 새마을운동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 안타까운 것은 우리나라 새마을운동이나 재건운동이랑 비슷한 것이 일본에 신생활 운동이라고 있었습니다. 제가 81년도에 새마을 담당하는 공무원과 전국에 우수한 새마을금고 지도자와 같이 일본을 견학을 간적이 있습니다. 시찰을 간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신생활 운동본부를 방문을 했습니다. 신생활운동이 저희 재건운동하고 똑같이 시작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일본 패전 후에 민간운동으로 말하자면 정부가 커버할 수 없는 부분을 민간운동으로 한건데 최초에 한 운동이 뭐냐면 폐품수집이었습니다. 패전 후에 워낙 못사니까 폐품들 모아가지고 거기서 기금들 모아가지고 쎴는데, 그것이 80년대 이후에도까지도 계속 되고 있더라구요. 그것이 부러웠습니다. 우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상품을 만들었습니다. 다행이도 새마을운동이 정권 바뀔 때마다 약간의 부침은 있었습니다. 바뀌지 않고 명맥을 유지한건 너무나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을. 그러니까 새마을운동이 됐건 뭔 운동이 됐건 전 국민들이 같은 가치를 추구해야 될 시대정신은 어느 때나 있습니다. 근데 그게 누가 할꺼냐? 정부가 주체가 될꺼냐 민간 주체가 될꺼냐, 민간이 주체가 돼야 국민운동이겠죠. 민간 주체가 되어야하는 데 우리 같은 경우에는 1960년대는 재건입니다. 왜 50년대 6.25로 황폐해진 강산을 재건설 시키는 작업이 60년대 한 겁니다. 60년대 다시 일궈 세워 놓고 보니깐 그거 가지곤 안돼. 70년대 조국을 근대화 시켰잖아요. 그 위에다가 새마을을 건설했지 않았습니까. 물량적인 새마을은 70,80년대 건설이 됐죠. 그러니까 지금 시대정신 따로 최근에 대통령님께서도 국민운동의 필요성을 또 얘기를 하셨는데, 그 국민운동이 뭐가 됐든 그 추진 주체가 민간운동이어야 한다면 지금까지 다 꺼진, 요새 새마을운동에 참여한 분들이 얼마나 열성적인 분들입니까? 새마을운동 한다고 해서 정치적으로 도움을 받습니까. 하다못해 70년대는 새마을지도자가 지도자 신분증을 가지면 군수실로 바로 갈 수 있는 특혜가 있었습니다. 요샌 그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강릉에 수해가 나면 제일 먼저 앞치마 두르고 쫓아가는 단체가 누굽니까? 그게 새마을 단체입니다. 어느 시대든지 국민이 커버해야할 부분이 있다. 전체 국민이 합의할 수 있는 그 시대정신이 있다면 그걸 추진하는 것이, 지금의 새마을운동 제쳐놓고 또 뭘만들 겁니까. 그러니까 시대정신에 결부한 합일 될 수 있는 그러한 가치를 계속 추구할 단체 그거는 지금의 새마을운동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것이 옛날처럼 지붕개량하고 농로개설 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 지금은 그거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의 시대에 필요한 전국민이 참여할 일 있다면 그것이 새마을운동의 과제고 꼭 필요합니다.